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는 늦은 5시경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다. 희뿌연 하고 찌뿌둥한 날씨 속에 조용한 도시를 스르륵 지나가는 트램때문에 역 밖으로 나와서 느꼈던 라이프치히의 첫인상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도시와 닮았는데 새벽에 본 창밖 풍경도 비슷했다. 아내와 아이를 깨우고 호텔 1층으로 조식을 먹으러 내려왔다. 어제 뉘른베르크 호텔보다 종류는 많은 듯해도 입맛을 끄는 건 적어서 오늘만 먹어도 족할 듯했다. 여기는 조식 신청을 미리 안 해놔서 어제 체크 인할 때 일단 하루만 먹는 걸로 신청해 놨는데 굳이 더 찾지 않을 것 같았다. 호텔 객실에서 바라본 라이프치히 중앙역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중앙역(LeipzigHauptbahnhof)은 다른 역과 달리 의미가 있는 게 1915년 지어질 당시 31개의 플랫폼을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였으며, 독일 분단 전에는 전 유럽을 연결하던 철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분단 이후 쇠퇴했다가 지금 다시 도약을 꿈꾸는 도시의 중앙역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한 때 세계 최대 규모였던 라이프치히 중앙역
외출 준비를 하고 라이프치히에서 머무는 3일 동안 도심 나들이는 오늘뿐이라서 따뜻하게 입고 나갔다. 먼저 일요일이라서 우리는 성당으로 미사 참례를 하러 갔다.시내를 가로질러 가는데 아침이라 이 도심 한복판에 우리만 있는 듯했다.우리가 간 성당은 도로 건너 시청 맞은편에 있는 모던한 디자인이 이색적인 성당으로 정식 이름은 성 삼위일체 교회(Propsteikirche St. Trinitatis)였고, 드레스덴-마이센 교구 소속이었다. 2015년에 열렸으며, 2016년 세계 건축 페스티벌에서 올해의 종교 건축상을 수상했다고 알려졌다. 인터넷에서 미사 시간이 오전 9시라서 부리나케 걸어서 왔지만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당황했다. 물어보니 9시 30분에 시작한다고 되어있어서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었다.미사와 성가가 독일어로 진행되어 뭔지 잘 모르지만 순서는 거의 같았기 때문에 눈치껏 함께 했다. 독일어 성가를 처음 들어봤는데 우리나라와 성가 번호가 달라서 찾아 부르기 어려웠지만 알고 있는 성가는 아는 한 따라 불렀다.
독일에서 미사 참례
미사가 끝난 다음 성 토마스 교회(Thomaskirche)로 갔다. 이 교회는 12세기 지어져서 종교 개혁 이후 루터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에 와보고 싶던 가장 큰 이유는 바흐가 이 교회에서 1723년부터 사망한 1750년까지 성가대 감독(Thomaskantor)으로 근무했으며 그의 묘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예배가 끝나고 성가대 연습과 예식이 진행되는 찰나여서 운 좋게 성가대의 음색을 들을 수 있었다.천사가 어깨에 손을 얹는 듯한 화음이어서 짧지만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바흐를 만난 기쁨을 담아
성 토마스 교회 내부
중앙 제단 앞에 바흐 무덤이 있었는데 사실 바흐는 당대에 명망이 아주 높지는 않은 음악가여서 유해가 바로 묻힌 것은 아니고 1894년에 유해를 찾아서 1950년에 이장되었다. 모차르트는 당대와 현재까지 불멸의 영광을 누리지만 유해를 찾지 못한 것과 대조를 이뤘다. 사실 교회 안에 시신이 안치된다는 것은 황제나 왕, 왕가의 혈육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그의 무덤이 안에 있다는 것은 바흐의 위대한 음악성에 대한 인정이라 생각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바흐와 바흐를 알리는데 노력했던 멘델스존의 초상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루터가 1539년 이곳에서 설교를 했다는 기록 명판도 남겨 있어서 이곳이 세계사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교회 안에 있는 바흐 무덤
루터의 설교
나에게 취향적으로 바흐는 클래식 음악의 최고봉이며 모차르트보다 앞서 있는 인물이었다. 음악은 취향이기에 모차르트 음악도 굉장히 좋아하지만 바흐의 바로크 음악 스타일이 개인적으로 더 와닿아서 좋아하는 음악가였다. 바흐, 정식 이름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그 이름을 영원히 남겼는데, 바로크 음악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사에 길이 남을 고전주의 음악에도 영향을 끼쳤다. 베토벤은 바흐를 두고 실개천(Bach)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표현했다. 바흐는 당대에 음악감독으로서 명성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이렇게 알려지게 된 것은 아들들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바흐 음악을 알린 덕택이 컸다. 그렇기에 바흐 사후에도 바흐 음악의 위대함을 잘 알 수 있었다. 특히 멘델스존이 바흐를 알리는데 큰 노력을 하여 이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바흐와 멘델스존이 나란히 있다는 건 천사 혹은 성인들에 비견되는 큰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바흐와 멘델스존의 스테인드글라스
교회를 나와 바로 옆에 바흐 동상이 있어서 사진을 찍는데 성가대도 나와서 기념사진을 찍길래 찍어보았다. 길 건너 바흐 박물관이 있어서 들렀다. 이곳은 바흐와 음악가 집안인 바흐 집안의 삶에 대해 보여주는 곳으로 바흐의 악보 원본을 포함한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어서 바흐의 팬이라면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바흐 가족이 실제 살았던 곳은 아니고 그 맞은편에 실제 거주했던 건물이 있었지만 1902년 헐리면서 바흐 가족과 절친했던 보제 가족의 집이 현재 박물관이 되었다. 나는 유심히 보고 듣고 싶었지만 아이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둘러보고 다소 일찍 나와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조금 떨어진 슈만이나 멘델스존 하우스 가는 건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성가대 단체 촬영
교회 건너편 바흐 박물관
슈만 하우스(Schumann-Haus)는 1838년에 지어진 건물로, 슈만과 클라라는 이곳에서 1839년부터 1844년까지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슈만은 작품들 중 일부를 작곡했으며, 클라라는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가르쳤다. 1956년에 탄생 146주년을 기념하여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박물관에는 슈만의 생애와 작품을 보여주는 다양한 전시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멘델스존 하우스(Mendelssohn-Haus)는 지금도 명망 있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일하며 죽을 때까지 살던 집으로 1997년 타계 150주년을 기념해서 개관했다. 멘델스존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방문해도 좋으며 멘델스존의 곡을 감상할 수 있다. 멘델스존은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바흐를 알린 인물로서도 알려져 클래식 음악계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오스트리아 빈뿐만 아니라 라이프치히도 음악의 도시라는 걸 보여주는 곳들이었다.
한겨울의 찬바람이 쌩하고 불어오는 거리를 걸어서 구시청 광장을 지나 카페 바움(Zum Arabishen Coffe Baum)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현재 공사 중이라 외관만 봐야 했는데, 이 카페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 하우스로 1694년 아라비아의 커피 나무라고 새겨진 입구로 시작되어 3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 내가 사랑하는 바흐, 멘델스존, 리스트, 슈만, 바그너 등의 음악가와 나폴레옹까지 많은 명사들이 드나들었던 카페였다. 예전 프랑스 파리에서 레 뒤 마고를 방문했을 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바흐는 커피를 워낙 좋아해서 '커피 칸타타'라는 곡까지 작곡할 정도였는데 라이프치히에서 커피를 꼭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름 넓었던 구시청 광장
공사 중인 카페 바움
다시 우리가 지나간 구 시청(Altes Rathaus) 광장은 라이프치히 중심이며 부활절 시장, 크리스마스 마켓 등과 같은 행사가 여기서 열리고 구 시청사는 현재 도시 역사박물관으로 개장되어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전 독일 총리로 유명한 앙겔라 메르켈이 졸업한 학교로서 독일에서 5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였다. 1409년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가 후스 전쟁으로 위협받던 교수와 학생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세웠다고 했다. 분단 시절에는 라이프치히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라고 공산주의스러운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캠퍼스 교회인 파울리 교회(Paulinerkirche)는 1968년 강제 철거당했다. 현재는 이전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 중으로 파울리 교회는 2017년 다시 재건축되었고 유리벽으로 세련된 모습을 자랑했다. 파울리 교회를 파올리눔(Paulinum)이라고도 불렸다. 조금 더 돌아다니고 싶어도 날이 추워서 오래 있질 못했다.
신소재로 완성한 고풍스러움
대학교 근처에 루터의 종교 개혁의 출발점인 성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가 다소 세월의 흐름에 잠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교회는 1165년에 착공되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에 지어졌지만 16세기 중반 고딕과 바로크 혼합 양식으로 바뀌어 완공되었다. 내부의 대형 오르간이 유명하며 처음에는 성당이었지만 1539년 루터 교회로 바뀌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마르틴 루터가 이곳에서 설교를 하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된 곳으로 1539년 5월 25일 이곳에서 종교 개혁을 선언했다. 또한 독일 통일의 시작점으로 시민들이 비폭력 시위를 벌였던 월요 시위의 시작인 기도회가 있었던 곳이어서, 외관은 여느 교회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여러 모로 독일 역사의 시작점이 된 장소로서 유서 깊게 느껴졌다.
통일 독일을 향한 시작점이 된 성 니콜라이 교회
나와서는 근처에 있는 멋진 아르누보 양식의 카페에 가서 잠시 몸을 녹였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충분히 즐기고 나서 동독시절의 역사를 주로 보여주는 독일 현대사 박물관을 찾았다. 무료로 입장이 가능했는데 아주 크지는 않아도 볼거리가 알차서 오히려 기부금을 내고 나왔다.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패망부터 독일의 분단 시기, 통일 이후 모습을 잘 표현해 준 현대사 박물관이었다. 분단이 현실이며 그 현실을 당연하게 사는 지금의 우리에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나중에 통일이 된다면 정말 과거의 유물이라 느끼며 북한의 모습을 알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3층에는 독일의 현대 음악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80년대 코너에서는 독일 밴드 Nena의 '99 Luftballons'가 플레이되고 있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곡이라서 끝까지 들었는데 2층에서 봤던 독일의 분단 시절이 오버랩되면서 그 시절에 적절한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꽤 집중하며 보다 보니 어느덧 출출한 저녁 시간 대가 돼서 우리는 예약해 놓은 아우어바흐 술집으로 향했다.
아르누보 양식의 카페에서 쉼표
동독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전시
Nena의 '99 Luftballons'
아우어바흐 술집(Auerbachs Keller)은 희곡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술집으로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간 곳을 유명했다. 카페 바움이 지상에 있으며 커피 향을 맡았다면 이곳은 지하에 있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곳이었다. 술집의 명칭은 이곳에 살았던 13세기의 와인 상인 마르틴 아우어바흐에서 유래되었다. 술집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 개의 홀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큰 홀은 메피스토펠레스 홀로 알려져 있으며,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다른 두 개의 홀은 파우스트의 홀과 마르틴 아우어바흐 홀이었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술집
요리는 식당에서 내세우는 멧돼지와 소고기 요리, 돼지 등심과 감자 크로켓을 주문했는데 배가 고픔에도 불구하고 맛은 평이한 수준이었다. 맥주를 고제 맥주와 지역 흑맥주를 시켜서 파우스트의 저녁을 보냈다.먹다 보니 음식이 짜서 맥주를 더 시킬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나는 오리지널 라이프치히 고제 맥주를 추가 주문해서 더 마셨다.호텔까지는 비몽사몽 갈 맛이었다.맥주 1L를 마시고 밖으로 나오니 영하의 추위도 추운 게 아니었다. 약하게 눈발이 날리는 시내를 가로질러서 중앙역에 들어가 물을 2병 산 뒤 호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해장을 위해 아이와 어제처럼 컵라면을 먹고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다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