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간병차 병원에 들어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정해진 일정표대로 생활하기도, 옆 침대에 새로 들어온 보호자와 인사를 나누기도 제법 익숙해졌다. 가끔은 병원 생활이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바로 병원의 취침 시각이었다. 병원에서는 거의 모든 환자들이 밤 8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가 되면 병원 안 전등도 일제히 꺼졌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머니가 잠드신 것을 확인하고 병실 밖을 나서면 붕 뜬 기분이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느라 한창 바쁠 때였다. 하루 중 처음 맞이한 나만의 시간인지라 허투루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로비에 나가서 글을 썼다. 하지만 또각또각 키보드 치는 소리가 병원 전체에 울려 퍼져 포기해 버렸다. 혹여 누구라도 잠이 깰까 염려되었다. 휴게실에 앉아 책도 읽어 보았다. 이마저도 얼마 못 가 그만두었다. 눈도 침침하고 무슨 내용인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편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병원 안을 배회하는 것뿐이었다. 컴컴한 공간을 걷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작은 당장 눈앞에 놓인 문제들이었다. 내일은 어떤 간식을 어머니에게 드릴까, 물티슈는 언제 주문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결국은 늘 내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을까. 불현듯 번쩍이는 생각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품어왔던 일이었다. 잠시 접어두었는데 이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았다. 곱씹을수록 하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쳤다. 마침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좋을 듯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창업이었다.
하지만 뒤따르는 걱정이 있었다. 돈이었다. 나는 이미 첫 번째 창업에서 수억 원의 손해를 본 적이 있었다. 퇴직금 대부분을 1년도 안 되는 기간 안에 고스란히 날려버린 아픈 경험이었다. 그 여파는 아직까지 내 생활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거액의 돈을 다시 투자한다는 건 무리였다.
또다시 시름에 잠겼다. 어떻게 돈을 마련해야 할까. 새로운 사업을 하고 싶긴 한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안 그래도 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액을 보면 속이 쓰리던 차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순간 묘안이 떠올랐다. 내게는 금붙이가 있었다. 그간 생길 때마다 장롱 속에 차곡차곡 모아둔 보물이었다. 최근에 금값이 올라 팔면 꽤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표시가 안 난다는 점이었다. 늘 깊숙이 묻어놓고 없는 듯 살아왔으니 잃더라도 모른 척 잊고 살면 될 듯했다.
드디어 병원에서 외출을 나온 날 금덩이부터 꺼내보았다. 회사에서 받은 것, 큰맘 먹고 적금처럼 부은 것, 안타깝게도 생각처럼 많지는 않았다. 일생 단 한 번도 팔지 않았건만 겨우 이 정도라니, 실망스러웠으나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금 사시나요?” 곧바로 동네 금은방에 달려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장님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살짝 긴장되었다. 내 물건인데도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태연한 척 가지고 온 금들을 진열대 위에 펼쳐 보였다. 집에서 볼 때보다 양이 더 적게 느껴졌다.
사장님이 돋보기안경 너머로 금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돌덩이 같은 곳에 긁어 보기도 하고 약품을 살짝 발라보기도 했다. 장황한 설명도 계속되었다. 다음부터는 금을 살 때 포나인을 사라느니, 1돈이라고 해도 막상 재 보면 모자란다느니, 내 금을 안 사기라도 한달까 봐 내내 마음이 콩닥거렸다.
"여기 사인하세요" 사장님이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일정액 이상 금을 파는 사람은 반드시 써야 하는 확인증이라고 했다. 장물일 가능성 때문이라는데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적는 동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개인 정보를 이런데 쓸 줄이야.
드디어 사장님이 돈을 건네주었다. 돈다발을 세는 데 손이 떨렸다. 내 두 번째 사업을 위한 첫 삽이 떠지는 찰나였다. 이렇게 모두가 말리는 일을 하게 되는 건가.
퇴직 후 창업은 노후 파산의 지름길이라고들 한다. 알면서 스스로 또 그 길에 들어섰다. 무척이나 궁금하다. 1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일지. 부디 아직은 평온한 지금 이 순간을 그리워하지 않기만을 바라본다.
제2화 : 내가 스스로 판 무덤은 어디일까 / 다음 주 금요일에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