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엄마는 늘 노래를 듣고 계셨다. 훌리오 이글레시아, 앨튼 존 같은 팝송, 혹은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우리 집의 bgm이었다. 그때는 그게 좋았거나 싫었거나의 감정도 없이 그저 들었지만, 사춘기 시절이 되자 방에 틀어박혀 라디오에 그 음악들이 흘러나오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해가며 열심히 듣고 또 들었다. 엄마의 취향은 내 취향을 만들어 낸 것이다.
부모의 취향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우리네 시절처럼 라디오를 같이 듣지는 않지만,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아이와 같이 듣고, 내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아이와 같이 시청한다.
아이는 스누피를 좋아하게 되었고, 잔나비 노래를 흥얼거리며, 강아지와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그런 것들을 접하게 하지 않았다면 아이의 취향은 바뀌었을까.
어렸을 적 엄마와 같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외화 영화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브루스 윌리스가 싸움을 하고 줄리아 로버츠는 사랑을 하고 해리슨 포드는 탐험을 했다.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는 줄 알았지만 친구들과 대화해보면 그게 누구인지 들어는 봤어라는 대답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렸을적 부모님 손잡고 갔던 영화관의 기억도 모두에게 있는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것을 경험하게 하고 그래서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게 해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양한 것 자체가 나의 기준이다. 내가 아이에게 펼쳐줄 수 있는 가짓수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고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거나 등산을 다니는 것이 내 취미였다면 아이는 벌써 두 발 자전거를 터득하고, 피부가 까맣게 그을린 채 밖으로 나갈 궁리만 했을 거다.
육아는 단순히 건강하게 먹이고 바르게 자라게 하는데 부모의 영혼을 갈아 넣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매번 느낀다.
아이가 살아가는데 원동력이 되어주고 때로는 위로가 되어줄 취향은 찾아주는 것일까, 스스로 찾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나에게 꽤나 오랜 고민이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