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다고 다 말이 되는건 아니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언어를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드물다.
말은 늘 타인을 향해 던져지지만, 그 말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대화의 진짜 시작은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있다.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휘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담긴 감정, 의도, 두려움, 그리고 그 말이 만들어진 내면의 구조를 읽어내는 일이다.
한 사람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말에는 그 사람의 세계관, 상처, 신념이 모두 녹아 있다.
그래서 자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의 언어를 잃은 사람이다.
“나는 괜찮아”라는 말이 습관처럼 나오는 사람은, 대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감정을 드러내면 관계가 무너질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말로 감정을 봉인했다.
“괜찮아”는 편한 말이다. 대화를 멈추게 하고, 나를 보호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은 진짜 감정의 언어를 잃게 만든다.
“괜찮아” 속에 쌓인 감정은 언젠가 다른 형태로 터져 나오며,
그때 우리는 스스로도 놀란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 있지?”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건, 이런 순간을 붙잡는 일이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한마디 속에서, 그 말의 진짜 주인을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나온 말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언어를 해석할 줄 모르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적 방어막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유머로 불안을 감춘다.
누군가는 비난으로 상처를 덮는다.
누군가는 조용함으로 감정을 숨긴다.
그것은 모두 생존의 언어지만, 동시에 진심을 잃어버리게 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진짜 성숙은 그 방어막을 알아차리고, 그 언어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말의 기원을 이해하는 사람은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화가 치밀어올라도 “지금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상처가 건드려졌기 때문이구나”라고
알아차릴 수 있다.
억울함이 올라와도 “이 말은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신호구나”라고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언어의 신호를 해석할 수 있을 때, 말은 감정의 폭탄이 아니라 성찰의 도구가 된다.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침묵도 다르게 쓴다.
말을 줄이는 것은 표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무게를 조율하는 일이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그만큼 자기 감정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내 감정을 풀기 위해서인가.”
이 짧은 자문이 대화를 바꾸고, 관계를 바꾼다.
자기 언어를 알아듣는 일은 결국 자신을 존중하는 일이다.
자신의 말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읽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언어의 주인이 된다.
그때부터 말은 나를 변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는 도구로 바뀐다.
이 차이가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을 가른다.
스스로의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타인의 말도 다르게 듣는다.
비난 속에서도 두려움을 읽고, 침묵 속에서도 불안을 느끼며,
말의 표면보다 그 이면의 감정을 먼저 본다.
그는 듣는 자리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가 상대의 언어를 존중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자기 언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자신이 던진 말 속에서 살아간다.
그 말은 언젠가 돌아와 나를 평가하고, 나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대화는 세상과의 대화가 아니라,
내가 나와 나누는 대화다.
그 대화가 정직할수록, 바깥의 대화도 깊어진다.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는 훈련은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 시작된다.
회의 중 무심코 나온 말 한마디,
친한 사람 앞에서 갑자기 올라온 짜증,
문득 나 자신에게 내뱉은 한탄—
이 모든 말에는 단순한 정보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라는 말은
책임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도움받으면 약해 보일까봐”라는 방어일 수 있다.
“뭐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말에는
실패에 대한 냉소보다 더 깊은 상처와 두려움이 숨어 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보다,
그 말을 만들게 된 ‘내면의 맥락’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은 감정과 사고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반복될수록 하나의 ‘패턴’이 된다.
자신의 말버릇을 되돌아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늘 "미안"으로 문장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언제나 "근데 말이야"로 대화를 전환한다.
이런 말버릇은 우연이 아니다.
그 사람의 관계방식, 상처에 대한 대처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깃들어 있다.
자기 언어를 분석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말 속에 숨겨진 두려움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냥 말한 건데”라고 회피한다.
그러나 말이란 ‘그냥’ 나오지 않는다.
모든 말은 내면의 압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을 때,
그 틈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래서 자기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자기 말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말의 힘을 안다.
말은 상대를 다치게도, 안심시키기도, 스스로를 구속하기도 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자주 들리지만,
그 말은 종종 ‘나는 더 이상 변하고 싶지 않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그런 ‘정체성 고정어’를 경계한다.
그는 자신의 말에 의문을 던진다.
“내가 왜 이 말을 반복하는가?”
“이 말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가두는가?”
진짜 대화는 말의 양이 아니라,
말의 기원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침묵조차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결코 말을 쉽게 흘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 언어가 ‘타인에게 작용하는 힘’을 안다.
그래서 말하기 전에 멈추고, 생각하고, 조율한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그 말은 자기 존재의 연장선이자, 상대와의 신뢰 다리가 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해 오해를 낳기도 한다.
“알잖아”라는 말에 감정이 묻혀 버릴 때,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나는 너를 위하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통제와 지시의 다른 얼굴일 수도 있다.
이런 어긋남은, 자기 언어를 읽지 못할 때 자주 일어난다.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사랑조차도 정직하게 표현할 줄 안다.
그는 “나는 지금 서운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비난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시키는 통로가 되게 만든다.
결국, 자기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건
‘말의 미세한 떨림’을 느낄 줄 아는 민감성을 가지는 일이다.
그 민감성은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덜 다치게 하고,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
말은 사람의 정체성을 가꾸는 도구다.
내 언어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결국 나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지의 반영이다.
그래서 말은 곧 자아의 조각이다.
내가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는, 내가 어떤 나를 세상에 내보내느냐와 같다.
그리고 그 선택은 무의식의 흐름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훈련을 통해 의식의 구조로 끌어올릴 수도 있다.
자신의 언어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반응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말이 감정의 배출구이자, 동시에 책임의 통로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말을 하기 전, 자신에게 묻는다.
“이 말은 지금 필요한가, 혹은 내가 감정을 버티지 못해 내뱉고 싶은 말인가?”
말이란 도끼처럼 날카로워서,
무심코 휘두르면 상처를 남기고,
조심히 다루면 길을 낼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말로 상처를 남기며 살아왔다.
때로는 그 상처가 타인에게,
때로는 스스로에게로 향했다.
그렇기에 자기 언어를 돌아보는 일은,
스스로에게 내던진 말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는 작업이다.
“왜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말하지?”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상대는 어떤 표정을 지었지?”
이런 질문들이 쌓일수록,
우리는 말의 책임을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되돌릴 수 있다.
또한 자기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말하지 않은 말’도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감정은 침묵 속에 머물러 있고,
어떤 진심은 차마 말로 꺼낼 수 없어서 돌아앉는다.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은,
말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말의 빈틈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대화를 기술이 아닌 ‘인격의 영역’으로 여긴다.
그에게 말은 관계를 조종하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상처를 건너는 배이다.
그래서 그는 말에 정성을 담는다.
그는 아는 말 대신 이해한 말을 선택하고,
말을 끌어다 쓰기보다 되새김하며 뱉는다.
그렇게 언어는 삶의 태도가 된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 대화의 순간들도,
그에게는 자기를 다시 알아가는 문장이 된다.
“나는 말로 너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
“나는 말로 나를 속이지 않겠다.”
이 두 가지 결심만으로도,
우리는 더 성숙한 말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오늘의 한 줄 연습
“지금 내가 쓰는 이 말은, 내 진심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