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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an 12. 2019

아, 그래도 사랑.

흘러가는 마음이었는지, 어쩌면 흐르지도 고여있지도 않았는지 분간이 조금 어려운 어떤 마음이 스쳐갔다.

지나간 그 사람에게 나는 '같이 있을 땐 편하고 좋지만 특별히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정도의 사람'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상처를 받아야 했다. 그는 내게 상처를, 누구에게든 상처 받기를 원하지 않았던 내가 기꺼이 감내해야만 하는 괴로움 혹은 의문들을 무심하게도 휙 던져주고 홀연히 가버렸다. 


매번 실망만 주던 사람에게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했었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라 건넨, 나와의 약속이 중요하지 않냐는 질문에 그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특별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들을 가만히 곱씹다 보니 '나는 정말 이런 정도의 무책임한 사람과 그저 그런 정도의 시답잖은 마음만 주고받을 수 있는 시시한 사람일까?' 하는 한심한 질문과 너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실 이건 아주 심각한 나의 고질병이다.
문제가 생기면 성찰을 해본답시고 이리저리 따져보다가 결국은 문제의 원인을 내 탓으로 돌린다. 결국 나만 잘하면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이번 일도 내가 이 정도의 인간이라 그 정도의 인간이 나에게 왔고, 나는 그 정도의 사람에게도 상처를 받아야 하는 더 낮은 정도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단정 지어 생각해 버리게 되었다.


지나간 사람들에게 일일이 마음을 쏟은 내 잘못일까? 맞다. 나는 너무 쉽게 마음을 내어준다.

너무 쉽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정성과 시간을 쏟고,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주었다. 밝은 사람인척 웃고 떠들고 까불었다. 그러면 상대는 나와 함께인 것이 즐겁고 좋고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들이 그렇다고 하니 나는 기꺼이 그렇게 행동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관계가 진전이 되었다 느끼면 나의 본모습, 예컨대 자주 슬프고, 외롭고, 사소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이 담긴 관심을 바라는 나의 진짜 모습을 조금씩 나타내었다. 그러면 상대는 내가 시시해지거나, 지겨워지거나, 자신이 생각한 밝기만 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에 아쉬워하며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오랜 결핍이나 상처를 다 덮어줄 만큼의 큰 사람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나도 모르게 나는 스스로 내 치부를 드러내며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아줄, 어쩌면 그저 인간애적 동정일지도 모를 마음조차도 사랑이라고 착각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그의 침대 머리맡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그녀는 참기 어려운 추락 욕구를 느꼈다. 그녀는 지속적인 현기증 속에서 살았다.
넘어지는 사람은 "날 좀 일으켜 줘!"라고 말한다. 토마시는 변함없이 그녀를 일으켜 줬다.
자신의 폐허를 과시하고, 자신의 추함에 자부심을 갖고 소매를 걷어 흉하게 잘려 나간 손을 보이며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보아달라고 강요하는 변태적 욕구, 그녀가 십여 년 전 빠져나온 어머니의 세계가 다시 그녀를 옥죄어 오는 듯, 근래 들어 모든 것에서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이 마치 불운 같았다. 그 침묵은 시간이 갈수록 묵직해져 갔다. 그것을 떨쳐 버리기 위해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 그는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깨웠다.
"내가 땅에 묻혀 있었어. 오래전부터 당신은 일주일에 한 번만 나를 보러 왔어. 당신이 지하 무덤의 문을 두드리면 내가 나갔지. 내 눈 속에는 흙이 가득했어."
당신이 말했어. '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군.' 그러더니 내 눈에서 흙을 없애줬어.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어쨌거나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해. 눈 대신 그 자리에 구멍만 있어.'



작년 늦은 여름, 비린내와 땀내에 절은 더운 날들을 지나며 읽었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내용 중 눈이 멈추는 구절들을 따로 스마트폰에 메모해 두고는 종종 열어보곤 했다. 어느 날은 테레자, 어느 날은 사비나, 또 어느 날은 토마스의 기분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끼는 날마다 메모를 열어보았다. 그래도 나는 어쩐지 테레자를 한번 더 안아주고 싶었다. 사실은 테레자가 아닌 나를 한번 더 안아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종일 정신없이 샌드위치를 만들다 보면 너무 단순해져서 너무 복잡해지는 여러 기분들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를 덮쳤다. 마음속에서 먼지바람이 일면 나는 눈을 감아야 했다. 눈을 감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바람이 다 지나갔을까 싶어서 슬쩍 눈을 떠보면 여지없이 매캐한 먼지가 눈이고 마음이고 할 것 없이 매섭게 할퀴며 참을성이 부족한 나를 나무랐다. 그럼 나는 또 별 수 없이 '아 아직인가 봐' 하며 짠 눈물을 쏟아내며 얼른 끝이 나기를 기다렸다.


며칠 전 꿈에 조금 알고 지내는 어떤 사람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희미했지만 나는 단번에 그를 알아챌 수 있었다. 꿈속에서의 나는 똑같이 생긴 문이 끝없이 이어진 미로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내가 아무리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어느 문도 열리지 않았고, 아무도 듣지 못했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미로 끝의 옅은 불빛 만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유일하게 열린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나를 반긴 것은 자다 깬 눈을 꿈뻑이며 꼬리를 흔드는 늙은 강아지와 두툼하고 따뜻한 그의 손이었다. 너절해진 나를 잡아준 그의 품에서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아주 커다란 안정을 느끼며 어린아이처럼 울다가 잠이 들었다. 아니 잠에서 깨어났다.


사는 게 재밌냐고 질문하는 여자, '글쎄 그저 그래'라고 대답하며 멋쩍게 웃는 남자가 나오는 옛 로맨스 영화*를 보며 생각한다. 마음의 결이 비슷한 사람, 대화의 온도가 맞는 사람, 세상의 수많은 취향들 중 둘 만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사람, 혹은 너무나 다르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간격을 좁혀나가는 것에 기꺼이 애를 쓰는 사람과 나누는 마음이 사랑일까. 같이 있으면 설레어야 할까 편안해야 할까. 보고 싶을 때 보는 것,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늘 염두하고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사랑일까.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다 문득 '아 맞다 나 이제 서른두 살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은 오늘. 

어쩐지 해가 더해 갈수록 나는 사람이, 사랑이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하며 나와는 한 발자국 더 멀어진 것만 같은 약간의 서글픔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들어 사랑에 빠지는 여자와 남자가 나오는 영화를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매번 어설픈 사랑이 나를 걷어차고 궁지로 몰아도, 사랑이 다 무얼까 고민하다 보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며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라며 사랑을 부정해도 나는 아직 속는 셈 치고 다시 한번 사랑을 믿어보고 싶다. 아, 그래도 사랑. 아직은 사랑이. 역시나 사랑이. 결국엔 사랑이.



*8월의크리스마스

https://youtu.be/0CEt3UohZ1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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