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물린 톱니마냥 쌓인 역사의 무게

- 보은 삼년산성에서 역사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읽다. -

by 도시백수

제목은 그럴싸하게 붙였지만, 이번 글에서는 힘을 빼야겠다. 목적의식이라고 해야 정확한 걸까. 최근 여행기들은 목적이 있었다. 브런치스토리에 올림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여행 기사로도 송고하는 것. 그런 목적은 글을 좀 더 잘 써보려는 의지를 고양시켰다. 동시에 내 글을 좀 더 멋있게 보이려 애를 쓰게도 만든다. 멋있게 보이는 것이 그리 큰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 인위적임에서 오는 마음속 꺼림칙함이 있긴 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기는 지금 내 머리와 가슴에서 바로 전해오는 이야기들로만 채워보려 한다.


10월 29일, 가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니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면 그냥 그랬지만, 달리기 시작하면 겨울이 맞았다. 남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집으로 복귀하는 날이기도 하다. 전날 묵었던 임실의 숙소를 떠난 것이 오전 8시쯤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충북 보은에 도착했다. 참 오래도 벼르던 삼년산성에 올라보기 위해서다.


보은 시내를 바라보고 동쪽에, 남북으로 긴 산의 능선 중간을 한 토막 잘라내면서 삼년산성은 구축돼 있다. 능선 아래 계곡 입구에 정문 격인 서문을 두고 능선의 맨 위까지 좌우로 길게 성벽을 둘렀다. 길이가 1.6km에 이른다고 했다. 성 안의 모양은 서쪽으로 기울어진 깔때기 모양이다. 덕분에 가장 낮은 서문에서 성 안이 대부분 보인다. 처음엔 그 1.6km란 길이가 실감 나지 않았다. 어릴 적 군 생활 할 때의 기억을 복기해 보고서야 이 면적에 주둔할 병력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처음엔 좁아 보이던 성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넓어져만 갔다. 잘하면 1개 연대 정도는 충분히 주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문으로의 접근은 산자락에 바싹 붙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 즉, 산길에 들어서면 성문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적군이 이곳으로 들어온다면 머리 위로 무수한 바윗덩이와 화살이 쏟아졌을 것이다. 겨우 그 세례를 뚫고 성문에 닿는다 한들, 그 성문은 엇갈리게 쌓고 바로 오를 수 없게 만들어 두었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동남북 세 곳에 있는 성문 구조도 마찬가지인데, 사다리를 타고 오르게 만들고, 내부 옹성을 두는 등으로 실로 적군이 들기 어려운 구조로 만들었다.


삼년산성이 만들어진 때가 신라 자비마립간 13년(서기 470년)이라고 했다. 당시 삼국 중 발전 속도가 가장 늦었던 신라였다. 성을 만드는 기술도 인근 고구려나 백제보다 떨어졌을 것 같은 이미지다. 그런데 삼년산성을 보고 있자니 성 쌓는 솜씨만큼은 삼국 중 제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랜 내전으로 방어용 성 쌓기에 있어 가장 발전적 형태를 갖춘 일본 성에 보이는 특징들이 이곳에서도 보이니 말이다. 적의 진입을 최대한 저지하는 동선, 사방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입체적인 성벽 구조, 성의 내부로 적이 진입해도 유리한 고지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배치와 자연지형, 서문 바로 안쪽의 인공 연못까지. 당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어와 공격 요소를 구현해 놓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함락된 기록은 단 한 번뿐이다. 그것도 외적의 침입이 아닌, 내란 과정(신라 김헌창의 난)에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도 이 성에 도전했다가 여지없이 패배하고 말았으니, 그 방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도 하겠다.


서문에서 북문 쪽으로 가는 길은 오르고 내리는 길이 막혀있다. 남문으로 이어진 성벽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성벽 위를 밟을 수는 없고, 그 아래 탐방로를 따라가면 된다. 설령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다 해도 올라가고 싶지 않다. 밖에서 보는 높이도 최소 10m 이상으로 위협적이고, 안전시설 하나 없는 날것의 성벽은 안쪽에서 봐도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보통 성벽은 바깥은 돌로 둘러도 안쪽은 흙으로 쌓는 방식이 많은데, 삼년산성은 알짜로 돌이다. 큰 돌을 성큼성큼 쌓은 것도 아니고, 고양이나 작은 개 정도 크기의 납작한 돌을 가로로, 세로로 쌓아 두었다. 그래서 더 촘촘하고 단단한 느낌을 준다. 동원된 수많은 사람들이 혼자 혹은 둘이 들 수 있는 무게의 돌을 삼 년 내내 끊임없이 쌓았을 모습이 상상된다. 차라리 큼직한 돌이라면 어찌 저 무거운 것을 당시 기술로 쌓았을까 신기해하면 끝인데, 이곳의 돌은 오히려 작아서 뼈저리게 현실적이다. 내가 저 돌 하나하나를 나르고 쌓는 상상이 너무도 쉽게 실체감을 갖게 만든다.


남문을 지나 동문에 이르기까지도 그 모습에는 변화가 없다. 언뜻 보이는 성 밖은 접근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고, 성안에서 보는 성벽은 단단히 물린 톱니마냥 빈틈이 없었다. 돌의 색은 때론 하얗고 때론 검었다. 다듬은 듯, 다듬지 않은 듯. 저 돌은 어디서 다 가져왔을까.


기술했다시피 당시 신라의 국력은 삼국 중 가장 약했다. 비록 광개토태왕과 장수왕대의 침공으로 백제의 힘이 약해졌다 해도, 신라보다는 우위였다. 그리고 장수왕은 호시탐탐 신라도 노리고 있었다. 그런 신라가 보은 땅에 이런 대단한 성을 쌓을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설명들이, 신라의 대외 진출 의지가 이런 성을 쌓게 했다고 하고 있다. 이곳을 발판 삼아 백제를 노리고, 한반도의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큰 그림 하에 쌓은 성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아닌 것 같다. 이곳을 쌓게 된 근저에는 공포가 있었다고 본다. 그것도 거대한 국가적 공포감 말이다. 옆 나라 백제가 당하는 것도 보았고, 광개토태왕 시절 이래 마치 고구려의 속국처럼 지내온 신라였다. 어쩌면 나라가 영원히 망해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딱 이곳 안으로는 결코 적을 들이지 않겠다는 절박함의 구현으로 내게는 보인다.


그런 거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연인원 150만 명이 동원됐다는 삼 년 성 쌓기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다. 외부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 용이라면 이처럼 한 땀 한 땀 쌓을 것까진 없지 않았을까. 나라가 영원히 망해버릴 수 있다는 그 거대한 공포심이 돌 하나를 들어 올리는 팔들을 하루에도 수천 번씩 다시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그 공포심 덕분에 적에게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괴물 같은 성이 탄생했고, 1500여 년이 넘은 세월을 견뎌내고 오늘도 이렇듯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나 역시 일종의 공포감을 바탕으로 삶을 영위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친다. 아니 우리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이들은 모두 그런 것도 같다. 자칫 밀려나고 도태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적어도 취학 연령 때부터 받아왔던 우리들이다. 원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의 삶도 여전히 그런 것 같다. 아니 그렇다. 하지만 이제 그 공포심이란 것을 좀 멀리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으니 기대는 한다. 신라도 결국 그 공포심을 이기고 삼국 중 최종 승자가 되었지 않은가.


동문지에서 성벽 탐방을 끝내고 계곡을 따라 다시 서문 쪽으로 내려왔다. 그 내려오는 경사지를 따라 계단식으로 농경지도 조성했을 것 같다. 우물도 있고, 연못도 있으니 물도 풍부했을 것이다. 다 내려와 서문 앞에서 몸을 한 바퀴 빙 돌려봤다. 성돌 하나, 성벽 한 켠, 저기 서 있는 나무, 바로 옆 바위 둥치(신라 최고 명필 김생이 썼다는 아미지-娥眉池-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하다못해 발밑의 흙까지. 천 년 넘는 세월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나흘에 걸친 여행이 끝났다. 이제 보은에서 서울까지 마지막 긴 길을 가야 한다. 중간에 들를 곳은 없다.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집이라는 공간이 가장 그리운 곳으로 바뀌고 그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이다. 어서 빨리 가자. 오토바이 스로틀에 힘을 준다. 등 뒤로는 오래 묵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성벽이 또 홀로 천 년을 지낼 것처럼 서 있었다. 백미러 속 성벽이 웃는 듯도 하고, 또 무심히 날 외면하는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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