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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J Jun 14. 2019

오늘의 책, 타인의 고통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책을 읽는 내내 수전 손택에게 홀딱 반했다. 인간적으로 이렇게 멋있으면 반칙 아닌가. 이렇게 논리 정연하고 쉽게 책을 쓰다니. 이런 사람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며 나의 게으름을 엄청나게 원망했다.

​예전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을 때도 든 생각인데 우리는 미디어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으며 살아간다. 그들이 선별해서 보여주고 싶어 하는 정보를 보고 듣는다. 이건 기존의 tv, 라디오 등의 매체뿐만 아니라 유튜브, 블로그, 트위터 등 신종 미디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정보를 생산한 사람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면만 본다.


한때는 이게 너무 싫어서 여러 곳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멀쩡한 (적어도 거짓은 아닌) 정보를 걸러내는 게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한 지 오래다. 지금도 모 채널의 뉴스를 매일 같이 듣고는 있지만 항상 의심한다. 이 순서 배치는 뭔가 의미가 있는 거겠지? 다른 뉴스에서는 이 소식을 탑으로 안 다루던데 얘네는 다루는 건 다 목적이 있는 거겠지?

여러 가지 정보 속에서 나만의 정보를 추려내는 게 가능하긴 할까? 일단 여러 가지 정보를 얻는 과정이 너무 험난한데! 이럴 바에는 그냥 아무것도 안 보고 안 듣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 흘러가듯이 사는 삶을 택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지만 그렇게 살기 싫으니까 약간의 타협(?)을 하면서 뉴스와 동고동락을 해야겠지. 어쩔 수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가버나움’이 계속 떠올랐다. 제국주의와 신종 식민지주의(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무슨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 같은 것들이 둥둥. 아닌 척 고상 떨지만 계속 반복되고 있는 끔찍한 역사 같은 것들이 말이다.

예전에는 대놓고 했지만 지금은 그게 ‘악’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니까 ‘교양’을 갖춘 제국주의. 그렇게 끔찍한 고통은 여기가 아닌 저쪽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공식의 확립.

의식하고 있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타인의 고통’을 읽고 나니 내가 좀 한심 해졌다. 누가 누굴 불쌍하다고 여기며 자신을 위로하는 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도 같은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가버나움’ 영화 리뷰를 따로 쓰기는 했지만 거기서는 언급 안 했던 걸 여기에 해보려 한다. 보다가 정말 기겁한 장면이 있었다. (그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악투성이이긴 하지만)


불법체류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 찾아온 위문공연단이 웃으면서 탬버린을 치고 노래하는 그 장면. 철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교되던 두 처지.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실제로 한숨을 너무 크게 내쉬어서 극장에서 스스로도 놀랐다. 좀 웃기지 않나? 그 장면을 보는데 기분이 나빴다. 그들은 물론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내가 보기엔 우월주의 섞인 위선같이 느껴졌다.

​수전 손택이 책에서 지적했던 모든 것들이 뼈를 찔렀다. 내가 사는 세계와 전쟁은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그저 연민하는 것. (불과 2년 전만 해도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한 편으로 그럼 그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데?라는 순진한 마음도 든다. 아직은 이런 문제에서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엔 미성숙인 인간인가 보다.라는 게 결론. 이것도 일종의 도피일 수도 있지만 어렵다.

​사람들은 왜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어차피 나이가 들면, 병에 걸리면, 그것도 아니면 운이 좋지 않아 사고라도 나면 한순간에 날아가는 게 인간의 목숨인데 왜 그렇게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작은 것들을(인간의 목숨보다) 얻으려는 걸까.

​정말 전쟁이 싫다. 항상 생각한다. 그렇게 전쟁이 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 선동하지 말고 말 한마디로 군대를 보내서 대신시키지 말고 하고 싶은 사람들이 직접 총 메고 뛰어다녔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현실이 너무 끔찍하다.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러한 관행은 이국적인 (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인들, 그리고 머나먼 아시아 국가에 살던 외래인들은 런던, 파리, 그 밖에 유럽 수도들에서 개최된 인종 전시회에서 마치 동물원의 동물처럼 대중에게 공개되곤 했다.

타인의 고통, 112P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으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은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타인의 고통,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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