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너를 만나는 선택을 할 거야

'아이를 갖는다'는 비가역적인 사건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by 온우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육아휴직을 한 지 1년이 흘러 복직을 앞두고 있었다. '벌써 1년이라니' 하고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이미 창밖의 공원의 풍경은 딱 1년 전의 5월의 녹음이었다. 연둣빛 새싹이 어느새 여름을 준비하듯 푸르름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건강 이슈로 출산 3개월 전 급하게 휴직을 내고 의사 선생님의 처방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누워 바라보았던 그 풍경이었다. 그러곤 인정하게 되는 거다. 내 생에서 첫 출산과 첫 아이와의 만남 첫 육아를 경험한 1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흘러왔구나 하고.


출산과 육아라는 부모 되기 경험은 힘들고 어려웠다. 어느 첫 경험도 모두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첫 연애, 첫 자취, 첫 해외여행, 첫 출근.. 기대되고 설레면서도 두렵고 어렵고 힘들지만 또 그만큼 즐겁기도 한 것. 나의 아이를 만나는 첫 경험 또한 그랬다. 복직을 앞두고 그간 써 내려갔던 긴 일기들을 모두 읽었다. 뱃속에 움튼 아기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서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걸 표현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들을 다 읽고 나니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토록 소중한 것을 얻었으니 그에 따른 그 어떤 것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


힘들다고 쓰기 시작해서 너무 힘들다로 끝을 맺었던 날들도 있었음에도, 전보다 자유시간이 짧아지다 못해 사라진 수준이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헐떡이는 날들이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쉼보다 밀려드는 집안일을 해내는 것이 더 좋다고 느껴질 만큼 내가 얻은 것이 훨씬 더 컸다. 그건 특별히 거창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의 티 없는 맑은 웃음을 한 번 더 보고, 남편과 아이가 마주 보고 행복해하는 그 안에 내가 있는 풍경 그 자체였다. 한 아이를 책임진다는 처음이라 더 두려웠던 그 감정보다 하루하루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함께 하는 설렘이 그를 앞섰다. 육아와 그에 수반되는 일들이 힘들어도 아이와 함께하는 즐거움이 그를 앞섰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란 하루하루 지나면서 커지고 깊어지는 것이라 그런 사랑의 마음이 커질수록 아이도 나에게, 나도 아이에게 서로를 향햔 애정도 짙어졌다. 그런 처음 겪어보는 애정의 마음을 남편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아이를 낳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아기를 낳기 전의 삶을 '전생'이라고 비유하곤 한다. 그만큼 아이가 있기 전과 후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자유롭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달리, 기본적인 아기의 잠을 지켜주려고만 해도 외출이 쉽지 않았다. 저녁 7시에는 아기가 잠잘 준비를 하니 이른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야 했고, 낮에 외출을 한다고 해도 밖에서 낮잠에 들면 충분히 자지 못해서 그 후폭풍이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지니 쉽지 않았다. 아직 걷지 못하는 아기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아 외출 시간이 제한되었다. 카시트에 오래 태우는 것도 아이가 힘들어하니 갈 수 있는 곳은 차로 반경 30분 내외였고, 큰 마음먹고 하루 종일 외출을 감행하면 체력이 탈탈 털리는 건 결국 엄마 아빠인 우리였다. 결국 제일 편한 건 집에 있는 것, 혹은 동네에 있는 아기가 있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거나 초대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있는 가족이랑 만나면 서로의 편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봐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예전처럼 친구랑 만나 밤새도록 논다거나, 날씨가 좋은 날 하루 종일 바깥에서 데이트를 하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육아>의 정지우 작가는 아이를 낳기로 한 선택을 '비가역적인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대부분의 인생의 큰 선택은 되돌아갈 수 있다. 이직을 해도 아니다 싶으면 퇴사할 수 있고, 이민을 가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고,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다는 선택은 돌이킬 수가 없다. 일단 아이가 생기면 우리는 끝까지 함께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과 같다. 그래서 아기를 낳자는 선택을 하기가 늘 어려웠다. 현이가 우리가 결혼을 했던 20대부터 아이를 갖고 싶다고 줄곧 이야기해 왔음에도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나로서 사는 삶이 너무 좋았으므로.






미야자키 하야오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 불리는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릴 때 잃은 엄마를 찾아 죽음과 삶의 경계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본인과 동갑인 10살 때의 엄마와 만난다. 영화에 수많은 명장면이 있었지만 그중에 내 마음을 쿵 울리게 한 건 주인공과 엄마가 각자의 세계로 돌아갈 때 나누었던 대화였다. 주인공은 엄마에게 미래에 병원에서 죽는다고 다른 미래를 살라고 이야기하는데, 엄마는 웃으면서 한마디를 남긴다.

'난 그래도 너를 만날 거야. 너 같은 아이를 만나는 건 멋진 일이잖아.'


나에겐 이 말이 이렇게 들렸다.

'난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너를 만나는 선택을 할 거야. 너를 만나는 건 그만큼 나에게 가치 있는 일이니까.'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쿵 울렸다. 난 이미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던 마음을 처음 깨달았던 것이다. 나도 분명 그럴 거라고. 내 미래에 이 선택으로 인해 닥쳐올 나쁜 미래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만나는 선택을 할 것이라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분명 힘겨운 날들이 있다. 현이와 마주 보면서 '힘들긴 정말 힘들어'라고 몇번씩 서로를 마주보며 이야기하곤 한다. 아이를 재우고 불과 2시간 남짓한 그나마의 자유시간에도 우리는 아이가 없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했다. 아이의 밥을 만들거나, 이사나 미래 계획과 같은 밀려있는 중요한 안건에 대해 논의를 하거나..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잘 시간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지나갔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우리 아이를 만나는 선택을 할 것이다. 엄마 아빠 얼굴만 보아도 방긋 웃으며 기합을 주며 열심히 달려오는 아이를 보며, 밥시간이 돼서 준비하고 있는 엄마아빠를 보면 좋다고 박수를 치는 아이를 보며, 그 뽀실뽀실한 얼굴을 마주하면 그저 그 순간을 사랑하게 된다. 누워서 눈만 꿈벅이던 꼬물이가 생각을 하고 의사표현을 하고, 그저 등도 바닥도 살로 소복하기만 했던 발이 아치가 생기고 땅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신비한 과정들을 지켜보는 일이 내 삶에 가장 큰 즐거움이 된다. 아이를 만나기까지 내가 했던 모든 선택에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태어났음에, 현이를 만났고, 결혼을 결심하고, 그때 아이를 가지기로 마음먹었음에 감사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온이가 있다는 사실이 현재를 살아갈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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