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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 Sep 07. 2015

국밥집 홍상수

엿듣고 상상하기.


방금.

새벽 밥을 먹으려고 들어간 순대 국밥집에서의 일이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치고 나니 옆자리에서 연인인 듯 한 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둘 다 많이 취한 듯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니 그 내용을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별, 혹은 그에 상응하는 상황으로 보였다.

남자는 시뻘게진 얼굴로 열변을 토하듯이 우는 여자를 얼러댔다. 
(열변과 어르는 행위를 동시에 해내다니.)
헌데 내용을 좀 들어보니 아무래도 둘은 연인이 아니라 '남매'인 듯했다.

남자는 
“이모들이 너를 계속 괴롭히면, 내가 다 죽여버리겠다-"라고 했다. 
(아마 이모들이 여자에게 못되게 굴었는가 보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술집에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도 했다. 
(여자는 근래에 어떤 종류인지는 몰라도, 여하튼 술집에 다니게 되었고, 남자를 그곳으로 부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술집이 ‘어떤 종류의’ 술집을 의미하는 것인지, 남자가 혹시 지나치게 보수적인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덧붙여
“너는 내가 지켜야 한다, 아버지가 너를 지키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탓이다-“
(여자가 술집에 나가게 된 것은 아버지의 어떤 잘못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라고, 보다 격렬하게, 중간중간 심호흡까지 해가며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오빠가” “오빠를” “오빠는” 등등으로 지칭해가며
"나는 너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라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뒤로 이어졌던 말들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그들의 가정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서서히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균열의 중심에 아버지, 이모들이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지금까지 짓누르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왜 “오빠”라는 남자는 그 사실을 지금까지 몰랐을까?)

여하튼.

국밥에 부추를 말며 대화를 엿듣던 나는 ‘울컥’ 하고야 말았다. 
본의 아니게 알게 된 그들의 삶의 무게가 무척 가까이로 전달되는 듯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대화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렇게 내밀한 대화는 이런 멀끔한 국밥 체인점이 아니라 
왠지 훨씬 더 허름하고 어두침침한, 골목 어딘가에 숨어있는 낡은 국밥집에서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누런 벽에 빼곡한 낙서들 사이로 흩어져 들어가야만 하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장소만이 남매의 절망을, 슬픔을 대변해 줄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울컥’ 하던 나는, 
그들이 던져대는 삶의 파편들을 일종의 유희로서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어울리는 장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그들의 삶을 한 편의 시나리오로서 
받아들일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실제의 삶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서 펼쳐지는 이상한 해프닝들이라는 것을. (이 문장을 어디서 봤더라?)
나는 그것을 잊고 그들을 매개로 어떤 영화적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약간의 환멸을 느끼며 순대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좀 뜨거웠던 탓에 찬찬히 우물대는 와중에, 잠시 끊겼던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엄마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몇 번 말했잖아!”
(앵?? 둘은 남매가 아니라,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연인이 맞았나 보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의 가족사를 헷갈려하겠지.)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한다.
“그래, 엄마가 근데,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이 남자, 약간 짜증 나는 구석이 있다.)

여자는 어이가 없겠지.
“돌아가셨다고! 어렸을 때! 뭐 들었어! 계속 얘기하잖아!”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일단 또 대답해본다.
“아니— 그러니까, 나도 엄마 돌아가셨거든, 나도 엄마 돌아가 보셔서 아는데-“
(미친놈.)

여자.
“뭘 또 돌아가셔, 하나도 모르잖아, 하나도 기억 못하잖아! 아는 게 뭔데!!”

남자.
“뭘!!!”
(뭘??)

여자.
“뭘!!!!!!!”

여자는 말을 뱉고 처음 보다 훨씬 서럽게 울어댔다.
남자는 대꾸하기를 멈췄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위로가 아니라 변명인 것이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면, 
이건 아마 단편영화 시나리오감일 것이다.

 "그 오빠의 꼬부심" / 주용 / 2015 / photoshop / gif이미지입니다. 모바일에서 동작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생생한 실제이기 때문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국밥에 눈을 처박았다. 그리고 모른 척 그들을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역시 그들의 대화는 이곳, 체인점 국밥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대화를 실패로 끝낸 남자의 표정이 
일순간 냉정해지고, 눈빛에 어떤 아쉬움이 스쳐지나 갔기 때문이었다. 
입맛까지 다시는 것으로 보아 그건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었다. 
남자가 생각하던 장소는 아마 그의 자취방이나 인근 모텔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돌아가신 여자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리를 옮겨 좀 더 내밀한- 

척추의 위쪽과 아래쪽을 고루 사용하는- 둘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새벽 다섯 시 반까지 공들여 열띈 위로를 건네면서 그려뒀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새로이 그린 시나리오인 것이다. 나는 저 둘을 보며 영화적 상상을... 

옘병. 아무려면 어때, 재밌잖아. 여자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달아올랐던 국밥집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다음 장면으론 어떤 게 나오려나. 남자는 체념의 입맛을 다셨고, 나는 뚝배기를 기울여서 남은 밥알을 싹싹 긁어 입에 넣었다.


고소했다. 순대국밥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2014년 기록.



 글, 그림 주용 / 2015(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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