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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화학공업화(72~76)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2편 - 04

by 한정엽

1972년, 한국은 경제개발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었다.


제1차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이룩한 성과는 분명 괄목할 만했지만, 동시에 한국 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산업구조는 여전히 노동집약적 경공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부가가치가 낮은 단순 조립 가공업이 수출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국제 분업체계에서 한국을 원료 공급국이나 단순 가공국의 위치에 고착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현실 인식 하에서 경제발전 전략의 근본적 전환을 모색했다.


단순히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산업구조의 질적 고도화를 통해 자립경제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 경제 환경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70년대 초 닉슨 독트린의 발표로 미국의 아시아 개입 정책이 변화하고,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하면서 자원 빈국인 한국에게는 경제적 자립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72~1976) <출처 : 국가기록원>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이론적 기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인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단순한 경제적 고려를 넘어선 복합적 동기를 바탕으로 구상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의 전환을 통해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술 집약적 산업 발전을 통해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고자 했다.


또한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전후방 연관효과가 큰 산업 특성상 전체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견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정치·안보적 측면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북한의 무력 도발과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통해 자주국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방위산업의 기반이 되는 중화학공업의 발전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특히 1968년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을 겪으면서 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이는 중화학공업화 정책 추진의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1.21사태의 김신조 <출처 : 위키피디아>


전략산업 선정과 정책 설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을 6대 전략산업으로 선정했다.


이러한 산업 선정은 당시로서는 매우 야심 찬 것이었다. 한국의 기술 수준과 자본 축적 정도를 고려할 때 이들 산업은 상당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산업이 가진 전후방 연관효과와 기술 파급효과, 그리고 국방산업과의 연계성을 높이 평가했다.


철강산업의 경우, 모든 제조업의 기초 소재산업으로서 산업 전반의 경쟁력 향상에 필수적이었다.


조선산업은 해운 강국으로의 발전과 수출 증대에 기여할 수 있었고, 기계산업은 제조업 전반의 기술 수준 향상에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전자산업은 당시 세계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분야였으며, 석유화학산업은 합성섬유와 플라스틱 등 새로운 소재 산업의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포항제철 건설: 중화학공업화의 상징적 출발점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가장 상징적인 성과는 단연 포항제철의 건설이었다.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설립되고, 1970년 4월 착공에 들어가 1973년 7월 제1기 설비가 준공되었다.


포항제철의 건설 과정은 한국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직면한 모든 어려움과 성취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무엇보다 자금 조달이 가장 큰 난제였다.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를 고려할 때 일관제철소 건설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국가적 도전이었다.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고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설비를 도입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기술 종속에 대한 우려도 함께 제기되었다.


포항제철의 건설은 단순히 하나의 공장을 짓는 것을 넘어서 한국의 산업 기술 역량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기술자들이 양성되었고, 이들은 이후 한국의 중화학공업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포항제철이 생산하는 철강재는 조선, 자동차, 기계 등 다른 중화학공업 분야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기공식 <출처 : 위키피디아>



중화학공업 단지 조성과 공간적 재편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전국 각지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울산공업단지는 석유화학공업의 중심지로, 여수공업단지는 석유정제와 화학공업의 거점으로, 창원공업단지는 기계공업의 핵심기지로 개발되었다.


이러한 공업단지의 조성은 단순히 공장 부지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한국의 공간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창원공업단지의 조성은 기계공업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1974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한 창원공업단지는 기계공업을 중심으로 한 종합적인 공업도시로 계획되었다.


이곳에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비롯한 대형 기계업체들이 입주했고, 이들 기업의 성장은 한국의 기계공업 경쟁력 향상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울산공업단지는 석유화학공업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1962년 울산정유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이후 석유화학 관련 업체들이 연이어 입주하면서 거대한 석유화학 콤플렉스가 형성되었다.


이는 한국이 합성섬유, 플라스틱, 합성고무 등 석유화학 제품의 주요 생산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


기술 도입과 인력 양성의 이중 전략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술과 인력이라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필요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적극적인 기술 도입 정책과 체계적인 인력 양성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다.


기술 도입의 경우, 초기에는 선진국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기술 이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점차 기술 소화와 개량을 통해 자체 기술 역량을 축적해 나갔다.


인력 양성 측면에서는 기존의 교육체계로는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전문 인력을 충분히 공급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새로운 교육기관의 설립과 기존 교육기관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197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설립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KAIST는 고급 과학기술 인력 양성을 목표로 하여 중화학공업 발전에 필요한 연구개발 역량을 제공했다.


또한 정부는 해외 연수와 기술 훈련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했다.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기술자들이 일본의 제철소에서 연수를 받았고, 조선업 발전을 위해 유럽의 조선소에 기술자들을 파견했다.


이러한 해외 기술 습득 노력은 한국의 기술 역량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자본 조달과 금융체계의 변화


중화학공업화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당시 한국의 자본 축적 수준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정부는 다양한 자금 조달 방안을 모색했다.


대일청구권 자금, 외국인 직접투자, 해외 차관 등을 적극 활용했으며, 동시에 국내 금융체계도 중화학공업 발전에 맞게 개편했다.


특히 정부는 중화학공업 발전을 위한 정책금융 기능을 강화했다.


한국개발은행을 중심으로 한 정책금융기관들이 중화학공업 부문에 대한 장기 저리 자금을 집중 공급했다. 또한 중화학공업 투자에 대해서는 각종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을 제공하여 민간 기업의 투자를 유도했다.


이러한 자본 조달 과정에서 한국의 금융체계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정부 주도의 자원 배분 기능이 강화되었고, 은행들은 정부 정책에 따라 특정 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중화학공업 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데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의 정부 의존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0년대_쌍용양회_공장 모습 <출처 : 국가기록원>


중화학공업화의 성과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전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추진된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한국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산업구조의 고도화였다. 1970년 제조업에서 경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73.8%였던 것이 1979년에는 51.3%로 감소한 반면,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26.2%에서 48.7%로 급증했다.


이는 한국이 더 이상 단순 조립 가공업에 의존하는 경제가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중간재와 자본재를 생산하는 경제로 전환했음을 의미했다.


수출 구조의 변화도 극적이었다.


1970년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의류, 신발, 가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이었지만, 1970년대 말에는 철강재, 선박, 전자제품, 석유화학 제품 등이 주요 수출품목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이 국제시장에서 가격 경쟁력뿐만 아니라 기술 경쟁력도 갖추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포항제철의 성공은 한국의 중화학공업화가 단순한 정책적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입증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포항제철은 1973년 제1기 설비 가동을 시작한 이후 지속적으로 설비를 확장하여 1981년에는 연산 85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로 성장했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규모였으며, 한국이 철강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었다.


기술 역량 축적과 혁신 생태계의 형성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한국의 기술 역량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초기에는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 이전에 의존했지만, 점차 기술 소화·흡수·개량 능력을 갖추어 나갔다.


특히 포항제철의 경우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기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기술 개발 역량을 축적했으며, 이후 해외 철강 플랜트 수출에도 성공했다.


조선업 분야에서도 1970년대 중반 현대중공업이 설립되어 대형 선박 건조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조선업계에서 주요 플레이어로 부상했다.


현대중공업은 1974년 첫 번째 선박을 인도한 이후 지속적으로 기술력을 향상해 1980년대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로 성장했다.


전자산업 분야에서도 삼성, LG 등 한국 기업들이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전자제품 생산에 나서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단순한 조립 생산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설계와 개발 역량을 축적해 나갔다. 이는 1980년대 한국이 세계적인 전자제품 생산기지로 부상하는 기반이 되었다.


경제발전 패러다임의 전환과 역사적 의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한국의 경제발전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의 경제개발 정책이 주로 외국자본과 기술에 의존한 수출지향적 공업화였다면,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자립경제 기반 구축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목표를 추구했다.


이는 단순히 선진국이 만든 국제분업 체계에 편입되는 것을 넘어서 한국 스스로가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기술 역량을 축적하려는 주체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시장 메커니즘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정부 주도로 추진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의 산업정책 모델로 주목받았다. 이는 이후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의 경제개발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중공업이 1973년 처음 수주한 26만t급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를 건조하는 모습 <출처 : 한국경제신문>


장기적 영향과 한국 경제의 미래 기반 조성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성과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고도성장과 선진국 진입의 토대가 되었다.


중화학공업 부문에서 축적된 기술 역량과 생산 능력은 1980년대 자동차, 반도체, 통신기기 등 첨단 산업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포항제철에서 축적된 대규모 설비 운영 경험과 품질 관리 기술은 이후 한국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규모의 경제를 활용한 국제 경쟁력 확보에 유리했다.


현대, 삼성, LG, 포스코 등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많은 부분이 이 시기에 중화학공업 분야에서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또한 한국의 공간구조와 지역발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울산, 포항, 창원 등은 중화학공업 도시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도 한국 제조업의 핵심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도시에서 축적된 산업 기술과 숙련 인력은 한국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한국이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 정책을 통해 한국은 단순한 가공 무역국에서 벗어나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하는 공업국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는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비록 추진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과 한계도 있었지만,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한국 경제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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