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에 대하여, 과연 이 책이 나에게 준 메세지는 무엇일까? 노화,늙음, 나이듦에 대한 철학적 인식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물학적 건강,사회적관계, 든든한 지갑도 중요하다.사실 3요소중 어느하나 중요하지 않은것은 없다.그런과정에서 비굴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내 삶에 충실하며 밀도있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 예순을 넘기고 사회가 규정한 생산성이 떨어져 더이상 노동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면 죽을텐가? 그렇치 않고 지난날 열심히 산 댓가를 축복받으며 아름다운 제2의 삶을 살아낼텐가.
살아야 한다면 작가의 말대로, 나이별 변곡점에 시대와 나이에 맞는 가치관을 재정립하고 리뉴얼 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나날이 괴로울 뿐이다.
깨달음 하나. 중년의 고뇌는 반드시 지나야 한다.
중년. 이 시기의 경험들은 일종의 '중년의 위기' 같은 것들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고뇌하다가 노년기에 가기 전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발전하고는 깨달음의 환희를 즐기는 것. 지금의 고뇌와 고통의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어 내가 즐길 환희의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란 확신은 가져봄직하다.
오십 과 육십의 경계. 이 시기는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만 있을 뿐이다.단지 안개에 가려져 있을 뿐 초조함을 내려놓고 안개에 가려진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실 속에서 넘어가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이다.
균형이란 현실적 힘의 균형이다.
이 시기를 극복하지 않고 어떻게 편안한 노년기로 넘어갈 수 있는가? 그런 방법이 있는가? 없다.
이제는 내려놓음을 조금씩 연습할 때이다.
집착과 편견을 버리고 사물 그 자체의 원리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의미에서 내려놓음이다. 이것은 포기나 단념이 아니다. 수동적으로 내려놓으면 내려놓을 수록 더 능동적이며 개방적이 된다는 뜻이다.
무감각을 통해서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것. 마음의 평정을 통해서 자유롭게 된다. 무감각은 발레리나나 축구 선수들이 오랜 시간의 훈련을 통해 특정 부위에 생겨난 굳은살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감각을 통해 자연의 본성을 따르는 자유가 가능하다.
이것은 무감각을 사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댓가이며, 이것은 마음의 평정을 사기 위해서 치러야 할 값이다. 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수 없다. 그래서 이 터널은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지나야 한다.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 매일 운동선수처름 자기 내면을 굳은살이 박힌 근육으로 바꾸는 훈련을 해야 한다. 마음의 평정이란 오랜기간 훈련을 쌓아 능숙해진 노련함이며 어떤 치열한 외로움이 쌓여서 익숙해진 담담함이지만, 이 담담함 때문에 자유로워 진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이며 우리는 그들의 과거다.
늙어가는 과정은 다 제각각이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늙는 것만은 분명하다. 늙었다는것 자체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노화가 더 진행되기전 변화를 스스로 이뤄내야 한다.여러가지 시나리오 중에서 축복받는 노년기를 목표로 정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수있다.
따라서 노화에 대한 가치관을 스스로 자기최면화 시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명심하자.노년기의 건강과 삶의 질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각자 상상해 온 그대로의 모습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중요한 요소지만 마음가짐, 행동,인간관계, 사회,문화등 다른 굵직한 변수도 많이 있다.
아직 늙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젊은 것도 아닌 세대. 한마디로 이도저도 아니고 어중간한 나이.허나 골골대는 70세랑 마라톤을 하는 70세를 오십대에선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구분하는가? 마라톤을 하는 70대는 사실 늙은이가 아닌 것이다. 80부터는 거의 수직낙하를 각오해야 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말이다. 생리학-심리학-사회학 3요소를 종합적으로 아니 그 중 두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고려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병상에서 골골대는 72세는 늙은이라 불려 마땅하지만 마라톤을 하는 72세는 늙은이가 아니다.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하는 85세 어르신도 있지만, 일은 계속하되 양을 좀 줄여서 여가시간에 평생 꿈꿔 왔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고자 하는 68세 현역도 있다. 노인도 노인 나름이라는 소리다.
우리는 노년기가 인생에서 가장 긴 구간이면서 또 개인차가 가장 큰 시기이기도 하다는 진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십대에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불안,분노할 일은 거의 없고 즐거움,행복,만족감은 배가 되는 시기다. 평균적으로 개개인의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연령집단은 65-79세였고 그 다음이 80세 이상 그리고 18-20세 순이라는 조사도 있다.
"늙는 다는 것은 절대로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늙음이 선사하는 절대자유가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인지 아는가?.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개의치 말라. 투명인간이 되는 순간(이때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빨리 찾아온다). 눈 앞에는 무한한 자유의 세상이 펼쳐진다.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만한 인물들은 다 사라진 지 오래다. 부모님도 이미돌아가셨다. 부모의 죽음이 가슴아픈 일이지만 해방의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 - 메리루플 미국 시인.
단순하게 나이만 보고 젊은노인과 늙은 노인, 이런 식으로 제3연령기와 제4연령기를 가르지 말란 법은 없다. 그래도 이 두시기를 경계 짓는 가장 큰 기준은 역시 건강상태와 소비력이다. 누군가 이른바 성공적으로 늙고 있다면 그는 제3연령기에 있는것이고 쇠약하고 무능하기만 하다면 이미 제4연령기로 넘어간 것이다.
은퇴하고 자녀들까지 다 독립시켜 내보낸 직후의 인생단계를 삶의 정점이자 자아실현과 성취의 시기라 칭한다. 몇 년에서 길게는 몇십 년까지 이어지는 제3연령기는 근래에 추가된 새로운 개념이다.
실제 나이보다 조금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길 누구나 원한다. 명석하고 유머감각도 좋고 옷도 잘 입고, 부지런해서 즐겁게 잘 살고 있는 젊은 노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든 여자든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현실이 못마땅할 터이다. 그런데 주변지인을 통해 누군가를 소개받고 내린 결론은 (여자라고 가정하자)
"나를 찾는 남자들은 자기수발이나 들어주고 엄마같이 챙겨주고 그런 역활을 해줄 여자를 찾는 남자들만 내게 말을 걸더라고" 한다. 정작 그녀의 관심을 끌었을 남자들의 시선은 아마도 오직 연하에게만 향해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늙은 덕분에 작업사정거리에서 제외된다는 데에 안심하는 쪽도 있다. 성욕이 없어져서가 아니다. 한껏 가꾸고 나가서 남자들의 시선을 잡아끔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나날들에 지쳐 버린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기본적인 몸단장은 하지만,매력 어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므로 적당히 만족하고 그 시간을 다른 용무에 더 알차게 활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바깥세상에 다닐 때 안전을 보장받으면서도 겉과 속이 같은. 솔직한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늙은이가 된다는 것은 곧 성별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 성적 매력이 희미해진다는 뜻이다. 자신의 지위가 성적인 존재에서 늙은이로 강등될 때 사람들이 보인반응은 그가 여전히 육체관계에 흥미가 있는지, 로맨스에 기대가 아직 큰지에 따라 달라진다. 색시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70대를 목전에 둔 시점에 이런 소회의 글도 있다.
이건 다르다 나이 일흔은 재앙과도 같다. 복구 기회조차 없는 재앙말이다.
비슷하게 아흔의 나이에 자신의 70시절을 추억하면서 하는 말도 세겨봄짓하다.
60대 때는 내가 아직 중년기에서 그리 멀리 밀려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중년이라는 육지에 더 이상 상륙은 못해도 여전히 연안을 맴도는 중이라는 느낌이랄까?. 70대가 되니 진짜 늙었다는게 피부로 다가왔다. 이 사실에 압도되자 번뜩 든 깨달음은 이제는 현실을 냉정하게 판달할 때라는 것이었다.
70이 되어 60의 무례함을 보았을때,
현실의 잔인함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뿐만아니라 그 와중에 재치와 통찰을 즐기는 여유는 어디에서 나올까?
노인들과 선 긋기를 하며 보낸 젊은 시절의 대가는 수십년 뒤 부매랑이 되어 되돌아 온다. 사람 나이 80대에 접어들면 자신이 이방인임을 실감하게 된다.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무릎이 찌릿하다. 혹은 젊은이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는데 나를 머리나 촉수가 하나 달린 녹색피부의 외계인보는듯 하다. 그럴때 잠깐 잊고 있었던 진실이 나를 엄습한다.
바로 내가 늙은이 라는것. 나이 든 사람을 보면 흑자는 냉담하고 흑자는 친절하다.어쨌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느 쪽이든 매한가지다. 노화와 관련하여 우리가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의 겉모습은 변해가지만 자아는 젊을 때나 늙어서나 거의 그대로라는 것이다.
“거울을 보면 왠 할머니가 나를 뚤어지게 처다보고 있어요. 노인네가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갔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니까요”.
80대가 되면 걷는게 힘들어진다. 90이 가까우면 셔츠만 갈아입어도 바로 숨이찬다. 삶은 감자도 씹어먹기에 딱딱하다고 느껴지거나 자식들 전화없음으로 주말인걸 안다면 당신은 늙은 것이다. 연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80대에는 낮잠을 하루에 두번 정도 잔다. 90이 되면 횟수를 세다가 잊을 정도로 온종일 꾸벅꾸벅 조는게 일이다. 또 80대에는 식사량이 확연히 줄어들지만 90에는 생각날 때만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더 젊은 시기에 건강에 대한 투자를 집중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중년의 수많은 성인이 스트레스 해소와 피로해복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지갑을 여는게 바로 그래서다. 노년기가 힘든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늙어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만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노년기의 장점을 볼 짬이 없다. 사실, 나이들어서 좋은 점은 한 둘이 아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줄고 만족감, 삶의 지혜, 결정권은 늘어나는 것.
그래서 60이 되기 전 부터 우리는 자신의 건강을 최대한 지상의 과제로 삼아 관리를 해야만 한다.그것외엔 지상과제가 그리 많지 않다. 발병 후 치료에 재정과 인력 대부분을 들이붓지만,실은 치료보다 예방이 경제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훨씬 나은 전략이다. 윤리적으로도 더 바람직하다. 애초에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올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우리가 본의아니게 병원을 찾는다 해도 우리를 보는 우리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는 분명하다.
노인의학은 한마디로 ‘환갑을 넘긴 환자는 의학적 흥미가 떨어지거나 치료해도 보람이 없거나 둘 중 하나라는 통념에 맞서는 의학 분과’ 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년기를 잘 보내기 위한 필수품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때마다 써먹는 모범답안이 있다. 바로 우월한 유전자,두꺼운 지갑,착한 딸 하나다. 노인의학의 대가 조앤 린 역시 비슷한 조언을 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의료시스템 아래에서는 …. 양로원에서 외로운 말년을 보내지 않으려면 딸은 셋은 있어야 한다.”
여든이 되는 또 다른 경험을 보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 느지막이 출현한 제2의 자아는 소심하고 위험을 두려워하며 우유부단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게 결정적인 문제다. 내 영혼은 새로운 경험에 여전히 목마르고 받아만 준다면 어디든 뛰어들려 한다. 그런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안타까운 사실은 최종결정권을 쥔게 몸뚱이 라는 것이다.
의사에게 목소리를 내는 것과 진상을 부리는 것. _page 415
흔히 환자나 보호자가 '착하다'는 칭찬을 받을 때, 혹은 적어도 '까다롭다'는 낙인은 피할 때, 그것은 얌전히 있어 준데 대한 보상과도 같다. '착하다'는 꼬리표는 의사말에 찬성하고 의사의 일과를 방해하지 않으며 의사에게 결정권을 넘겨준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다시 말해, 착한 환자가 된다는 것은 쌍방이 협력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참된 돌봄의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셍이다. 참된 돌봄을 통해 가장 바람직한 성과를 이끌어 내려면 주요 단계마다 환자와 환자 가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진단의 단서가 되는 병력 청취부터 환자관리 혹은 치유의 핵심인 치료법 결정까지 전부 다 말이다. 환자나 환자가족이 예민하게 굴거나 요구사항이 많을때 대부분의 환자를 아끼는 마음이 넘쳐흘러서 그러는것이다. 이들을 의료인이 답답해하거나 귀찮아하 하는 현상은 달라져야 할 건 환자가 아니라 의료계임을 암시하는 반증이다.
1차 주치의가 따로 있고 순환기내과, 신경외과, 족부의학과, 호흡기 내과, 피부과 등등 각 분야별로 찾아가는 전문의가 또 따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인건강관리의 전문의가 부모님이나 보호자를 만나 빠진 퍼즐의 조각이 뭔지 찾아내는것이 필요하다.
현재 의사들은 환자의 지병과 건강상태를 관리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해도 젊은 시절의 완벽한 건강상태로 되돌리는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환자에게 가장 절실한건 삶의 목적, 의미, 선택할 기회라는 정신적 풍요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제도 아래서는 다 그림의 떡일순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준비만 한다면 어렵지 않을수 있다.
규칙적인 운동과 식사. 충분한 수면, 휴일은 꼭 쉬기, 취미 만들기등이다. 한 마디로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게 최고다.
정신적 탄성이 크다는 것이 슬픔이나 분노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정신적 탄성은 유대감,의미,삶의 목적에서 비롯된 만족감과 행복에 비례한다. 나이가 들어도 탱탱한 정신력을 유지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몸과 마음의 변천과정을 계속 주시하면서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를 배우거나 다른 사람들을 돕거나 안 가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전부 젊은 시절에는 생각조차 않던 일이다. 그러려면 우선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잘 알야야 한다. 또한 그걸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밝히는 강단도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독립적이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주거 환경도 받쳐줘야 한다. 한만마디로 기본성향은 낙관주의에 가까우나 현실감각을 유지할 만큼은 비관론적인 면이 적당히 있어야만 정신에 탄성이 생긴다.
나는 하단에 기록한 논리가 이 책을 읽기전 가지고 있었던 생각 중 하나였다.
모두가 인정하길 거부하는 단순한 진실이 하나 있다. 너무 오래 살아도 손해라는 것이다.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면 나이를 먹을 수록 점점 온몸이 시들고 쇠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종국에는 목슴만 제외하고 모든 걸 빼앗기는 지경에 이른다. 창의력은 말라 버려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세계는 커녕 일터나 동네에도 내 한 몸 보탬되게 쓰일 곳이 없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것이 노화다. 특히,가장 심각하게 왜곡되는 건 사람들의 기억이다. 생기 넘치고 늘 적극적이던 나는 사라지고 없다.이제 그들이 기억하는 나는 힘없고 무능해 불쌍할 정도인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일과라고는 놀러 다니거나, 십자말풀이에 매달리거나, 책 한 권을 몇주씩 붙잡고 읽거나 때때로 손자손녀를 보러 자식들 집에 들르는 것뿐이라니 … 그런건 의미 있는 삶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런 여생이 흡족하고 행복할리 없다.
그런게 진정으로 의미있는 인생이라는 거냐고, 갈수록 감퇴하는 신체기능내지는 정신기능에 맞춰 의미있음의 정의를 가볍게 만듦으로써 현실과 타협하는건 아니냐고 나는 감히 따져보고 싶다.
허나 위의 논리를 작가는 반박한다.
만약 이런적응기전이 트집거리가 된다면 우리는 모두 진즉 육십넘어 스스로 목슴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든 사람은 쓸모없는가? 노인들이 스스로 독립성을 갖고 목표지향적으로 의미있게 여생을 보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목표라는 것도 건강이 뒤받침되어줘야만 낙관할 수 있는 가능성있는 일이 될 터이다.
건강한 노인은 몸은 쇠했어도 친화력,경험에서 나오는 지혜, 침착한 자기수용 능력이 있으니 가능할 거라고 낙관하지만 반면에 입원해 있는 노인이나 건강이 편치않는 노인집단은 정신질환 환자라는 처지나 사회의 시선같은 속세의 잣대만으로 이미 실패를 점치고 있다.
노년기에 잘 적응하기 위한 열쇠는 세상을 주름잡던 중년시절 따르던 사회규범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그런 다음 노년기의 신체능력, 자산, 사회적 역활에 맞게 가치관을 재정립해야 적응에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 현실자각의 순간에 누구는 체념하고 누구는 절망감으로 살고 누구는 대담하게 거울 앞에 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념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기별로 개념재정립을 이룰수 있을때 높은 자존감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낡은 육신이 활동반경을 제한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얼마나 인정하는가, 다시말해 자아정체성과 그 사람이 속한 시대의 사회적 상황역시 인간 삶의 질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행동, 미래계획, 자아상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보수개량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면에서는 이전 인생단계들과 비교해 노년기라고 특별히 다른점은 없다.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학 박사학위도, 빨리 끝내고자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도아니다. 경험과 편안한 환경, 이 두가지만 있으면 된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빛나는 것임을,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됨을 이해해야 한다.
심장박동이 없을 때 심페소생술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을수 있다. 허나 그 질문도 하기 전 내 의식이나 제대로 박혀있을까. 한 인격체로서 내 스스로가 어떤 말년을 보내고 싶어 하는지 의사나 간호사는 모른다. 내가 전하지 않는이상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남아 정신이 남아있을때 나의 몸에 내 목슴에 대한 의사권을 반드시 전할 필요는 있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치료법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서양의학의 권장 지침을 우리는 감히 어길수가 없다. 이지침에 의하면 숨이 붇어있는한 현대의학의 치료는 죽기전까지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서양의학의 지침은 의학적 현상에만 초점을 맞출뿐 이 현상을 겪는 몸 주인의 심정과 그 현상 때문에 뒤죽박죽된 그의 삶은 안중에도 없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는 반드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