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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04. 2022

[에로스의 종말] 6장 - 에로스의 정치

                    


 사람이 어떤 행동하게 하는 원인을 충동(욕망)과 이성으로만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요한 행동들 중에는 충동 때문에 하는 것으로 보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다쳐서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국가대표로 경기에 나서는 축구 선수의 행동은 충동 때문일까, 이성적인 판단 때문일까? 월드컵이라는 선수 시장에 자신을 선보여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욕망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안위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놓고 엄밀한 이성적 계산과 판단을 거쳤기 때문일까? 물론 둘 다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부족하다.


 이런 경우 저자가 용기라고 번역하는 '티모스thymos'는 대단히 유용하다. 티모스는 용기뿐 아니라 기개로 번역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자만심이나 수치심과 같이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감정과 관련된 것, 즉 '인정욕구'로 풀이되기도 한다.


 티모스는 사회적 욕망과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티모스는 타자와의 관계와 관련된 감정과 욕망이다. 한 정신의학과 교수는 티모스에서 비롯된 행동의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다윗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골리앗에게 돌을 던졌고, 세종대왕은 왜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반포했을까. 또 이순신 장군이 전쟁 막판에 위험을 무릅쓰고 노량해협에 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이성적으로 보면 돌을 던져 위험을 부르지 말고, 그냥 중국 글자를 쓰도록 하고, 도망가는 적군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전리품이나 챙기면 됐을 일이다. 하지만 다윗이나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에게는 욕망과 이성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실존의 가치를 좌우하는 뜨거운 그 무엇이 있었다. 바로 티모스다.


 한병철은 현대 사회가 바로 이 티모스를 상실했다는 점을 이번 장에서 비판했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했던 2천년대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본다. 그때의 정치운동과 현재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보면 '티모스의 소멸'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왜 변혁에 대한 희망, 갈망은 사라지고 정치혐오증만 남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말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성과사회, 소비사회는 충동이 지배하도록 한다. 용기를 동력으로 하는 행동이 드물어진다. 예를 들어 기존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가 용기와 관련된다. 그런데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렇다면 티모스를 회복시킬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에로스가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티모스의 회복은 사랑으로 가능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연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기 전의 세상은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전복된다.

사랑은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그에 반해 포르노그래피적 사랑은 연인을 소비 가능한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이때 연인이란 타자가 아니다. 나의 삶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포르노로 대표되는 욕망과 충동이 낡은 질서를 변혁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용기, 즉 티모스를 억누르고 있다. 그로 인해 정치는 짜증과 불평만이 가득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교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티모스'란 개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초임 시절 학생들을 충동과 이성을 가진 존재로만 보았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설득하여 충동을 억누르게 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결국 충동으로 끌려가고 만다.


 학생들은 잘 이끄는 교사들은 보면 '티모스'를 잘 활용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독서가 얼마나 필요한 공부인지 설명하는 것보다, 독서를 하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자랑과 인정받음의 이유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어디 독서뿐인가? 학습이든, 생활지도든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티모스의 영역이다.


 그런데 한병철은 이 티모스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진정한 추동력이 '사랑'에서 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와의 만남에서 현재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전복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진정한 티모스라고 한다.


 간혹 아이들의 인정욕구를 섣부르게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가 있다. 칭찬스티커나 성과 비교로 학생들을 움직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지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학생들의 티모스를 자극하는 것은 수단이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세상에서 만나는 타자들과의 사랑에 빠지게 해야 한다. 친구, 교사와 같은 사람들과 학문, 진로와 같은 정신적 대상과 만나고, 그들로부터 자신이 갖지 못한 전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시각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전복하도록 하는 티모스를 갖게 하는 것이 교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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