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조소앙은 우연히 북관대첩비를 발견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평화로운 나라'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인과 일본이 벌인 전쟁에서 숨진 246만여 명의 위패가 있는 제국주의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청년 조소앙은 북관대첩비의 내용을 읽고 충격에 빠진다.
'바다에는 이충무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지에서는 권원수의 행주대첩과 이월천의 연안대첩이 있어 역사가는 그것을 기록했고, 이야기꾼은 칭송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군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오합지졸을 써서 전승을 거두어 한 방면을 수복한 것은 관북의 군사가 그중 으뜸이라 할 것이다."
북관이란 옛 함경도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며,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에 비견되는 북관대첩을 기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조선의 승전 기념탑인 북관대첩비가 여기에 있단 말인가? 또한 이를 비둘기 사육장 옆에 방치해 둔 일본의 속셈은 무엇인가?"
청년 조소앙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북관대첩비 소감'이라는 글을 대한 흥학보에 기고한다.
조소앙의 의문과 더불어 21세기의 우리 또한 의문이 생긴다. 일본은 왜 패전의 기록을 야스쿠니 신사로 가져간 것일까? 또한 이순신과 권율에 비견되는 대첩은 어째서 우리에게 생소한가? 우리의 무지라면 배워야 하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외면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신사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1톤에 가까운- 흉측한 머릿돌을 지고 있는 북관대첩비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서 우리를 기다린 것일까? 지금부터 꼬이고 얽혀버린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보자.
북관대첩비는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로 총 1500자가 새겨져 있다. 북관대첩은 임진왜란 때
일이었으나 비가 세워진 것은 백 년이 훨씬 지난 숙종 34년에 함경북도 길주군에 세워진다. 비가 늦게 세워진 것은 비의 운명만큼이나 고단했던 정문부 장군의 인생 역경 때문이다.
한양에서 태어난 정문부는 24살 되던 해에 차석으로 문과에 합격한 수재였다. 무예에도 뛰어났던 그는 28세 되던 해에 함경북도 북평사로 발령이 난다. 그리고 영웅의 탄생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듬해에 조선 건국 이래 최악의 위기인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은 평안도 방면, 가토 기요마사의 2군은 함경도 방면으로 나뉘어 북상했다. 가토의 기세에 놀란 함경도의 여러 장수들은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않고 성을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되었던 이 지역의 토호세력들은 조선왕자 납치 사건을 저지르며 온 나라를 충격에 빠트린다. 그날의 일을 실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북쪽으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을 붙잡고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_선조 수정실록 1592년 7월>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선조의 명으로- 의병을 모으기 위해 함경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토의 2군이 이 지역에 이르렀을 때, 지역의 토관 세력인 국세필 등이 두 왕자의 가족과 신하들을 납치하여 가토에게 바친 것이다.
"오! 처세술이 아주 뛰어난 자들이로구나. 우리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너를 이곳의 관찰사로 임명하겠다. 조금만 더 힘을 내도록 하라."
조선의 왕자가 왜적의 인질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자신이 완벽하게 다스린다고 착각했던 민에 의해 왕족이 납치된 것은 선조에게 재앙과도 같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 사건은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척박한 함경도의 백성들은 여진족의 침입에 불안한 삶을 이어가야 했으나, 조정으로부터 혜택은 고사하고 차별을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조정은 이들의 이주의 자유도 제한하였다. 함경도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반감은 조선 팔도 어느 지역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북도 사람들은 무인 관리들의 침학에 괴로움을 당해 가장 심하게 국가를 원망했다. 그러다 왜국이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한다는 유언비어를 듣고는 떠들썩하게 마음이 기울어 장수와 관리를 다투어 결박해서 적을 맞이했다.’ <선조 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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