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TI
64장. 당신의 꿈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을 오래 미뤄왔다.
아마 불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선택들, 지금 원한다고 믿는 것들, 지금 나답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들. 이것들이 정말 내 것인지를 묻기 시작하면, 무언가가 흔들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이 유행하던 시절에 자기는 여행이 체질도 아닌데 마치 여행이 진짜 자기답다고 믿게 된 사람이 있다. 러닝 열풍 속에서 달리기가 몸과 마음에 맞지 않는데도 나는 러너형 인간이라고 믿게 된 사람이 있다. 일해야 살아 있는 느낌이라는 말이 자기 열정인지, 노동중독 사회가 주입한 감각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비혼이 맞아 혹은 나는 결혼이 꼭 필요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자기 구조인지 시대 담론인지 불분명한 사람이 있다.
이것들이 다 내 욕망인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욕망은 언제나 내 안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외부의 승인과 선망이 욕망의 얼굴을 입는다. 어릴 때부터 칭찬받은 것이 욕망이 된다.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시대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꿈이 된다. 이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것이 나의 욕망인지 주입된 욕망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유행은 취향처럼 오지만 규범처럼 남는다.
자기계발 루틴, 미라클 모닝, 갓생, 퇴사와 세계일주, 노마드 라이프. 이것들이 등장할 때는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것들이 또 다른 정상성의 기준이 된다. 이것을 안 하는 사람이 낙오된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취향처럼 시작된 것이 의무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가, 원해야 한다고 믿는가. 이 둘은 다르다. 내가 좋아한다와 이걸 좋아해야 멋져 보인다 사이의 거리가 바로 사회적 가스라이팅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EETI는 여기서 중요해진다. 근본형과 맞지 않는 욕망은 오래 못 간다. 지속 가능성이 약하다. 소진을 남긴다. 위화감을 남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살았는데 어느 날 몸이 거부한다.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살았는데 어느 날 공항이 두려워진다. 일이 열정이라고 믿었는데 어느 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 이 순간들이 길들여진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균열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신호다.
가장 무서운 자기기만은, 남의 욕망을 자기 꿈이라고 믿고 끝까지 살아버리는 것이다.
65장. 시대는 어떻게 우리의 욕망을 설계하는가
인간은 자유롭게 욕망하기 전에, 먼저 욕망의 언어를 배운다.
이것이 불편하게 들린다. 인간의 욕망은 자유로운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욕망은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언어를 입고 나타난다.
시대별 가스라이팅이 있다. 전쟁과 국가주의 시대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인간이 정상이었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희생을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희생을 자기 존재 이유로 내면화했다. 산업화 시대에는 성실한 노동이 곧 인간의 가치였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인간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IMF 이후에는 안정된 직업만이 살 길이었다. 공무원, 대기업, 자격증. 이것들이 꿈이 아니라 생존이었고, 그 생존이 꿈처럼 포장되었다. SNS가 일상화된 시대에는 보이는 삶이 곧 존재 가치가 되었다. 기록되지 않은 삶은 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성별 가스라이팅도 있다. 남자는 강해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 여자는 돌봐야 하고 예뻐야 한다. 이것이 오래된 규범이다. 그런데 이제 이 규범을 거부하는 것이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 전통을 따르면 뒤떨어진 사람이 되고, 전통을 거부해야 깨어 있는 사람이 된다. 두 개의 규범이 동시에 사람을 압박한다.
세대별 가스라이팅도 있다. 기성세대는 인내와 충성을 미덕으로 배웠다. 청년세대는 자기실현과 자유를 미덕으로 배웠다. 각 세대는 자기 시대의 생존 전략을 절대적인 미덕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세대에게 강요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인내를 주입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자유를 강요한다. 둘 다 자기 시대의 규범을 보편적 진실처럼 믿는 것이다.
자본주의 가스라이팅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이 침투한다. 더 생산적이어야 한다. 더 특별해야 한다. 더 건강해야 한다. 더 경험해야 한다. 심지어 휴식도 전략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들이 모두 내 욕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들은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생산하게 만드는 구조의 언어다. 그 언어가 욕망의 형태로 내 안에 들어온 것이다.
가족과 직장과 종교의 가스라이팅도 있다. 부모가 원하는 성공이 자녀의 꿈처럼 만들어진다. 효도라는 이름 아래 자기포기가 미덕이 된다. 조직 충성이 자기 정체성이 된다. 희생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문화가 개인을 삼킨다.
시대는 늘 새로운 자유를 말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정상성을 만든다.
66장. 나는 왜 나와 맞지 않는 삶을 내 운명처럼 믿게 되었는가
어떤 사람이 있다. 나는 원래 조직형 인간이야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것은 직장에 오래 적응한 결과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있다. 나는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상처로 닫힌 결과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있다. 나는 원래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관계 회피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일 수 있다.
왜 이런 혼동이 생기는가. 인정은 욕망을 바꾸기 때문이다.
칭찬받는 방식대로 욕망이 재배열된다. 수학을 잘한다고 칭찬받으면 수학을 좋아하게 된다. 리더 역할을 하면서 인정받으면 리더십이 자기 본성처럼 느껴진다. 조용히 참아서 착하다는 말을 들으면 참는 것이 자기 성향처럼 내면화된다. 가족, 학교, 또래, 직장의 승인 구조 안에서 욕망이 만들어진다.
비교도 타인의 삶을 내 목표처럼 보이게 만든다. SNS를 열면 성공한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그 화면 속의 삶이 이상적인 삶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내 목표가 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지 따지기 전에 이미 그것을 향해 달리고 있다.
적응형 자아는 왜 본래 자아처럼 느껴지는가. 오래 살면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익숙한 가면은 결국 얼굴처럼 느껴진다. 수십 년을 특정 방식으로 살았다면, 그것이 나의 본성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가면을 벗으려 하면 오히려 낯설고 불안하다. 가면을 벗은 자신이 진짜 같지 않다.
EETI로 보면 이것이 왜 위험한가. 33형이 24형처럼 살려 한다. 자기 방식이 강한 구조인데 조율형처럼 살려다 자기가 사라진다. 22형이 43형을 이상형으로 삼는다. 예민한 공감 구조인데 냉정한 분석형처럼 살려다 자기 감수성을 억압한다. 14형이 44형의 리더 서사를 억지로 내면화한다. 조용한 깊이가 강점인데 강한 출력과 성취를 자기 목표로 삼는다. 구조에 안 맞는 삶은 결국 소진을 남긴다.
길들여진 나를 오래 살수록, 진짜 나는 더 낯설어진다.
67장. 유형별로 가스라이팅에 걸리는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
모든 유형은 가스라이팅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걸리는 방식이 다르다.
22형과 24형은 분위기와 유행에 휩쓸리는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에 걸린다. 공감과 반응이 강한 구조다. 시대 정서를 빠르게 받아들인다. 주변의 감정과 분위기에 민감하기 때문에, 시대가 만들어내는 정서를 자기 욕망으로 오인하기 쉽다. 트렌드를 자기 정체성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달리면 달리기를 원하게 된다. 모두가 여행을 원하면 나도 여행이 맞는다고 믿게 된다. 이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이것이 분위기인가, 아니면 정말 내가 원하는가.
33형과 34형은 자기 기준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가스라이팅에 걸린다. 이것이 반직관적으로 들릴 수 있다. 33형은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 구조인데 어떻게 가스라이팅에 걸리는가. 이렇게 걸린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지만, 사실은 자기 서사에 갇혀 있는 것이다. 변화 불가능한 인간상을 미덕처럼 붙든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바뀔 수 없다는 것이 또 다른 자기 가스라이팅이다. 자기 기준이라고 믿지만, 그 기준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는다.
41형, 43형, 44형은 강한 인간상에 중독되는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에 걸린다. 성취, 리더십, 생산성, 통제력에 과도하게 동일시한다. 나는 계속 강해야 한다는 자기 강요가 된다. 약해지는 것은 자기 부정처럼 느껴진다. 쉬는 것은 낙오처럼 느껴진다. 이 구조 안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성 강요와 강한 리더 이상형이 자기 욕망처럼 내면화된다. 나는 원래 이렇게 강렬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강렬함이 정말 자기 본성인지,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 서사를 내면화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11형, 12형, 14형은 조용한 자기 소거형 가스라이팅에 걸린다. 이것이 가장 눈에 띄지 않는다. 남이 원하는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도 자기 욕망을 확인하지 못한다. 출력이 약한 구조이기 때문에 구조적 강요를 순순히 자기 운명처럼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목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강하게 밀어붙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유형은 가스라이팅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에 걸린다.
68장. 진짜 나와 길들여진 나를 구별하는 EETI 질문법
이제 실전 질문이 필요하다.
숫자를 찾는 것보다 패턴을 찾는 것이 먼저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 말고, 내가 반복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을 봐야 한다.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내가 가장 지쳐버린 순간은 어떤 때인가. 내가 억지로 살았던 시간은 언제인가.
내가 진짜 나인지 판별하는 질문이 있다. 오래 해도 덜 소모되는가. 이것이 첫 번째다. 진짜 자기 구조와 맞는 일은 에너지를 쓰면서도 동시에 에너지가 채워지는 감각이 있다. 남이 안 봐도 계속하고 싶은가. 두 번째다.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인지, 인정이 없어도 지속되는 것인지가 다르다. 억지의 느낌보다 자연스러움이 큰가. 세 번째다. 해야 하는 느낌인지, 하게 되는 느낌인지가 다르다. 끝나고 충만이 남는가. 네 번째다. 같은 시간을 써도 어떤 것은 끝나면 더 생동감이 있고, 어떤 것은 끝나면 빈 느낌이 남는다.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내 리듬과 맞는가. 다섯 번째다.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아도 자꾸 돌아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적응형 자아의 신호도 있다. 안 하면 불안하다. 남이 봐야 의미가 있다. 칭찬받을 때만 확신이 생긴다. 실제로는 즐겁지 않은데 계속 한다. 늘 비교가 따라붙는다. 이것들이 신호다. 이 신호들이 강하게 느껴진다면, 지금 하는 것이 근본형의 욕망이 아닐 수 있다.
근본형 자아의 신호도 있다. 설명하기 어려워도 자연스럽다. 과시가 없어도 지속된다. 성취가 없어도 리듬이 맞는다. 끝나면 더 나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신호들이 느껴질 때, 그 방향이 자기 근본형에 가깝다.
진짜 자아는 가장 화려한 장면이 아니라, 가장 오래 지속 가능한 리듬 안에 숨어 있다.
69장. EETI의 시작은 분류가 아니라 각성이다
나는 EETI를 성격 검사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성격 검사는 지금의 나를 분류하는 것이다. EETI는 그것을 넘는다. 지금의 내가 정말 나인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EETI의 시작점이다.
유형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일이다. 확신보다 질문이다. 나는 33형이구나. 맞다. 그런데 이 33형이 근본형인가, 아니면 오래 살아남기 위해 굳어진 적응형인가. 나는 22형이구나. 맞다. 그런데 이 예민함이 원래 나의 것인가, 아니면 상처 이후 더 강화된 것인가. 욕망의 출처를 다시 묻기 시작하는 것. 이것이 EETI가 진짜로 하려는 일이다.
자기 발견은 시대 저항의 한 방식이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고 저항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구조를 아는 것이 가장 강한 저항이다. 시대가 생산적인 인간을 원할 때, 자기 구조를 알면 그 요구가 자신에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판별할 수 있다. 시대가 자유로운 인간을 원할 때, 자기 구조를 알면 그 자유가 자신에게 진짜 자유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자유다.
진짜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덜 휘둘린다. 유행도 선택할 수 있다. 노동도 선택할 수 있다. 관계도 선택할 수 있다. 자유조차 유행처럼 소비하지 않는다. 시대가 달리기를 권할 때 달리기가 나와 맞는지 먼저 묻는다. 시대가 비혼을 권할 때 그것이 나와 맞는지 먼저 묻는다. 시대가 성공을 권할 때 그 성공의 모양이 나의 것인지 먼저 묻는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남과 다르게 사는 일이 아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 삶을 자기 꿈이라 믿고 끝까지 살아버리는 일이다.
사람은 늘 시대의 언어 속에서 자신을 설명해왔다.
성실해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경험해야 한다, 관리해야 한다, 내려놓아야 한다. 문제는 그 말들이 틀렸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말 나와 맞느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모두가 원한다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원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간격이 불안이 되었다. 나는 왜 저것을 원하지 않지. 내가 이상한 건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내 공감 엔진이 다른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 간격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EETI가 마지막으로 하려는 일이다.
EETI는 그 질문을 다시 열게 한다. 나는 몇 번인가보다 먼저, 지금의 내가 정말 나인가를 묻게 만든다. 그 질문이야말로, 가스라이팅된 자아에서 깨어나는 첫 번째 순간이다.
지금 당신이 원한다고 믿는 것. 지금 당신이 나답다고 생각하는 삶. 그것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이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이미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