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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May 02. 2023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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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글들이 무겁고 어두웠던 것 같아 오늘 글은 꼭 가볍게 써야지, 시덥지 않은 내용으로 훌러덩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지 다짐했지만 아무래도 어두운 표정으로 밝은 글을 쓰는 건 거짓말을 길게 늘여놓는 기분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쓰는 것도 있지만 글은 나에게 막힌 마음의 배출구이기도 하니까, 오늘은 그냥 내 공간에 하소연 한바탕 하는 마음으로 두서없이 적으련다. 쓰면서 내가 해소하려는 일종의 글쓰기 테라피다. 부디 읽는 사람들에게 글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움이 전이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심리적 불안도가 높다. 어렸을 때부터 이랬던 것 같은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만 받고 자랐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부족함없이 컸다. 그런데 난 왜이럴까, 불안도가 높아져 나를 좀먹을 때 늘 스스로 되물었다. 

불안함이 너무 심해지면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턱턱 막혀온다. 사방이 막힌 상자에 갇힌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손이 떨리고 뭐라도 쥐어야할 것 같아 손으로 여기저기를 더듬는다. 왜 불안할까. 어렸을 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라도 있었던 걸까?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기도 하지만 딱히 이유가 없는 것 같다. 그냥 천성인가. 어렸을 때 자주 봤던 프로그램이 하나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TV는 사랑을 싣고' 처럼, 어렸을 때 무슨 연유로 헤어지게 된 가족들의 사연이 재연 배우들의 연기로 소개되고, 촬영 스튜디오로 돌아와 현재의 그들이 다시 만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가족은 만나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어떤 가족은 한 쪽이 끝끝내 나오지 않아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그 프로그램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재연 장면에 있다. 하교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없다. 밤이 되도록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그 다음날도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가 아이를 두고 집을 떠난 것이다. 생활고 때문에, 남편이 폭력적이어서 등등의 이유겠지. 사연은 기억이 안나도 대문에 서서 문을 쥐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역 배우의 연기만 또렷이 기억난다. 

가끔 이 얘기를 하면 엄마는 어렸을 때 괜히 그런 프로그램을 틀어놔서 내가 불안도가 높아진 것은 아닐까, 웃으며 자책한다. 아예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순전히 그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냥 천성같다.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성립되기엔, 나는 내가 보지 않고 겪지 않은 것에도 불안해한다. 오지 않은 미래를, 알 수 없는 결과를 무서워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언젠가 나를 울게 만든다. 어디서 봤던 문구인데, 누군가 눈물샘의 둑을 무너뜨린듯이 이 문구를 보고 하염없이 울었었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언젠가 떠나고 울린다는 말. 나는 아직도 꽤 낭만적인 사람이라 세상에 영원한 건 있다고 믿고 싶은데, 세상의 99%는 유한해서 이 문구가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나는 늘 영원할 수 없는 걸 영원하다고 믿고 싶어해서 힘들었다. 사람도, 사랑도, 유한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을 꼭 쥐었지만 모두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 사이로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것들이다. 그래서 늘 불안했다. 행복할 때도, 한창일 때도. 

행복 총량의 법칙이라는 괴상한 이론을 혼자 만들어내어, 내가 지금 이렇게 행복하면 언젠가 그만큼 힘들거라며 나중의 행복까지 지금 당겨쓰는 사람처럼 군다. 이건 꼭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내 인생 전반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하니, 참 고질병이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아주 믿어버린다. 어떤 면에선 참 어리석고 순진하다. 스스로도 챙기지 못할 땐 그 믿음이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파괴적이다. 휘청거리는 몸을 상대에게 온전히 맡기면 그에게 나는 얼마나 무거울까. 내 두 발로 서 있으면서 고개만 까딱 기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일텐데. 나는 그걸 몰라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철썩같이 믿으며 관계가 끝날 때마다 상대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너 없인 못산다는 말이 얼마나 사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무서운 말인지 그땐 몰랐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처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면서, 사랑도 우정도 서로 마음을 쏟았던 관계라면 그 관계는 영원할거라고 생각했다. 끊어진 관계도 노력으로 이어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완전한 내가 불완전한 너를 만났는데 그 관계가 어떻게 영원히 견고할 수만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노력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른데 어떻게 우리의 관계가 변함없을 수 있을까. 흔들렸다가도 이어지고 또 다시 툭 끊겼다가 아예 영영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기도 한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인데, 자꾸만 믿으려니 불안도도 같이 높아진다. 그래서 먼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고, 일부로 밀어내도 보고, '내가 이러는데도 좋아한다고 할 순 없을 거 아냐'하며 철없이 상대를 괴롭히며 시험해보기도 했다. 나는 이제 너를 또 완전히 믿어버릴 것 같으니, 자신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미리 신호를 줄 때 떠나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철없던 시절의 나를 만난 마찬가지로 철없던 그들은 그런 협박에도 자신있게 본인들을 들이밀었고 나는 내심 좋아라하며 덥석 손을 잡았다. 사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땐 변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어, 속으로 생각하면서. 하지만 우린 다를거라며 시작한 관계도 역시나 남들과 비슷하게, 그렇고 그런 이유로 끝났다.


<봄날은 간다>를 본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한 때 모두 상우 같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첫사랑이든 짝사랑이든 무엇이든 겪으며 우리는 한 때 상우였다가, 언젠가 상우를 보며 나도 저랬지, 웃을 수 있게 되는 걸까.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는 유한함을 스스로 깨닫는 것 같다. 아예 아프지 않을 순 없지만, '안타깝지만,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러니 쿨하게는 보내주진 못해도 스스로를 지키면서 보내줄 수 있는 것. 마음은 아프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시절에 감사해하고 그 뿐인 것.



충분히 깎였지만, 그럼에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가족들. 전생이 있었다면 나는 무슨 대단한 일을 했던 위인이었는지, 이 땅에 떨어지기 이전에 하늘의 천사였다면 그 중에서도 참 착했던 천사였는지, 나는 참 감사하게도 나에게 사랑만 주는 가족들을 만났다. 나의 모든 것을 결국엔 감싸주고 품어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건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다는 걸 절절히 느낀다. 

하지만 타고나기를 불안도가 높은 사람으로 태어나, 그 안에서도 유리조각을 찾는 것 마냥 여전히 불안해한다. 이들이 시간이 흘러 하나 둘씩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젊고 파릇한 부모님을 보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종종 했다. 변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라도 갈라놓을 유한함이 날 또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내 소원은 엄마아빠보다 하루 일찍 죽는 거라고, 아주 불효막심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건 아마 자연의 섭리상 안될 것 같으니 이젠 남자친구에게까지 이야기한다. 나보다 꼭 하루 더 살아. 떠나는 사람이 될지언정 남겨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남겨진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할텐데, 이렇게 약해빠져서 어쩌려나 싶다.



불안도가 높아 일부로 더 강하게 나갈 때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활발하고, 유쾌하고, 털털하고, 당당해보인다고 한다. 한편으론 맞지만, 또 한편으론 부단히 노력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다. 자신이 한 개도 없는데 자신있는 것처럼, 실은 불안해 죽겠는데 천하태평한 것처럼. 속상해서 울고 있지만 손가락은 'ㅋㅋㅋ'를 남발하는 카카톡방처럼 산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불안함에 늘 남의 손을 잡으려 한다. 손이 떨리면 자꾸 남의 크고 따뜻한 손을 쥐고 그 온기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럴 때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돈으로 따지는 재산보다도 더 값진 재산이다. 하지만 이젠 혼자서도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왼손이 오른손을, 오른손이 왼손을 꼭 붙잡으면서 스스로 달래려고 노력한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으면 똑바로 서라고 매질한다. 

성인이 되면, 아니 적어도 20대 후반이 되면 좀 어른다워질 줄 알았는데 홀로서기를 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가끔은 기울어져도 자주 혼자 설 수 있는게 어른이라고 스스로 정의했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모습을 여전히 꿈꾸지만, 혼자 설줄도 알아야한다. 불안을 남을 통해 해소하면 결국 더 깊은 불안을 마주해버리니까. 게다가 그런 남이 없어지면 나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질테니까.


'홀로서기' 라고 네이버 검색창에 치니까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 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 나왔다. 제목보다 멋진 부제다. 나는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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