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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Mar 02. 2024

광개토대왕비의 사라진 세 글자

<2024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물크기로 전시 중인 디지털 광개토대왕비>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역사 속 인물 세 명을 꼽으라면 이순신장군, 세종대왕과 더불어 광개토대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인 광개토대왕비가 2004년도에 중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4세기경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지배했다는 임라일본부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우리 민족 최대의 영토를 구축했던 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도대체 광개토대왕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발굴과정>

광개토대왕비는 오랜 세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서 사라졌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도 비에 대한 내용이 적거나 잘못 알려져 있다. 용비어천가의 기록을 보자.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백사십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석이 있다.’

광개토대왕비를 금나라 황제의 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며 우리 역사에서 멀어진 까닭일 것이다.

 또한 청나라가 들어서며, 광개토대왕비가 위치한 지역을 자신들의 선조가 일어난 지역이라고 성역화했다.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자 물리적으로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광개토대왕비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땅이 아닌 곳에 봉인되어 있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비의 봉인이 일본 군부에 의해서 해제된다. 비가 역사에 재등장한 것은 1880년대이다. 조선과 동아시아 정복을 목표로 제국주의 노선을 정한 일본은 조선 침략의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 군부는 조선은 물론 중국 땅에도 스파이를 파견하여 역사유물 찾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할 고대유물을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일본서기’는 720년에 쓰인 일본 최초의 역사서이며 정사라고 일본정부 주장하나, 자국인 일본 학계에서도 정서로 인정받지 못하며 위서 취급받고 있다. 특히 4세기 무렵의 기록은 그 내용이 철학서에 가깝다고 한다. 이런 곳에 일본이 조선 침략의 명분을 세우기 위한 ‘임라일본부설’이 등장한다.

이 설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왜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가야까지 지배했으며, 가야에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역할을 수행하던 ‘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했다는 다소 황당한 설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인으로 변장한 채 중국의 지안지역을 뒤지던 일본군 소위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됐다!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상부가 원하는 그것이라는 느낌이 오는구나!”

일본 군부는 중국 영토에서 비문의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서둘러 비의 탁본을 떠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제국주의 군부 주도하에 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광개토대왕비를 오랜 시간 연구한다. 왜 그들은 비를 발견한 사실을 숨긴 것일까?

일본은 비 발견 후 무려 7년이 지나서야 관변잡지를 통해서 한 편의 기사를 내보낸다.

“우리는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하였고, 오랜 세월 그 내용을 분석한 결과 비에서 임라일본부 설을 뒷받침 하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일본서기의 내용이 마침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왜이신묘년 래도해파백잔 oo 신라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00과 신라를 쳐부서어)

이위신민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

이것이 향후 100년간 논란이 지속되는 일본이 주장하는 해석이다.

백잔은 백제를 뜻하며 00 부분은 오랜 세월로 인해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이나 문맥상 가야로 추정된다. 그 간의 동아시아 역사 판도를 뒤집는 놀라운 발견이 아니라 악마의 편집이다. 신라, 백제가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물론이며 가야지방에서도 왜의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역사서에도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 하는 사료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억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의 사료나 유물이 아닌 우리 민족의 자긍심인 광개토대왕비를 이용해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주장하는 일본의 행태에 심장이 멎을 지경이다.


1970년대가 열리며, 재일 사학자 이진희 교수가 일본에서 임라일본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충격적인 주장을 들고 나온다.

“광개토대왕비는 일본군에 의해서 훼손되었습니다. 저의 조사에 따르면 군부는 일명 ‘석회도부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기 위해서 비의 글자를 석회로 메우기도 하고, 심지어 파내기도 했습니다. 비의 연구는 중국의 비협조로 인해 탁본에 의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진본이라고 주장하는 탁본 외에 추가로 발견되는 탁본마다 글자가 다릅니다.”

이진희 교수의 주장은 한일 양국의 뜨거운 역사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1981년 중국의 길림성 문물연구소장인 왕건군이 이진희 교수의 주장에 반박하며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당시 청나라 영토 안에서 일본군이 거대 비석을 조작하는 작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석회가 발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중국의 탁본 전문가들이 작업의 편의를 위해 한 것이며, 조작이나 훼손의 증거 또한 없습니다.”

일본군의 광개토대왕비 발견 소식이 전해진 후, 청나라에서도 탁본을 통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광개토대왕비 인근에 살고 있던 탁본 전문가 부자가 주로 작업을 하였는데, 곳곳에서 탁본제작 주문이 쏟아졌다. 이들이 주문이 밀리자 탁본을 빨리 뜨기 위해 석회를 발랐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조작 논란은 한중일 삼국지의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이 논쟁에 대해 한일 양국의 역사학계는 2010년도에 이르러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임나일본부는 관청이 아니라 왜에서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일본 역사학계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2015년 아베 정권에 의해서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의 교과서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역사가 정치에 의해 조작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광개토대왕비의 내용>

광개토대왕비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서기 414년,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4미터 무게 37톤으로 사면에 1775자가 기록되어 있는 동아사이 최대 규모의 돌비석이다. 비는 압록강 북쪽, 지금의 중국 지안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중국 정부가 비 전체를 전곽 유리로 씌워 제대로 된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먼저 제1면의 내용을 살펴보자

주몽의 건국설화와 광개토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그는 천제의 아들로서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하여 알에서 태어났다. 17 세손에 이르러 광개토왕이 18세로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했다. 불행히도 39세에 세상을 떠나니 비를 세워서 훈적을 후세에 알리려 한다.>

비의 내용을 통해 독자적인 연호인 영락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제2면에는 광개토왕 정복활동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에 침범한 왜를 물리쳤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영락 10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신라성에 이르니 왜가 있었는데 급히 추격하여 왜를 궤멸시켰다.>

비에는 총 8차례의 전투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국제 정세는 혼란 그 자체였다. 중국은 5호 16국 시대였으며, 백제의 힘도 강성했고, 신라와 가야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제3면에는 정복활동에 대한 기록이 이어지며, 묘를 관리하는 수묘인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것이 특이할만하다. 제4면에까지 자세히 이어지는 수묘제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자.


<수묘제>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모용) 황이 15대 미천왕의 묘를 파헤쳐 시신과 보물을 가져갔다.’

이는 서기 342년 전연이 고구려를 침범하여 벌인 약탈 행위이다. 19대 왕 광개토대왕이 죽기 불과 7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왕릉의 도굴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왕릉을 지키는 능지기들인 수묘인에 대한 내용이 비의 3면과 4면에 상세히 나오는 이유이다.

수묘인을 어느 지역에서 몇 명을 선발할지 등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있으며, 총 가구 수는 330 가구로 정했다. (신라 김유신의 왕릉에는 20 가구가 배치되었다) 고구려인 110 가구와 요동, 백제 등 각국에서 포로로 데려온 자들로 구성된 220 가구가 수묘인 수의 과반을 차지한다.

중국은 광개토대왕비 대신 의도적으로 호태왕비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광개토대왕비에 아래와 같은 글씨가 적혀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속셈도 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상 (고구려 수도 인근에 묻힌)

광개토경 (국토를 넓게 개척한)

평안호태왕 (나라를 평안하게 한 왕)

중국에서는 ‘진호태왕비’라는 제목을 달고 탁본집이 출간되기도 한다.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의 왕이 아니라 중국 동진시대 진나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2017년도에는 중국 정부가 나서 유적의 안내판에 “중화민족 비석 예술의 진품”이라고 적기도 했다. 일본이 잠잠하니 중국이 난리다.


중국문화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국제서예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김병기 교수가 최근 비문의 조작에 관해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왔다. 필자는 그의 열린 생각과 역사학자가 아님에도 비문 연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서예 전문가인 자신의 연구에 따르면 비문의 일부 글자가 다른 필체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조작된 글자로 의심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해석을 살펴보자.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일본의 주장 :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00과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

김교수는 붉은 글씨 부분인 '渡海破’(도해파)를 일본이 조작했다는 것이다. 김교수가 원래 있었던 글씨라고 주장하는 入貢于’(입공우)를 넣어 해석을 해 보자.

김 교수의 주장 :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oo과 신라에 조공하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일본을) 신민으로 삼았다.

완전히 반대의 해석이 나온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 문장가 어디서 나왔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치하하는 비가 출처이다. 두 문장 중 어느 쪽이 문맥상 적합한가? 김 교수의 자세하고 흥미진진한 주장은 그의 책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를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광개토대왕비의 제막식이 열리기 전날 밤, 장수왕은 자신이 세운 아버지의 비석을 보러 가지 않았을까?

“폐하 날이 차옵니다. 동이 트면 다시 행차하시옵소서.”

“아바마마의 고난과 이 단단한 돌에 글을 새긴 이들의 노고에 비하면 이깟 추위가 무슨 대수겠느냐!”

“.............”

“아바마마! 그간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아바마마가 우리 고구려인들과 풍찬노숙하시며 흘린 피와 땀을 한 자 한 자 단단히 새겨 놓았으니, 우리 후손들이 대대손손 기억할 것입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먹고살기는 여전히 바쁘다. 그래서일까? 역사를 잊는 민족이 되기 전에 역사를 도둑맞는 민족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뭣이 중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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