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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1기 준공: 한국 중화학공업의 출발점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2편 - 06

by 한정엽

1974년 7월 3일,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되면서 한국의 산업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이는 단순한 철강 공장의 완공을 넘어서, 대한민국이 자립적 공업국가로 도약하는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철저히 파괴된 산업 기반 위에서, 한국은 마침내 자체적인 철강 생산 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포항제철의 건설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정책의 핵심적 구현체였다.


196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단순히 경제적 목표를 넘어서, 국가 안보와 자립 경제 구축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비전의 일환이었다.


철강산업은 이러한 비전 실현의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산업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한국의 철강 수요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1970년 기준으로 한국의 조강 생산량은 불과 48만 톤에 불과했으며, 이마저도 대부분 고철을 이용한 전기로 생산이었다.


반면 철강 소비량은 260만 톤에 달해, 약 8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강 자급률 향상은 국가 경제의 안정성과 직결된 문제였다.



1970년 4월1일, 포항1기 종합착공식현장 재현 <출처 : 포스코 역사관>


철강산업의 전략적 중요성과 파급 효과


철강은 '산업의 쌀'이라 불릴 만큼 모든 제조업의 기초 소재였다.


자동차, 조선, 건설, 기계 등 중화학공업의 핵심 분야들이 모두 철강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철강 산업의 육성은 한국의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핵심 동력이었다.


포항제철의 건설은 이러한 연관 산업들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 전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철강산업이 갖는 기술적 파급 효과였다.


제철 공정은 극도로 복잡하고 정밀한 기술을 요구하는 분야로, 이 분야에서의 기술 축적은 다른 중화학공업 분야로의 기술 전이를 가능하게 했다.


고온 공정 기술, 정밀 제어 기술, 대규모 설비 운영 기술 등 제철소 운영 과정에서 축적되는 기술들은 화학, 기계, 전자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될 수 있었다.


국가 주도 개발 전략의 구현체


포항제철 건설은 당시 한국이 채택한 국가 주도 개발 전략의 가장 상징적인 사례였다.


민간 자본과 기술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가가 직접 나서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전략 산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면서도 위험한 시도였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계산을 넘어서, 국가의 의지와 비전이 구현된 결과였다.


이러한 접근법은 당시 주류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비교우위론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은 노동집약적 산업에 특화해야 하며,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철강산업은 선진국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러한 이론적 제약을 뛰어넘어, 장기적 국가 발전을 위한 전략적 투자를 감행했다.



포항제철주식회사 출범 <출처 : 포스코 역사관>


초기 구상과 준비 단계 (1968-1970)


포항제철 건설의 구상은 1968년부터 본격화되었다.


당시 경제기획원과 상공부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철강산업 육성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민간 기업 주도의 건설을 고려했으나, 민간 자본의 규모와 기술 능력의 한계로 인해 정부 주도의 건설 방식이 채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난제는 자금 조달 문제였다.


총 사업비 1억 2천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금이 필요했다.


이는 당시 한국의 연간 수출액과 맞먹는 규모였다. 정부는 다각적인 자금 조달 방안을 모색했으며, 결국 일본의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기술 도입 문제도 중요한 과제였다. 철강 기술은 각국이 핵심 기술로 여기는 분야였기 때문에, 기술 이전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정부는 여러 선진국과 협상을 벌였으며, 최종적으로 일본의 신일본제철과 기술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단순한 설비 도입을 넘어서, 운영 기술과 관리 노하우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기술 이전 협정이었다.


입지 선정과 포항의 선택


제철소 입지 선정 과정에서는 여러 후보지가 검토되었다.


여수, 울산, 포항 등이 주요 후보지였으며, 각각의 장단점이 면밀히 분석되었다. 포항이 최종 선택된 이유는 여러 복합적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 포항은 원료 수입과 제품 출하에 유리한 항만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철강 생산에 필요한 철광석과 유연탄은 모두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포항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지형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포항은 상대적으로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규모 철강 공장 건설을 위해서는 광대한 부지가 필요했는데, 포항은 이를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또한 기존 산업 시설이 많지 않아 환경적 제약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셋째, 지역 발전과의 연계성도 고려되었다.


포항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철소 건설을 통한 지역 발전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는 균형 발전이라는 국가 정책 목표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박태준 회장의 모습 <출처 : 포스코 역사관>



건설 과정의 도전과 극복 (1970-1974)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설립과 함께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었다.


박태준이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강력한 리더십 하에 건설 작업이 추진되었다. 건설 과정에서는 수많은 기술적, 경제적 도전이 있었다.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숙련 인력의 부족이었다.


한국에는 대규모 제철소 건설과 운영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 신일본제철에 기술 연수생을 파견하는 한편,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현장 지도를 받았다.


건설 자재와 장비 조달도 큰 과제였다.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대부분의 핵심 설비는 해외에서 도입해야 했다.


특히 고로, 전로 등 핵심 설비는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와의 협상이 중요했다.


동시에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 철근 등 기초 자재의 안정적 공급도 확보해야 했다.


환경적 도전도 있었다. 제철소 건설 부지는 대부분 간척지였기 때문에, 지반 조성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또한 제철소 운영에 필요한 용수 확보를 위해 형산강 일대의 수자원 개발도 병행되었다.


건설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전 국민적 관심과 지원이었다.


포항제철 건설은 단순한 산업 시설 건설을 넘어서, 국가적 프로젝트로 인식되었다.


언론은 연일 건설 진행 상황을 보도했고, 국민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건설 과정에서 직면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기술 습득과 인재 양성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기술 습득과 인재 양성이었다.


제철 기술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 체계로, 단순히 설비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적인 운영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체계적인 기술 학습과 인재 양성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포항제철은 일본 신일본제철과의 기술 협력을 적극 활용했다.


수백 명의 기술자들이 일본에 파견되어 제철 기술을 학습했다.


이들은 단순히 기계 조작법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제철 공정의 원리와 품질 관리 기법, 설비 유지보수 방법 등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동시에 국내에서도 자체적인 교육 훈련 체계를 구축했다.


포항제철은 사내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독자적인 기술 개발 능력을 배양하기 시작했다.


또한 인근 포항공과대학교(현 포스텍) 설립을 추진하여 장기적인 인재 양성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포항제철은 단순한 기술 도입 단계를 넘어서 점차 독자적인 기술 개발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는 후에 포항제철이 세계적인 철강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1기 착공 완료의 환호 <출처 : 포스코 역사관>



1기 준공의 즉각적 성과와 의의


1974년 7월 포항제철 1기 준공은 한국 산업사에 여러 면에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연산 103만 톤 규모의 1기 설비가 가동되면서, 한국은 비로소 철강 자급 생산의 첫걸음을 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양적 성과를 넘어서, 한국이 중화학공업 생산 능력을 확보했다는 질적 전환의 의미를 가졌다.


1기 준공 직후의 성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생산량은 계획을 초과 달성했고, 품질 면에서도 국제 수준에 근접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건설용 철근과 열연강판 등 기초 철강재의 안정적 공급이 가능해지면서, 국내 건설업과 제조업의 원가 경쟁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술적 자신감의 획득이었다.


포항제철 1기의 성공적 가동은 한국이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공업 기술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는 후속 확장과 다른 중화학공업 분야로의 진출에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1976년 5월 31일 2기 준공 모습 <출처 : 포스코 역사관>


연관 산업으로의 파급 효과


포항제철 1기 준공이 가져온 가장 극적인 변화는 연관 산업의 급속한 발전이었다.


안정적이고 경쟁력 있는 철강 공급이 가능해지면서, 자동차, 조선, 기계 등 여러 산업 분야에서 새로운 발전 기회가 열렸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1970년대 중반 이후 현대자동차의 포니 개발과 양산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포항제철의 안정적인 철강 공급이 있었다.


조선업 역시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도약이 시작되었는데, 이 역시 포항제철의 후판 공급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건설업에서의 변화는 더욱 직접적이었다.


철근과 형강의 안정적 공급으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 수행이 용이해졌고, 이는 1970년대 후반 중동 건설 붐으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 지역에서 대규모 플랜트와 토목 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던 것은 포항제철이 제공하는 경쟁력 있는 철강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국가 경제 발전 전략에서의 위치


포항제철 1기 준공은 한국의 경제 발전 전략에서 중요한 이정표였다.


이는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에서 자본집약적 중화학공업 중심으로의 산업 구조 전환이 본격화되는 시점을 상징했다.


동시에 수입 대체 공업화에서 수출 주도 공업화로의 전환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포항제철의 성공은 정부 주도 개발 전략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었다.


시장 기능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대규모 투자와 기술 도입을 국가가 주도함으로써, 단기간에 산업 고도화를 실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공 경험은 후에 반도체, 조선 등 다른 전략 산업 육성에도 적용되는 모델이 되었다.


또한 포항제철은 한국형 발전 모델의 핵심 요소들을 잘 보여주었다.


강력한 정부 주도성, 민간 부문과의 효과적 협력, 해외 기술의 적극적 도입과 소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독자적 발전 등이 그것이었다.



포스코의 야간 모습 <출처 : 포스코 역사관>


장기적 영향과 역사적 평가


포항제철 1기 준공이 한국 경제에 미친 장기적 영향은 실로 혁명적이었다.


1974년 연산 103만 톤으로 시작된 포항제철은 지속적인 확장을 통해 1980년대에는 세계 10위권의 철강 기업으로, 1990년대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효율성을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포항제철은 단순한 철강 생산 기업을 넘어서, 한국의 산업 기술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포스텍 설립을 통한 이공계 인재 양성, 연구개발 투자를 통한 기술 혁신, 그리고 다양한 연관 기업 육성을 통한 산업 생태계 구축 등이 그 예였다.


국제적으로도 포항제철의 성공은 개발도상국의 산업화 모델로 주목받았다.


후발 개발도상국들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때 포항제철의 경험을 벤치마킹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는 한국이 단순한 기술 수입국에서 기술과 경험을 전수하는 선진국으로 위상이 변화했음을 의미했다.


포항제철 1기 준공은 결국 한국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공장이 문을 연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 DNA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계기였다.


오늘날 한국이 반도체,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때 구축된 중화학공업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74년 포항제철 1기 준공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는 한국인의 의지와 역량이 만들어낸 기적이자, 동시에 치밀한 계획과 실행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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