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악행의 대부분이 선과 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점이다."(The sad truth is that most evil is done by people who never make up their minds to be good or evil.)(한나 아렌트, [정신의 삶] 중에서)
한나 아렌트가 남긴 이 말은 우리가 악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보통 우리는 악이 나쁜 의도나 미움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보다 더 중요한 악의 뿌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는 태도', 즉 '무사유'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평범성'은 '진부함'이라는 뜻도 담고 있는데, 이는 악이 특별한 의도나 계획 없이도, 그저 일상의 무심한 태도나 습관적인 행동 속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이 개념을 더 구체화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자신은 그저 윗사람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히 사악하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악의 특별한 성질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저 주어진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악은 특별한 악의가 아니라, 선과 악의 선택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나 생각 없이 무조건 따르는 태도에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찰은 우리 일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악은 꼭 큰 범죄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작은 일상에서도 옳고 그름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작은 악을 저지르거나 방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어쩔 수 없지"라며 넘어가거나,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도 "내 일이 아니야"라며 모른 척하는 태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요즘은 SNS에서 확인도 않은 글을 함부로 퍼나르거나,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는 일도 많은데, 이 역시 생각 없는 행동이 만드는 일상의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렌트는 이런 악을 막으려면 옳고 그름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철학적인 고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과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돌아보고, 책임감 있게 선택하려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은 옳고 그름을 깊이 생각하며 살고 있나요?" 악은 특별한 순간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순간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는 순간들 속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냅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고 갈등도 많은 시대에는 더욱 쉽게 생각 없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그리고 책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