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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Feb 24. 2024

첨성대에 숨겨진 비밀코드

 경주는 양산단층과 울산단층이 만나는 곳으로 예로부터 지진이 잦았던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 15년 3월에 서라벌 지진으로 사망자가 1백 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2016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지진을 관측한 이래 최대 규모인 5.8의 지진이 경주에서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인해 경주에 있는 천년이 넘은 한 건축물이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2센티 정도 기울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안정성을 유지하며 천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첨성대에 알아보자.

 이곳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사진을 찍었지만 첨성대가 놀라운 건축학적 공법과 신비로운 숫자의 비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미스터리의 세계로 한 발씩 들어가 보자.      


<첨성대 개요>

 볼(첨), 별(성)이라는 이름에서 천문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남겨진 고대 건축물 중 재건 또는 보수를 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이며(국보 제31호),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옛 궁궐터에서 3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비두골이라는 곳에 아름다운 곡선미를 뽐내며 단아하게 서 있다. 비두는 북두칠성이 잘 보이는 곳이라는 뜻으로 오늘날까지도 경주의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첨성대가 한국의 지진 위험지대인 경주에서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버틴 건축학적 비밀은 무엇일까?

첨성대는 높이 9.17미터, 밑 지름 4.93미터, 윗지름 2.85미터로 원통형 몸체에 정상부는 사각형 모양이다, 총무게는 264톤에 달하며 300백 개가 넘는 돌로 만들어졌다. 

 첨성대의 첫 번째 건축학적 비밀은 지표면 아래에 있다. 고대 신라인들도 서라벌이 지진 위험지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첨성대 축조 전 주변 땅 아래를 파고 돌과 흙을 채워 지반을 다진 것이다. 기초공사를 단단히 한 후에 그 위에 기단석을 올리고, 다시 돌을 이용하여 첨성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돌만 안정되게 쌓아 올리지 않았다.

 두 번째 비밀은 첨성대의 내부에 있다. 첨성대의 중간 위치에 창문으로 보이는 가로 세로 1미터의 사각형 구멍이 보인다. 필자는 어린 시절 이곳을 통해 별을 관측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첨성대 내부를 확인한 결과 신라인들은 맨 아래 기단석에서 창문 바로 아래까지 다시 굵은 돌과 흙으로 채웠다. 창문 아래에 해당하는 하단부를 채운 흙이 첨성대의 돌들을 지탱해 주었지만, 비가 온다면 습기를 머금은 흙이 돌을 밀어내 첨성대는 뒤틀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 배수의 효과를 위해 흙과 함께 큰 돌을 함께 넣은 것이다.     

 상단부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첨성대의 가운데 위치한 창문을 기점으로 위쪽에 해당하는 상단부는 천문대의 기능을 위하여 비어있다. 첨성대의 맨 위는 정자석으로도 불리는 긴 돌들이 우물정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2010년 카이스트에서는 1/15분의 크기의 첨성대 축소 모형을 제작하여 지진 실험을 하였다. 실험의 목적은 첨성대 정상부의 정자석이 내진에 견디는 기능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상부의 정자석이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놀랍게도 정상부의 정자석이 지진을 견디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고대 유물이나 건축물을 보며 선조들의 지혜에 놀라는 이유는 현대인이 우월하다는 기저가 깔려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을 버튼 하나로 날려버릴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가 마시는 공기를 더럽히는 우리가 과연 고대인들도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전체적으로 안정된 곡선미를 이루는 첨성대의 외관을 보고 스티브 잡스가 열광하던 곡선미를 떠올렸다. 신라인들은 첨성대의 내진 설계뿐만 아니라 미학적 요소도 고려한 것이 분명하다.     


<첨성대의 비밀코드>

 첨성대는 중앙 창문의 아래인 하단부가 12단이다. 이는 일 년 12개월을 의미하며, 상단부 또한 12단인데 상하단을 합친 숫자는 24 절기를 의미한다. 상하단부 총 24단에 창문의 3단을 합치면 총 27단이 되는데 이는 달의 공전주기이며, 신라의 27대 왕이 첨성대를 만들었다. 몸체 27단에 기단과 정상부 4단을 합하면 총 31단으로 한 달을 의미하고, 첨성대를 만드는 데 사용한 돌의 숫자는 놀랍게도 일 년을 상징하는 365개이다.

 첨성대가 품은 놀라운 숫자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후대에서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렵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겹치는 것이 더 억측에 가깝지 않을까? 신라인들은 마야인 들처럼 하늘을 관찰하고 자연의 주기를 일상과 건축물에 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굳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거나, 기록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렇게 첨성대가 품은 숫자의 비밀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 제단이라는 주장도 있다.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되는 참성단이 있다. 그런데 참성단의 외관도 첨성대처럼 원통형에 정상부는 사각형이다. 그래서 신라의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 제단이라는 주장도 있다. 첨성대는 과연 천문대일까? 아니면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이었을까? 첨성대를 만든 왕을 확인해 보면 정답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첨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축조 되었다. 후대에 기록된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며 수수께끼를 풀어보도록 하자. 

 삼국사기에는 선덕왕의 치세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는 선덕왕 때에 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조금 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당 태종 7년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높이가 19척 5촌,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역사의 기록은 첨성대가 천문대였으며, 하늘을 관측하는 방법까지 알려주고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첨성대의 중간부인 창을 통해 별을 관측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은 역시 틀렸다.

 경주의 신라 역사 과학관에서는 사료를 바탕으로 신라인이 별을 관측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사다리를 가로세로 1미터의 창문에 걸쳐놓고, 외부 아래에서부터 올라가 창을 통해 내부로 들어간 것이다. 첨성대의 창은 외부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구이다. 창 아래에 사다리를 안정적으로 댈 수 있게 인간이 홈을 만든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창은 첨성대의 13단에서 15단 사이에 뚫려있다. 1단부터 12단까지는 흙과 돌로 채워져 있기에 내부로 들어가도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없다. 비어있는 내부에 진입한 후에는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첨성대의 최상단부에서 천문을 관측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천문대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일식, 혜성, 유성을 비롯해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5 행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천문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을까?

 삼국사기 중 천문에 관한 기록은 무려 27%를 차지하는데 이는 전쟁이나 외교에 관한 기록보다 높은 수치이다. 고대인들은 현대인보다 천문에 관한 관심이 훨씬 많았고, 이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우리는 가끔 하늘을 볼 것이 아니라 더 자주 하늘을 봐야 하지 않을까? 

 사기의 천문기록을 첨성대가 세워지기 700년 전과 첨성대 축조 후 300년간으로 구분해 비교한 결과, 천문기록이 무려 4배나 늘었다고 한다. 이는 첨성대가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서에는 천문박사, 누각박사, 천문관, 일관 등 천문관측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왕의 순행 시 동행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왜일까? 농경사회에서 장마와 가뭄, 천재지변, 개기일식을 미리 아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남이 가지지 못한 정보와 축전된 빅 데이터를 보유하는 것과 비슷한 힘을 가지는 것이었을 것이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왜 첨성대를 만들었을까? 

신라는 불토국을 표방할 정도로 불교에 진심인 나라였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이고, 선덕여왕의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라고 불렸다. 백정과 마야는 석가모니의 부모님 이름이다. 진평왕을 비롯한 신라 왕실의 불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진평왕은 50년이 넘는 재위기간 동안 신라의 영토를 한강유역까지 넓히며 강력한 왕권은 구축했지만, 아들은 얻지 못했다. 진평왕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신라 건국 이후 진평왕 이전까지 직계 아들이 없는 경우 사위가 왕위를 이은 경우도 2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왕은 자신의 장녀가 어느 남성 못지않게 신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딸을 믿지 못했다면 명확한 구분이 없었던 성골과 진골을 따지지 않고 후보자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왕의 결심이 확고해지고 우려가 옅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시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최초의 길은 언제나 험난하다.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 탄생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진평왕 재위 말년 칠숙과 석품이 신라 역사 최초로 귀족에 의한 반란을 일으켰다. 진평왕은 자신의 왕위를 지킬 때 보다 단호했다. 반란의 당사자는 물론이고 9족을 멸하며 여왕의 등극에 지지를 표명했다. 

 서기 632년, 선덕여왕은 화백회의라는 정식 절차를 통해 당당히 신라 27대, 한국사 최초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에 묘사된 즉위 현장을 살펴보자.

‘선덕왕이 즉위하니 휘는 덕만, 진평왕의 장녀이다. 어머니는 김 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의 성품은 관인하고 명민하였으며, 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덕만을 세워 성조황고라는 호를 올렸다.’

성조황고: 성스러운 혈통을 가진 황실여성이란 뜻으로 그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선덕여왕의 15년에 이르는 재위기간은 어땠을까? 외부적으로는 자신들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를 끓임 없이 공격하는 백제의 의자왕에 맞서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여성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남성 기득권층의 도전을 받았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사람을 키우기 위해 비주류인 김유신과 김춘추 등을 중용하는 한편, 신라의 국교인 불교를 앞세워 왕권강화와 민심잡기에 나섰다. 재위 기간 동안 20여 개의 사찰을 지었으나, 민심을 한 곳으로 모을 랜드 마크가 필요했다. 때마침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대사가 선덕여왕에게 이렇게 건의하며 여론을 조성한다.

 “제가 당나라에서 수행을 하던 중, 선인을 만났는데 신라로 돌아가 9층 목탑을 지으면 온 나라가 평온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불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외국 유학을 마치고 온 유력 승려의 건의가 있다면 대규모 토목 사업에 명분이 선다. 신라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황룡사에 아파트 30층 높이에 이르는 9층짜리 거대 목탑이 들어서게 된 경위이다.     

 황룡사지 9층 목탑은 높이가 82미터에 이르며, 각 층은 신라가 물리쳐야 할 적들을 의미한다. (1층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탐라, 5층 백제, 6층 말갈, 7층 거란, 8층 여진, 9층 예맥) 이는 마치 이소룡이 법주사 팔상전의 각 층을 오르며 무림의 고수들을 격파하며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신라백성들의 이목을 끌고 민심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훌륭한 스토리텔링이다. 

 신라는 목탑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최고의 전문가를 적국인 백제에서 데려왔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목탑 전문가인 백제의 ‘아비지’는 이 석탑을 쌓아 올리는데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았다. 첨성대와 황룡사지 9층 목탑을 보기 위해 지금 당장 경주로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룡사와 황룡사지 9층 목탑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선덕여왕이 백제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처했을 때 당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때 당 태종이 신라의 사신에게 제시한 묘책 중 세 번째가 필자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당태종은 아래와 같은 헛소리를 떠벌린다.

 “그대 나라는 임금이 부인이어서 이웃나라에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다. 내가 나의 친족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고 군사를 보내어 보호케 하면 어떤가?”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 내내 적국, 자국, 동맹국의 남자로부터 무시를 받아야 했다. 결국 재위 마지막 해 비담의 난이 일어났다. 신라 최고위 관리직인 상대등 비담이 ‘여주불능선리’ 즉 ‘여왕은 정치를 잘할 수 없다’라는 전혀 참신하지 않은 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킨다. 비담의 난은 선덕여왕에 의해 발탁된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진압이 되었고, 그들은 결국 삼국통일이란 대업을 달성하게 된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왕위를 진덕여왕에게 물려주며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도리천은 불교의 주요 사상인 33천 사상을 음역 한 것이다. 도리천은 불교 세계관에서 세상의 중심이라는 수미산 위에 있다. 33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숫자로 재야의 종이 33번 타종되며, 불국사의 천왕문과 대웅전 사이의 계단 숫자도 33개이다. 이는 부처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계단이다.      


 선덕여왕은 결혼은 했으나 자식은 없었다고 한다. 재위 기간 중 그가 의지할 사람이 몇 이나 있었을까? 아버지 진평왕도 고독했을 것이나, 선덕여왕의 마음은 늘 겨울처럼 혹독했을 것이다. 혹시 모두가 잠든 밤, 쉽게 잠들 수 없었던 선덕여왕은 궁 주위에 있던 첨성대에 이따금 올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속내를 부처님에게 털어놓곤 하지 않았을까?

 “날이 차고 직접 오르시기에 는 위험하옵니다.”

 “괜찮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추운 줄도 모르겠다. 너는 그 아래에서 불이나 좀 잘 비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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