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있어도 괜찮아.
고독을 망치는 행동들 고독이 힘들어지는 순간은
대개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혼자 있는 시간을 잘못 다룰 때 찾아온다.
사람들은 말한다.
“혼자 있으면 더 생각이 많아져요.”
“가만히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아요.”
“그래서 일부러 뭔가를 계속 해요.”
이 말들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반응들 속에는 고독을 상태로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습관이 숨어 있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고독을 없애려는 시도다.
음악을 켜고,영상을 틀고,메시지를 확인하고,쓸데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이 행동들이 문제인 것은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이 행동들이 고독을 회피의 대상으로 만들 때다.
고독은 다루지 않으면 곧바로 적이 된다.
이 장에서는 혼자 있을 때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그 대신 해야 할 최소한의 태도를 정리하려 한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부터 보자.
첫째,
혼자 있는 시간을 즉시 감정 처리 시간으로 만들지 말 것.
고독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곧바로 분석하거나
해결하려 들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심문하게 된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이렇게 느끼는 내가 문제 아닌가?”
이 태도는 성찰이 아니라 자기 압박이다.
고독은 감정을 처리하라고 주어진 시간이 아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상태일 뿐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기능을 지닌 존재다. 그래서 고독 속에 들어가면,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에 치여 스스로를 압박하게 된다. 문제는 그 압박을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매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한다는 점이다.
남이 주는 압박도 버겁고 답답한데, 그것을 내가 나에게 하고 있다면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렇게 되면 사람은 결국 그 압박에서 도망칠 출구를 찾게 된다. 그 방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누군가의 탓을 찾거나, 자신을 방치하거나, 혹은 일중독처럼 끊임없는 바쁨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독을 피하면, 당장은 조금 나아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는 것은 더 큰 고독이다. 작은 공간에서 마주했어야 할 고독을 피한 대가는, 이제 세상을 뒤덮은 고독으로 돌아온다. 그때 사람은 어느새 세상 속에서 외로운 존재가 되고, 점점 고립된다.
고립 그 자체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독을 회피한 대가이며, 외로움이 사람을 끌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둘째,
고독을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을 버릴 것.혼자 있는 시간마저
성과와 효율로 재단하면 고독은 곧바로 부담이 된다.
“이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낭비 같아.”
이 강박은 고독을 쉼도, 성찰도 아닌 또 하나의 과제로 만든다.
고독은 잘 써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대로 두어도 되는 시간이다.
계속해서 발전해 나아가야 하는 현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을 정리하고 마음을 깔끔하게 하는 시간마저 빨라야 하고, 떠밀려야 하며, 성과를 내야만 허락된다면 그 시간은 애초에 갖기 어려운 시간이 된다.
자신을 위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면, 현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가 없으면 우리는 단 1분, 1초도 스스로를 가만히 두지 못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고 괴롭힌다. 더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방식이 익숙해졌고, 그 상태가 오히려 마음의 안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일이 끝나는 순간은 곧 잠드는 시간이다.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는 휴가가 아니라면, 일상 속에서 현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는 거의 없다. 학생들도 다르지 않다. 학교, 학원, 숙제. 너무도 빽빽한 일정 속에서 시키는 공부, 하라는 공부, 해야만 하는 공부는 넘쳐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고독의 시간은 없다.
그러니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무엇을 정리해야 하는지 알아볼 시간도 없이 살아간다. 고독이라는 시간은 늘 어떤 욕구와 비교 속에서 “나도 저걸 하고 싶다”라는 불만으로 변질된다. 그러다 보니 현실을 원망하게 되고,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옷만 입고 살아가게 된다. 학생이라는 옷, 성과를 내야 하는 존재라는 옷.
그 옷을 어떻게 벗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의 부모 세대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아온 결과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경험을 나눌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면, 자식에게 허락할 수 있는 경험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퇴로는 있다.
경험이 많지 않더라도, 자신을 믿고 성찰할 수 있는 고독의 시간을 가진다면 달라진다.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해도 이 아이는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자식에게 다른 길을 허락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신을 과도한 현실의 압박 속에 밀어 넣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부모 역시, 자식을 진심으로 믿어주기 위해 고독이라는 시간을 빌려 현실을 잠시 내려놓고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왜 내 자식을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는가.”
성과와 효율은 중요하다. 그러나 고독이 필요한 순간에는, 잠시 내려놓아도 되는 문제다. 고독은 뒤처지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다음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준비이기 때문이다.
셋째,
불편함을 즉시 없애려 하지 말 것.
고독이 힘들 때 사람들은 빠르게 결론을 낸다.
“나한테 고독은 안 맞아.”
“나는 원래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 봐.”
하지만 불편함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다.
대개는 오래 미뤄둔 생각이나 감정이
처음으로 숨을 쉬는 순간이다.이 순간을 밀어내면 고독은 계속 괴로워진다.
불편함을 견뎌야 성장은 시작된다.
일을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수고를 감수한다. 같은 아침, 같은 시간이라도 그날이 휴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놀러 가는 날의 아침은 힘들기보다 기꺼운 시간이 된다. 상황이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감각은 완전히 달라진다.
현실을 내려놓는 방법을 외부의 힘에만 의존하지 말고, 내면에서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고독이라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컨트롤하는 능력을 기르면, 잠시 현실과 거리를 두고 즐거운 상상도 할 수 있고, 동시에 자신에게 무엇이 고장 나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도 차분히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발견을 다시 현실로 가져와, 이전과는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고독이 어색하고, 감정적으로 불안하며,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릴 필요는 없다. 고독은 우리를 해친 적이 없다. 오히려 고독은 우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불편함을 주는 것은 고독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고독을 피하려는 우리의 태도다.
고독은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다. 자신을 회복하고,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넷째,
고독을 관계의 대체물로 쓰지 말 것.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관계를 불러오고,관계를 버티기 위해 다시 고독으로 숨는 패턴은
둘 다를 망친다.
고독은 관계를 대신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중간 지대다.
이제 해야 할 것을 보자.
대체는 언제나 또 다른 대체를 요구한다.
내 마음을 대신 채우는 것들은 결국 ‘대신’일 뿐, 깊은 의미로 남지 않는다. 그 순간에는 필요해 보이지만, 지나고 나면 공허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마음의 공허를 견디지 못해 인간관계나 물건, 어떤 외부의 것들로 자신을 채우기 시작하면, 그 대체물은 점점 더 자극적인 것으로 바뀐다. 사실 마음 한편에서는 별것 아닌, 아주 인간적인 위로를 원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만나는 관계는 바뀌고 가져야 할 물건은 더 나은 것으로 계속 교체된다. 그때의 공허를, 그때의 느낌으로 덮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잃는다. 무엇이 진짜 인간관계인지, 무엇이 정말로 가져야 할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공허를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그 결과는 자기 혐오로 돌아온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기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만이 그토록 바라던 ‘단 한 사람’이 될 가능성마저 잃게 된다.
그래서 고독이 올 때, 어떤 대체물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대체물은 언제나 대체일 뿐이다. 고독은 대신 채워질 대상이 아니라, 직접 마주해야 할 상태다.
내 고독은, 내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자신의 것을 스스로 책임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해야 할 것은 놀라울 만큼 적다.
첫째, 고독을 상태로 유지할 것.
“지금 나는 혼자 있다.”
이 문장을 사실로만 두면 된다.
좋다거나 나쁘다는 평가를 덧붙이지 않는다.
이 단순한 고정이 감정의 폭주를 막는다.
우리는 사실을 사실대로 해석하고, 그 위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감정을 잘 사용하려면 예술을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마음껏 표현해도 괜찮은 거의 유일한 공간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다르다. 현실에서는 언제나 감정을 그대로 풀어놓아도 되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현실을 해석할 때는 감정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순서가 무너지면 판단은 흐려지고 선택은 왜곡된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분리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성이 중심이 되어 감정을 돌봐야 한다. 반대로 감정이 주체가 되어 나를 끌고 가기 시작하면, 감정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된다.
그래서 글쓴이는 제안한다. 예술가가 되지 않더라도, 예술 하나쯤은 배워보라고. 예술을 하는 시간만큼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잘해야 할 필요도 없고, 평가받을 필요도 없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표현하면 된다. 마음도 그런 무조건적인 자유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정을 충분히 풀어낸 뒤, 다시 혼자 있는 시간이 찾아오면 달라진다. 지금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더 쉽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고독이 위협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현실에서는 감정을 내려놓고 판단하고, 예술에서는 감정을 마음껏 풀어놓는 것. 이 두 공간을 구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고, 고독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둘째,
반응을 늦출 것.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에 즉시 답하지 않는다.
메모하지 않아도 되고,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반응을 늦춘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선택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즉문즉답이 필요한 순간도 분명 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충분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자신에게 올바른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을 아끼는 법을 아는 사람은 그 태도가 자연스럽게 타인을 대할 때에도 드러난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못한 채 문제를 그저 빨리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스스로에게 안기는 일이다.
천천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오늘의 선택을 성급하게 끝내지 않고, 한 번 더 생각을 넘기며 더 선명하고 확실한 판단의 틀을 만들 수 있다. 깊이 있는 선택은 속도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셋째,
질문을 하나만 남길 것. 고독 속에서 여러 질문을 꺼내면 사람은 금방 지친다.
이 장에서 권하고 싶은 질문은 단 하나다.
“지금 이 상태에서 내가 회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방향만 만든다.
그리고 방향이 생기면
고독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다.
고독 속에서 질문을 여러 개 던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민’은 대부분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계가 흐릿하고, 사용하는 단어도 선명하지 않다. 게다가 많은 고민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역량이 일정 수준까지 올라가야만 비로소 다룰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런 상태에서 여러 질문을 한꺼번에 붙잡으면, 생각은 정리되기보다 더 흐려질 뿐이다.
그래서 고민은 한 번에 하나만 다루는 것이 좋다.
특히 추상적인 문제일수록 개념의 범위가 넓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해결’이 아니라 ‘단어 정립’이다.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 고민을 어떤 말로 부를 수 있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개념 정리가 시작되면 변화가 생긴다. 우리는 문제 안에서 허우적대는 상태에서 벗어나, 그 문제를 하나의 개념으로 바라보게 된다. 개념의 범위를 찾고, 흐릿하던 생각을 선명하게 만드는 작업을 거치면서, 그 문제는 이전보다 훨씬 다루기 쉬운 형태로 바뀐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고, 고독이라는 시간도 더 이상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다려지는 시간이 된다.
또한 현실적으로 올라가야만 닿을 수 있는 자리라면, 가장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다. 큰 질문을 붙잡고 있는 동안, 정작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원리는 대체로 단순하다.
다만 우리가 급하게 결과를 얻고 싶고, 빨리 문제를 끝내버리고 싶은 욕구가 고독한 고민의 시간을 방해할 뿐이다. 고독은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 가지를 분명히 보는 순간, 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넷째,
고독의 길이를 욕심내지 말 것.
고독은 길게 가져야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짧아도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는가다.
5분이어도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 고독은 이미 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장에서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고독은 무엇을 더 해야 좋아지는 상태가 아니다. 무엇을 하지 않아야 망가지지 않는 상태다.
고독을 망치는 것은 대부분
과도한 개입이다.과도한 해석,
과도한 해결, 과도한 의미 부여. 이것들을 내려놓을수록
고독은 조용해진다. 그리고 조용해진 고독 위에서 비로소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
고독을 피하지도, 견디지도 않고 훈련으로 바꾸는 단계다.
이 지점에서 고독은 더 이상
‘버텨야 할 시간’이 아니다. 사용 가능한 상태가 된다.
사람들이 고독을 망치는 이유는
대부분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려 하고,감정을 치유하려 하고,의미를 뽑아내려 한다.
하지만 고독은 처음부터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고독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개입하지 않는 태도다.개입을 멈추면
고독은 스스로 구조를 드러낸다.
생각은 생각대로 흐르고,감정은 감정대로 떠오른다.
이 흐름을 끊지 않고 지켜볼 수 있을 때,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안의 패턴을 보게 된다.
이 패턴은 의외로 단순하다.
늘 같은 지점에서 흔들리고,늘 같은 질문을 회피하며,
늘 같은 방식으로 불편함을 덮는다.
고독은 이 반복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래서 고독은 한 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반복은 고행이 아니다.
결심도 필요 없다. 조건은 단 하나다.
고독을 방해하지 않을 것.
이 장에서 다룬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훈련의 규칙이 아니다. 훈련이 시작되기 위한
환경 정리에 가깝다. 이 환경이 갖춰지면
고독은 스스로 다음 질문을 밀어 올린다.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어떤 생각이 항상 먼저 튀어나오는가.”
“어떤 감정이 판단을 앞지르는가.”
이 질문들은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다.
사람을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그저 관찰의 방향을 만든다.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독은
훈련으로 전환된다.
훈련이란 무언가를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반복 속에서 자기 작동 방식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은
이 알아차림을 우연에 맡기지 않는 방법이다.
생각이 어떻게 시작되고,어디서 왜곡되고,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지를 구조로 보는 방식이다.
고독을 견딘 사람이 아니라,고독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구조.
다음 장에서는
그 구조를 차근차근 펼쳐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