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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Dec 18. 2018

김밥과 도시락

그리고 샌드위치

2013년 봄부터 17년 겨울까지, 나는 약 5년간 도시락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었다. 엄마의 장례식 후 남은 돈 천만 원에 당시 내가 가진 돈 백만 원을 더해 1100만 원이라는, 내가 가지기엔 많고 사업을 하기엔 터무니없던 그 돈으로 나는 무작정 창업이라는 것을 해버렸다.


엄마는 김밥을 잘 말았다. 워낙 손이 크고 음식을 잘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엄마 김밥은 먹어본 이들 모두가 엄지를 세워 줄 만큼 맛이 좋았다. 그래서 어릴 적 나는 소풍 날짜가 정해지면 소풍보다는 엄마의 김밥에 더 기대가 컸다. 소풍 전날은 함께 마트에 가서 김밥 재료와 유부피, 과자와 음료수를 샀다. 저녁엔 거실에 모여 앉아 엄마와 함께 김밥 재료를 준비했다. 엄마가 칼질을 하는 동안 우리는 맛살이나 햄 껍질을 벗겨 하나씩 떼어내며 서너 개에 하나쯤은 입으로 집어넣기에 바빴다.

비단 김밥 재료뿐 아니라 우리에겐 온갖 음식을 다 직접 만들어 먹이던 엄마의 새끼들로써 누릴 수 있던 소소한 재밋거리가 있었다. 엄마가 장조림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덩어리의 양지고기를 삶아서 찢을 땐 꼭 거실에 신문지를 깔았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뜨거운 고기를 찢으면 우리는 모두 모여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다. 엄마는 열심히 고기를 찢다가 일부러 조금 작거나 크게 조각을 내어서  '아유 이건 크기가 안 맞아서 안 되겠네' 하며 돌아가면서 우리들 입에 고깃 조각을 쏙 하고 넣어주곤 했었다. 탕수육을 만들 땐 밑간을 해서 튀겨낸 돼지고기를 소스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절반 가까이 집어먹었다. 그러고도 배불리 소스를 찍어 먹을 만큼 엄마는 우리가 배를 곪지 않게, 욕심내지 않아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음식을 만들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젓가락이 쉴 새가 없게 구워내던 정구지찌짐으로, 남산에서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타고 온 날에는 커다란 양수냄비에 산처럼 쌓인 찐 홍합으로 엄마의 사랑을 가득가득 배불리 먹여주었다.


엄마의 김밥은 손이 많이 갔다.

당근은 잘게 다진 후 팬에 볶아서 밥과 함께 깨소금 간을 해서 비볐다. 다진 당근은 엄마의 김밥이 유독 예쁘게 보이는 나름의 비결이었다. 초록색은 흔히들 사용하는 시금치 대신 오이를 길게 잘라 소금에 잠깐 절인 후 물기를 꼭 짜서 넣었다. 그러면 상할 위험이 덜 하고 아삭한 식감이 살아났다. 계란은 흰자와 노른자를 나눠 각각 지단을 부쳤다. 햄과 맛살은 오이와 같은 두께로 길게 잘라 팬에 부쳐내고, 사각어묵은 간장 양념에 달큼하게 졸였다. 거기에 단무지가 더해지고, 그날그날 냉장고의 상황에 따라 혹은 엄마의 기호에 따라 멸치볶음이나 씻은 김치, 진미채 무침이 들어가기도 했었다.


소풍날 아침은 깨우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햄과 맛살이 기름에 부쳐지며 내는 타닥이는 소리, 어딘가 들뜨는 집안의 공기가 좋았다. 엄마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많이도 만들어 두었다. 우리가 일어나 씻고 옷을 입는동안에도 엄마는 계속 계속 김밥을 말았다. 우리는 부엌과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재료가 길게 삐져나온 김밥 꼬다리를 손으로 집어먹었다. 엄마는 소풍에 가져갈 김밥은 제일 예쁘게 잘린 걸 단면이 보이게 가지런히 담았고, 옆으로는 통통하게 속을 채운 유부초밥을 함께 담았다. 도시락통 귀퉁이에는 단무지와 햄을 따로 작게 잘라 챙겨 넣었다. 배낭의 가장 아래에 위생팩으로 두 겹을 꼼꼼히 싼 도시락을 넣고, 가제수건으로 감싼 얼린 물 하나, 시원한 탄산음료 하나, 과자까지 차곡차곡 쌓아 넣으면 소풍가방 준비가 완료된다. 그러고도 엄마는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귤이나 삶은 땅콩 같은걸 봉지에 담아 내 손에 들려주었다. 소풍이라고 해봐야 지역의 산이나 근교의 유원지를 찾아가는 정도라 소풍 자체에 대한 기대나 흥미는 그다지 없었지만 내 가방엔 사랑이 가득 들어찬 엄마의 김밥이 들어있으니 어깨는 무거워도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점심시간에 돗자리에 둘러앉아 가방을 풀면 나처럼 엄마가 싸준 김밥을 가져온 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은박지에 말린 천 원짜리 김밥을 사 온 애, 김밥 대신 빵집에서 산 사라다 샌드위치를 덩그러니 꺼내놓거나 양념치킨을 박스채로 가져오는 애도 있었다. 개중에는 자기 엄마 김밥만 자랑하기에 바쁘거나 김밥 없이 온 애들에게 묘하게 창피를 주는 철없는 애들도 몇 있었다. 친구들에 비해 도시락이 변변찮아 말이 없는 애들을 보면 나는 어딘가 측은한 마음이 발동해 그 애들에게 내 김밥과 네 음식을 함께 나눠 먹자고 권하곤 했다. 먹는 걸 좋아해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 온 통통이만이 할 수 있는 배려였다. 어릴 땐 그런 게 부끄러울 수도 있는 나이였지만 나는 그저 '우와우와 이것저것 다 먹을 수 있다' 하며 좋아하기만 했었다. 엄마는 늘 김밥을 아주 넉넉하게 챙겨주며 '친구들하고 같이 무라~' 했었다. 물론 어린 마음에는 양념치킨을 박스채로 가져온 애가 꽤 부럽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동이 나는 건 늘 내 도시락의 엄마표 김밥이었다.

소풍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집 안엔 여전히 김밥의 고소한 냄새가 남아있었다. 식탁에는 커다란 원형 그릇에 층층이 피라미드처럼 쌓인 김밥이, 냄비에는 계란 감잣국이나 어묵탕이 한솥 가득 끓여져 있었다. 그럼 또 오늘 처음 김밥을 먹는 사람처럼 맛있게 김밥을 집어먹었다. 매일 먹어도 하루에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엄마의 김밥이었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우리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해의 마지막을 선사했다. 선사라기 보단 통보에 가까운 운명의 장난 같기도 했다. 엄마가 죽은 그해에 나는 생애 가장 슬프고도 가장 성대한 생일을, 가장 많은 축하와 위로를 받으며 보냈다. 이곳저곳에서 케이크며 선물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해 12월 31일을 끝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반지하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생활을 했다. 많이 자고, 많이 울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이 파고들며 커지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나를 집어삼키는 듯 했다.

언니는 아이를 돌보며 바쁘게 지내다 보니 조금 마음이 나아진다고, 나도 얼른 다시 일을 시작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다시 주방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일을 하며 바쁘게 지내는 것이 혹 너무 섣부른 선택이 되어 아직 아물지 않은 내 상처가 더 곪아버리지는 않을까 지레 겁이 났다.

장례식을 마친 우리 삼 남매에게는 천만 원이라는 돈이 남아 있었다. 셋이서 나누자니 애매하고, 누구 하나가 혼자서 갖기에는 큰돈이었다. 언니가 그 돈을 내게 건넸다. 엄마가 주는 마지막 기회다 생각하고 혹시 수제도시락 가게 같은 걸 해보면 어떻겠냐고, 결혼식 준비를 하며 알게 됐는데 소자본으로 창업을 하기에 괜찮을 것도 같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날부로 여지껏 들어본 적도 없던 수제도시락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하지만 먹는 것보다 꾸미는 것에 치중한 도시락들이 대부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그러다 자연스레 메뉴 구상과 창업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다.



엄마가 준 마지막 선물 같았던 천만 원과 당시 내가 가진 백만 원을 더해 1100만 원이라는 아주 많고도 적었던 그 돈을 쪼개고 쪼개가며 나는 보증금 500만 원, 월세 35만 원의 4평 반짜리 작업실을 마련했다. 환풍기도 없고, 온수기도 없었다. 황학동에 가서 발품을 팔아 구한 4 문형 냉장고, 작업대 두 개, 싱크대 하나, 3구짜리 가스 하나가 내 작업실 살림의 전부였다. 페인트를 직접 바르고, 싱크대 앞엔 삐뚜름하게 타일도 붙였다. 2달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3월 7일 드디어 문을 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도시락 가게 '피크닉랄라'

지금 생각하면 조금 유치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때 당시 내 머리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소풍 가는 날 아침의 들뜨는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딱이다 싶은 네이밍이었다.

식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도시락, 버리는 것 없이 먹을 수 있는 걸로만 가득 채운 도시락, 집에서 엄마가 만든 것처럼 깨끗하고 건강하게 만든 도시락이 내가 피크닉랄라를 운영하는 동안 내건 슬로건이었다. 특별히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제법 입소문이 나서 소위 말하는 대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돈 욕심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이 정도면 잘 되는 것 아냐?' 하는 소박하고도 안일한 만족감을 느끼는 정도의 벌이는 되었었다.

 

메뉴를 구성할 때 꼭 김밥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야심 차게 메뉴를 짜고 김밥 메뉴도 몇 가지 넣었지만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엄마가 만든 것 같은 김밥 맛을 낼 수가 없었다. 명색이 도시락집인데 김밥이 없다니, 하지만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중간 맛 정도야 하겠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맛의 김밥을 손님들에게 팔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어떤 음식보다 애착이 큰 음식이 김밥이니 더 단호하고 엄격해져야 했다. 결국 나는 창업을 한지 반년이 되지 않아 김밥을 메뉴 구성에서 제외시켰다. 나는 김밥이 빠진 자리를 매워줄 나만의 다른 메뉴들을 구상해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오히려 조금 더 아이덴티티가 확실해진 '피크닉랄라'를 꾸려나갔다.


5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열심히 달리며 장사에 매진했다. 온갖 재료들을 썰고 지지고 볶으며 많은 도시락을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31살이 되었고, 나는 이제 장사가 그만 하고 싶어 졌다. 이제 그만하고, 엄마의 김밥이 먹고 싶었다. 나는 아마도 영원히 그 맛을 똑같이 구현해내지도, 어딘가에서 맛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엄마의 손맛을 닮은 내 손맛이 들어간 도시락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덕분에 나도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다섯 해를 보낼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작년 12월을 끝으로 피크닉랄라는 폐업을 했다. 바쁘게 살아온 다섯 해, 혹은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의 시간들을 정리해 줄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했었다. 미루던 수술을 했고, 멀리 여행을 다녀왔다. 그간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가만가만 생각해보다 이것저것 조금씩 배워보기도 했다. 그러다 찾게 된 것이 에세이 쓰기 수업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제 김밥을 말지도, 도시락을 싸지도 않고 작은 방에 앉아 글을 쓴다.

장사를 정리할 때는 '다시는 장사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다시는 음식으로 돈 버는 건 하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했지만  간혹 통장의 잔고가 줄어들 때마다 슬금슬금 '다시 장사해볼까?'하는 생각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럴때 마다 역시 나는 사업에 어떤 특출 난 재주가 있는 사람이기보단 그저 먹는 게 좋은, 맛있는 걸 만들어 나누는 게 좋은 정도의 사람이었단 사실을 되새기며 금세 그런 생각을 누르곤 했다.


지금은 어떤 문학적 소양이나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종일 시끄러운 기계소리와 사람들에 둘러싸여 종일 샌드위치를 만들다 집에 돌아오면 어떤 날에는 내가 온갖 재료가 멋대로 쌓아진 샌드위치가 되어버린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날엔 몸에 가득 밴 샌드위치 냄새가 유독 밉게 느껴져 더 오랫동안 샤워를 한다. 뜨거운 물에 몸을 맡기고 고단한 하루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김밥도 도시락도 샌드위치도 모두 나에게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이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지만 나를 나타내는 모든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하고 말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엄마의 김밥을 먹으며 자란 내가 도시락 가게를 하면서 가장 많이 만들고, 가장 많이 칭찬받았던 음식은 샌드위치였다. 여러 재료가 한데 어우러지며 특별한 맛을 내는 김밥과 샌드위치는 어딘가 조금은 닮아있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지금의 내 삶도 김밥이나 샌드위치의 속재료 같은지도 모른다.

특별하지 않은 재료들과 의외의 재료들이 합쳐지며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맛의 인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나는 지금 나만의 김밥과 샌드위치가 담길 커다란 도시락을 천천히 채워가는 중이 아닐까.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는 내 입맛에 딱 맞는 엄마의 김밥같은 삶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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