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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위 악마 베레트

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by 아르칸테

제13위 악마 베레트 – 허영과 자기과시

죄명: 허영을 좇아 자신을 부풀린 죄

[악마 소개]
베레트.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붉은 말을 타고 화려한 관을 쓰고 나타나며,

강한 목소리로 사람을 현혹한다고 전해진다.
그의 능력은 ‘자기 과시’다. 그는 자신을 부풀려 보이게 하고, 없는 것을 있는 듯 꾸미며,

타인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박수와 찬사, 곧 자기 자신을 반사해내는 타인의 눈빛이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허무의 거울이다. 그 거울은 그의 화려한 외피를 벗겨내고,

공허한 내면을 드러낸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밝혀라.

베레트: 나는 베레트. 나는 위대한 자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섰다. 나를 본 이들은 힘을 얻었고, 나의 화려함 속에서 자신을 투영했다. 나는 그들에게 꿈을 주었다. 어찌 내가 죄인이 되겠는가.

철학자: 네 죄명은 허영과 자기과시다. 너의 화려함은 꿈이 아니라 거짓이었다. 너는 스스로를 부풀려 타인을 속였고, 그들의 갈망을 이용해 네 허무를 감췄다.

베레트: (비웃으며) 사람들은 거짓이라도 원했다. 진실보다도 더 강렬한 환상을 원한 건 그들이다. 나는 단지 보여주었을 뿐이다.

철학자: 아니다. 환상을 보여주는 순간, 너는 자신을 잃었다. 너는 존재를 세운 것이 아니라, 공허를 세운 것이다. 허영은 순간 빛나지만, 끝내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베레트: 나는 나를 지키려 했다. 초라한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철학자: 초라함을 감추려 한 순간, 너는 이미 초라해졌다. 과시는 존엄이 아니라 공허의 방패다. 너의 방패는 너를 구한 것이 아니라, 너를 지운 것이다.

베레트: (입술을 씰룩이며 억울한 듯, 그러나 이미 허영의 불길이 눈동자에 일렁인다)
초라함? 그건 약자가 붙잡는 변명일 뿐이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보여야 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사랑한다.
위대한 자의 형상, 붉은 말, 황금의 관…
그것들은 나를 지탱한 무기였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법정 뒤편에서 환광처럼 붉은 빛이 퍼져 들어온다.)

베레트:
내가 불탔다고?
그래, 나는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 불은 나를 삼킨 것이 아니라,
나를 빛나게 했다!

(그의 몸 뒤에서 화려한 붉은 불꽃이 치솟는다.
그 불꽃은 장식 같지만, 자세히 보면 속이 비어 있고, 안쪽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온다.)

베레트:
사람들은 강렬함을 원한다.
평범함에 질려 있다.
나는 그들에게 극적인 삶을 보여주었다.
내가 불타는 순간조차,
그들에게는 ‘명장면’으로 기록됐다!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이미지다.
그렇다면 내가 불탄들 뭐가 문제냐?
타오를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면
그건 나의 존재감이다!

철학자: (고개를 들어, 그의 불길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대가 불탔다는 사실은, 존재감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 불은 스스로를 비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빈 공간을 감추는 연기였다.

베레트: (비웃음과 울분이 섞인 미소)
빈 공간?
그대가 모르는군.
공허하다는 건 약점이 아니라,
채울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 빈 공간을 화려하게 메웠다.
화려함이 죄라면,
모든 왕관은 죄악이며,
모든 무대는 속임수 아닌가?

철학자: (조용히)
왕관은 책임으로 빛나지만,
그대의 화려함은 공허로 타올랐다.
그대가 불태운 것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눈이었다.
그들의 시선, 그들의 기대,
그들이 네게 준 박수.
그 불은 그들을 눈멀게 만들었고,
그 눈먼 환호가 그대를 더욱 타락시켰지.

베레트: (목소리를 떨며, 그러나 여전히 허영을 놓지 못한 눈빛)
그래도… 사람들은 나를 사랑했다.
나를 바라봤다.
그들이 보내준 찬사, 환호
그것들이 없다면…
나는 무엇이 남는다는 거지?

철학자:
그 질문이 바로 너의 불길이다.
내면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었기에,
너는 외피를 태워 빛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갈 수 없다.

(베레트의 불꽃이 흔들리며 깜빡인다.
붉은 말의 환영이 뒤에서 울부짖는다.
왕관의 금빛이 벗겨지며 검게 그을린 철조각만 남는다.)

베레트: (절규하듯)
나는… 타오르지 않으면…
보이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 아무도…!

철학자:
그래.
그대는 타오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대의 존재는 빛이 아니라
불꽃의 착시였다.


[심판]
철학자는 허무의 거울을 베레트 앞에 세웠다.
거울 속에는 화려한 관과 붉은 말 위의 베레트가 비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관은 녹슬어 가루가 되었고, 붉은 말은 뼈마디만 남아 쓰러졌다.

철학자: 베레트, 이 거울은 네가 쌓은 허영을 벗겨낼 것이다. 남은 것은 네가 두려워한 공허뿐이다.

거울 속에서 무너져내린 화려함은 베레트의 몸을 덮쳤다.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만 남고, 그의 몸은 비어 있는 껍질처럼 갈라졌다.

베레트: (거울 속 화려함이 부서지는데도 억지 웃음을 지으며)
멈춰라…! 이건 진짜 내가 아니다.
저 허물어지는 관도, 저 말의 뼈다귀도
모두 상징일 뿐이다!
나의 본질은 저런 허락된 형상이 아니다!

(거울 속에서 금빛 파편이 떨어져 나와 그의 어깨에 부딪힌다.
베레트는 움찔하지만, 억지로 등을 펴고 손을 벌린다.)

베레트:
나는… 위대하다.
나는 찬사를 받았고,
관중들은 내 이름을 불렀다!
박수 소리를 들어라
그 메아리가 아직도 남아 있지 않나?

철학자: (조용히)
그 메아리는 네가 만든 거짓의 울림일 뿐이다.
실체 없는 박수는 네 공허를 감추기 위한 소음이었다.

베레트: (분노와 불안이 뒤섞인 목소리)
공허?
아니, 아니… 나는 공허하지 않다.
나는… 누군가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꿈을 꾸었다.
내 화려함을 동경했고,
내 이름을 자신의 입술에 올렸다.
그것이 허영이라면
세상의 모든 무대는 죄악이겠지!

철학자:
허영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허영을 존재의 근거로 삼은 것이 그대의 죄다.

베레트: (거울을 손으로 밀쳐내려 하지만, 손이 거울 안쪽에 빨려 들어가듯 붙들린다)
놓아라!
나는 심판받지 않는다!
나는 나를 만든 것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원했고,
그들이 나에게 왕관을 씌웠다!
나는 그들의 욕망을 입었을 뿐이다!

철학자:
누군가에게 씌워진 왕관을 진짜라고 믿은 순간
그대는 스스로를 팔아넘겼다.

베레트: (절규하며)
아니야!!
나는 스스로를 팔지 않았다!
나는… 그저… 더 큰 무대를 원했을 뿐이야!
더 많은 박수를!
더 밝은 조명을!

(그의 말이 끝나자, 거울 속에서 붉은 말의 해골이 튀어나오고,
거울 뒤에서 화려한 관의 금가루가 폭풍처럼 베레트를 덮친다.)

베레트: (금가루에 파묻히며 버둥거린다)
이건… 장식이다!
내 장식이다!
내가… 원한…

철학자:
그대는 화려함으로 심판을 거부하려 했지만,
그 화려함이 그대를 심판했다.

(금가루가 베레트의 몸에 붙어 금박처럼 번쩍이지만,
이내 금박은 갈라져 검은 틈이 드러난다.
그 틈은 점점 넓어지며 몸이 껍데기처럼 벌어진다.)

베레트: (울부짖듯, 그러나 이미 공허가 드러난 목소리)
나는… 위대해야…
위대하게 보여야…
숨을… 쉬을 수 있었는데…!
나를 보라…!
나를

(그 순간, 그의 몸이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다.
화려했던 외피는 전부 무너져 떨어지고,
남은 것은 속이 텅 빈 껍질 한 조각일 뿐이다.)

철학자: (떨림 없는 목소리)
그대가 반드시 보여주고 싶어 했던 ‘자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대가 붙잡으려 했던 박수는,
결국 자신을 지탱해 줄 기둥이 아니었다.

(법정 안에 금가루가 눈처럼 흩날리며,
베레트의 비어 있는 껍데기는 바람에 밀려 산산조각난다.
그 조각들은 마치 허영의 잔해처럼, 공중에서 빛을 잃고 떨어진다.)

철학자:
과시로 심판을 거부한 자는,
과시한 그것으로 심판받는다.
빛으로 자신을 부풀린 자의 끝은
언제나, 텅 빈 그림자다.


[귀환]
거울이 산산조각 나자, 남은 것은 꾸밈 없는 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
"나는 허영을 좇아 스스로를 부풀린 죄인이다. 이제는 공허가 아니라, 진실한 나로 서겠다."


[교훈]
허영은 순간을 빛내지만,

존재를 공허로 만든다.

과시는 존엄이 아니라 자기 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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