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2015년,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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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을 당시 아이의 표정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절정에서 쑤욱 내려오기 직전의 그것과 닮았었다.
할아버지의 품에 폭 안겨 있는 아이에게는 아직 그가 큰 세상일 거라 짐작하며 셔터를 눌렀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무서워 실눈을 뜨고 두 턱이 되었지만 그래도 크고 따뜻한 품속에 있기에 든든함을 가진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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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다시 못 찍을 것 같은 사진이 있다.
두 번 다시 못 만날 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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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마음 가는 대로 할 수는 없지.
내 마음이 중요한 만큼 그대의 마음도 중요하니까.
때론 자물쇠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징역을 견뎌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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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은 빠른데 자꾸만 멈춘다.
앞만 보고 걷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누가 보여주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난 항상 그랬다.
그게 나였구나.
장미가 저렇게 생겼듯 난 이렇게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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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를 누르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의도치 않게 담긴 바람은 내게 생각지 못한 결과물을 선사했다.
생뚱맞은 사람과 비밀을 공유할 때가 있다.
생각지도 못한 유대감이 생기곤 하는데 그게 참. 묘하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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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으로 통하는 철제 사다리는 바닥에 발이 붙어 항상 서 있어야 했다. 그에게 가장 부러운 사다리는 언제나 그늘인 벽 한쪽에 누워있는 나무 사다리였다. 어두컴컴한 곳에 모로 누워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물건들의 저장소로 전락한 나무 사다리는 낮엔 햇빛을 보고 밤엔 별빛을 보며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철제 사다리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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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당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부터 느꼈다. 나와 굉장히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 역시나 알면 알수록 그대는 나와 많은 부분이 닮았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우린 항상 가까이 있었고 손 뻗으면 닿을 수 있었는데 이리저리 엇갈려 왔다는 것도 예상한 듯 놀랍지 않았다. 그때 왜 거기 오지 않았냐고, 그때 왜 그걸 하지 않았냐고 서로에게 답답함을 호소 한다한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금에야 만나서 안타깝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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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내내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두어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어릴 땐 차비를 아끼려고, 나중엔 걷는 게 좋아져서 주구장창 걸었더니 내 다리는 어느 부분을 어떻게 만져도 딴딴 그 자체.
어깨가 아프고 체력이 약해도 다리가 날 지탱해주는 걸 매일 매 순간 느낀다. 생긴 건 곱지 않지만 고맙고 소중한 나의 지지대.
풍란에 꽃이 핀 지 일주일. 지지 않고 줄곧 활짝 피어있어 방안에 향기가 가득하다. 뿌리가 드러나 있어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썩 예쁘지 않은데 생긴 모습 그대로 제 할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 꼭 내 다리 같다.
나도.
너처럼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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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짤막하지만 재미있어서 얼른 써두고 싶었는데 일하는 중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카페 알바를 마치고 퇴근했으나 카페에서 떠오른 이야기니까 그 자리에서 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시 들어가 사장님께 손님처럼 인사하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좋아하는 창가 자리에 앉아 글을 휘갈겼다. 사장님은 처음엔 비웃다가 글 쓰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는 일할 때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해보라고 농담 반 진담 반 날 나무랐다. 커밍아웃을 한 것마냥 민망했지만, 글 쓰는 모습이 열정적이라는 말에 기분이 썩 괜찮았다.
모두들 말한다. 세상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없다고.
그래도 나는 왜 안되냐고 묻고 싶다.
어머니는 그러셨다. 내가 네 살 무렵부터 철이 들어 애늙은이 같았다고.
그러니 나는 더 이상 철들지 않고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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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선 도로 건너편을 지나가는 너를 봤다. 코앞에 있는 간판의 글자도 선명히 보지 못하는 나의 눈은 5년 만에 멀찍이서 마주한 너의 얼굴과 걸음걸이를 분명히 알아봤다. 내 몸의 모든 신경세포가 너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반응하는 걸까. 나는 느꼈다. 너 역시 나를 알아보고 멈칫했다는 것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렇게 우린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다. 한때 나의 뜨거운 사랑이었던 너를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오로지 앞만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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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차를 끌고 나오는 너의 모습을 보았다. 온몸이 돌처럼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 이삼 초 간 커진 눈으로 멈춰 서 널 본 것 같은데 그 이삼 초 동안 너를 제외한 모든 세계가 멈춘 듯했다. 머릿속엔 잊고 지냈던 너와의 만남과 이별이 스쳐갔고 '설마 닮은 사람이겠지'라는 호기심에 난 더욱 뚫어지게 널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말 너라는 걸 안 순간 뒤로 돌아 냅다 뛰었다. 네가 나를 보지 못했기를 바라고 바라며 왔던 길을 고스란히 돌아가서도 난 안심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헷갈렸다. 네가 맞은편에서 차를 끌고 나와 왼쪽 길로 갔는지 오른쪽 길로 갔는지. 내가 본 너의 옆모습이 왼편인지 오른편인지. 채 다섯 시간이 안 된 지금도 모르겠다. 도무지 선명하지 않다. 뚜렷하게 떠올리려 할수록 기억이라는 녀석은 왜곡되어 날 약 올리기만 한다. 이렇게 너는 다시 한번 날 떠나가는가. 자꾸자꾸 너를 떠올리려 노력하면 내 머릿속의 네가 허상이 되어 사라질까 두렵다. 가슴속에만 남아 기억할 수 없는 아픔에 더 괴로워질까 봐서. 너 때문이 아니라 날 위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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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되었을 때 각자의 옆에 아무도 없으면 결혼하자던 오빠가 있었다. 한때는 서로를 솔메이트라고 부르며 오글 모드로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 지독히도 엇갈렸다. 요즘 말로 하자면 썸을 타는 관계였다.
연애가 아니라 결혼. 그것은 우리가 어렸고 서른이 엄청난 어른인 줄 알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서른을 눈앞에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설명하는 숫자만 바뀌었지 난 그대로다.
그 서른이 나의 서른인지 그의 서른인지 갑자기 궁금하네.
어제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난 뒤로 줄곧 깨어 있다.
평소엔 한 번도 떠오르지 않은 것들이 비를 타고 내려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나쁘지 않다. 이런 시간도 필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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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도 벚꽃 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만큼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어.
아직도 내가 어른이되 어른이 아닌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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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랑=첫사랑. 그러나 억지를 좀 부리고 싶다. 그간 사랑했던 사람들과 처음 사랑에 빠진 모든 순간이 첫사랑이라고. 모르던 누군가를 만나 나를 여실히 보여주고 그의 세계에 뛰어드는 일은 몇 번째 사랑이건 그 사람과는 매번 처음 겪는 일이어서 예측도 계산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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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밤을 꼬박 새웠다.
구름 위를 떠다니듯 몽롱하고 어지러운 밤이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어떤 생각에 잡아먹힐 때쯤 아침이 되었다.
날이 밝은 것은 다행스럽지만 비가 온다.
예민이 극한에 다다른 나에게 비가 내린다.
망상에 가까운 모든 생각이 씻겨 사라지길 바랐으나
비는 또 다른 그것을 몰고 와 날 잡아먹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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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신만 알며 다른 이의 기분 따위는 깡그리 무시했다. 내가 우는 것도 싫어했고 웃는 것도 싫어했다. 당신 앞에서 난 가면을 쓰는 방법을 알았고 어느샌가 다른 사람에게도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나를 발견했을 때 깊은 절망을 느꼈다. 그저 밉고 싫었다. 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해 달라고, 내 인생에서 제발 좀 사라져 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만 당신은 끝없는 굴레가 되어 날 더욱 휘감아왔다. 여전히 당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런 당신이 불쌍하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세상에서 자신만 옳다고 여기는 당신이 참으로 안됐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에 진심 어린 말을 해 줄 사람 하나 곁에 없는 당신이,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에 어느 누구의 사랑도, 심지어 스스로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당신이 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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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부터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성큼성큼 다가온 당신은 대뜸 날 진희라 불렀다. 아니라고 하자 모른척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소용없다고 내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지나가던 중년부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당신의 눈이 날 그녀로 본 건지 당신의 기억이 왜곡된 건지, 혹은 그녀와 내가 정말 닮은 건지. 절박해 보이는 눈빛이 당분간 내 곁에 머물겠다고 한다. 그것까지 막을 순 없어 고개를 끄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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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앉았다. 뒤이어 여중생 네 명이 꺄르륵거리며 타고는 내 옆으로 쭉 섰다.
그래 걔가 일케 일케 내를 잡았다이가
니도 봤제 봤제 니 내 뒤에 있었던 거 맞제!
힐끔 보니 이렇게 이렇게 팔을 잡고 어깨를 살짝 만졌단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아. 귀엽기도 하지. 하루 종일 무기력하고 웃음기 없이 좀비처럼 퀭해있었는데.. 듣기만 해도 힐링. 아이들의 밝음과 설렘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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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만둔 지 팔 개월이 넘어간다. 다시 와서 일해줬으면 좋겠다고, 모두가 날 그리워하고 있다고 했다.
다시 갈 생각은 없으나 마음은 이미 그곳에 다녀와서 고마움과 애틋함으로 넘치게 차올랐다.
가볍지 않고 묵직해서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사람이고 싶었다.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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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단상들을 잡아보려 보이지 않는 나의 우주로 빨려 들어가던 어느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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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만큼 진통제에 의지하는 나날들. 오늘은 그 정도가 특히 심해서 자주 안 먹는 아니, 자주 먹으면 안 될 약을 두 번 털어 넣었더랬다. 꿈결인지 구름 위인지를 둥둥 떠다니다 하루가 갔다. 카페에서 컵을 하나 깼고 컵에 있던 막 담아낸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화를 내듯 내 몸을 덮쳤다. 깨진 컵 조각을 마구 집었는데 손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손님께 미안한 마음과 함께 나 자신이 안쓰러워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고, 떠다니는 정신을 부여잡고서 일을 마저 했다. 그러나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면 병이 되므로 오늘 안에 울 것을 숙제처럼 떠안고 퇴근을 했다. 긴장이 풀리자 눈물이 펑펑 났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지나갔다. 보고 싶었지만 이런 모습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그토록 기대했건만 왜 하필 지금인가. 하늘이 말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내 눈앞의 세상은 온통 비에 젖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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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를 한 잔 마셨다. 아, 그전에 게보린을 삼켰다. 약 일주일 째다. 매일 오후 네시쯤 머리가 아파온다. 끝도 없는 마른장마가 나의 머리와 어깨를 짓누른다. 참아봐야 소용없음을 알기에 시작되려 하면 바로 약을 먹는다. 내가 사는 법이다. 그래도 괜찮지 않아서ㅡ처음 하루만 괜찮다, 늘.ㅡ 에라 모르겠다 맥주를 샀다. 안주로 치킨팝도 샀다. 당초 그럴 작정은 아니었다. 포카리스웨트를 마시면 좀 나아지겠거니 하고 간 마트에서 급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해 보지 않았다면 말을 마시라. 빈 속에 진통제를 먹고 얼마 안 있어 진통제만 있는 여전한 빈 속에 알코올을 채워 넣는 일. 죽는 것 아닌가 싶다가도 어차피 당장 아파 죽겠는 마당이니 아무 상관없는 모험 같은 이 순간을 당신은 아는가. 애정 어린 잔소리와 걱정, 진심 어린 위로라 해도 당장은 넣어 두시라. 싹 사라진 건 아니지만 취기 뒤에 살짝 숨어 잊을만하면 빼꼼히 고개 내미는 고통을 깔짝거리며 놀릴 수 있는 지금을 나는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즐길 테니.
어릴 때 그는 개망나니 같았다. 허구한 날 어디가 아파서 술을 마셨고 잠을 잘 자려고 술을 마셨다. 마시는 거야 상관없었지만 술에 취한 그의 행동은 씻지 못할 상처로 엄마와 언니와 나의 가슴에 남았다.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아도, 아무리 사람이 변하고 변했다고 믿어도 흉터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짜증 나게, 이제 와서 그의 심정을 알겠다. 머리가 아파서, 어깨가 아파서 알코올의 힘을 빌리는 내가. 참으로 어이없지만 당신이 이해가 된다. 술에 취한 당신의 행동은 여전히 싫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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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냄새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 여자와 담배 없이는 못 사는 남자가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반했다. 그의 담배냄새마저 향긋하게 느낀 여자는 여전히 사랑을 정의 내릴 순 없었지만 사랑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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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널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약간의 탈선과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불현듯 내게 온 너는 때론 장미로 때론 어린아이의 해맑은 미소로 묵직한 아픔과 오르가슴을 선사했다.
너를 잊고 나마저 잊을 때에야 너는 비로소 내게 온다는 것을,
그렇게 내 안에 들어와 온 힘을 다해 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오랜 세월 동안 가르쳐주고 있던 너를 알아보지 못한 나는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목놓아 울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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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보를 썼다. 약 두 시간 동안 탄생 시점부터 11세까지를 쓰다 힘들어서 내일을 기약하며 일단 멈췄다. 태어난 것 말고는 특별히 한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웬걸, 끝도 없다. 대단한 일은 없지만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았던 옛날을 기억해보니 대단하지 않을 것 또한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니까. 나는 나밖에 없으니까.
진짜 진짜 오랜만에 기억해 낸 일.
하나,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지 않아 인큐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다. 모두 벙어리로 결론지었는데 부모님의 밤낮 없는 기도로 며칠 뒤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 기적으로 결론지었다고 한다.
둘, 초등학교 6년 동안 해마다 일기 쓰기와 독후감, 각종 쓰기 관련 상을 받은 걸로 보아 적어도 여덟 살 때부터 글을 좋아한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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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기 시작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좀 전에 마저 읽었다. 먹먹하고 먹먹하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은 단춧구멍만 해지고 코는 꽉 막혔다. 제제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머리가 아프도록 울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내 인생에서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 선생이라는 사람들은 다른 아이들과 날 차별했고 무시했지만 그 선생님만은 날 보듬어주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차에 태워 전국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데리고 가주었다.
부모님이 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챙겨주던 선생님이 선물해준 책이 바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였다. 날 보면 제제가 생각난다며 천천히 읽어보라고 하셨지만 두 시간 만에 다 읽고 엉엉 울며 선생님께 뛰어가 물었다.
선생님 제가 제제면 선생님은 뽀르뚜가예요?
그런 셈이구나.
그럼 안돼요. 뽀르뚜가는 죽잖아요.
대성통곡을 하는 나를 귀엽게 바라보며 안아주던 포근함이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제제로 인해, 그리고 어린 나로 인해
숨이 막히도록 울었더니 차라리 개운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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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 걸 안다. 알지만 깨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이 꿈을 이어가고 싶은데 자꾸 정신이 들려한다. 애써 잠들어보지만 이미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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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좀 많이 아팠다. 실컷 앓고 실컷 자고 개운해진 지금이 좋지만 이 기분을 위해 또 아프고 싶진 않다. 조심해야지. 조심한다고 하지만 고질병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매일같이 다른 곳이 다양하게 탈이 나서 나 자신이 우습다. 그래, 이왕에 맨날 아플 거 내가 다 감당할 테니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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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은 참 못났고 싫은데 말이지 나랑 닮은 사람을 만나면 왜 그리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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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봐도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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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뇌막염에 걸린 동생.
어느 깊은 밤, 어린 화자는 꿈을 꿨다. 본 적 없는 증조부모가 꿈에 나타났는데 그들이 자신의 증조부모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무언가에 화난 듯한 표정이었다. 잠에서 깬 그녀는 저 멀리서 아버지의 성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배경은 일본, 아버지의 이름 역시 일본식이었다.
비틀비틀 일어나 부모님을 깨웠다. 오밤중에 무슨 일인가 하여 부모님은 머슴들도 몇 명 깨웠고, 함께 나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집 마당에서 10분을 걸어 나가야 있는 1m 50cm 높이의 몽뚱한 다리 밑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오다 밑의 개울로 빠져버렸는데 발목을 삐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사람, 그녀의 큰 고모부였다.
큰 고모부는 다른 지역에서 약방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린 조카의 소식을 듣고 힘들게 약을 구해 온 것이었다. 동생은 그 약을 먹고 나았으나 세월이 흘러 결혼 후 첫 딸을 낳고 연탄가스에 질식해 세상을 떠났다. 동생의 딸은 큰어머니의 손에 자랐는데 큰어머니는 그녀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어느 날 또 꿈을 꿨다. 동생이 나타났다.
그래 경미를 채 안아보지도 못하고 가서 마음 아팠지?
그까짓 인생.... 그까짓 인생.
동생은 그 말만 되풀이하다가 꿈결 속에 사라졌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젊은 날의 일이었으나 아직도 생생하고 궁금한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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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미루긴 했지만 잘해보고 싶어서 수정을 거듭하는 중에 오류가 났지 뭐야. 열두 시 안에 메일을 보냈어야 했는데 먹통이던 노트북이 열두 시가 지나니 잘 돌아가서 열두 시 삼분에 보내버렸지.
미루는 건 아주 안 좋은 습관이야. 넌 나처럼 되지 마렴. 우선 어깨부터 활짝 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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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엔 정신을 잃을 만큼 술에 취했다. 그렇게까지 술에 나를 담그는 일은 잘 없는데 어젠 기분이 괜찮아서 아빠와 수작을 했다. 허리가 아파서 소주 한잔, 잠을 잘 자려고 소주 한잔 하던 아빠가 참 이해 안 되고 싫었다. 하지만 어느덧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 장마 기간이면 우리는 혈액순환을 위해 정말 한잔씩 마시고 날이 좋아지면 몸도 가벼워져서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곤 하는 것이다.
상을 치우고 구토를 두 번 하고 이를 대충 닦은 기억이 난다. 찜찜했으나 다시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몇 번을 겪어보니 나는 술에 취하면 잔다. 바로 잠드는데 그 와중에 매일 잠들기 전 하는 일련의 일들을 어떻게든 정리하고 잔다. 헛소리를 지껄인다거나 욕을 한다거나 늦은 밤 뜬금없이 전화를 거는 따위의 지독한 술버릇이 없어 다행이다. 그리고 매번 구토를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스물일곱 살 예쁜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과 몸짓을 지닌 분이셨다. 어느 학생이 살을 빼느라 다 같이 간식을 먹는 시간에 먹지 않고 있자 자신의 경험을 얘기해주었다. 고등학생일 땐 자신도 통통했지만 대학 들어가서 맨날 술 마시고 토했더니 살이 쏙 빠졌다며 말이다. 그땐 저게 선생이 학생한테 할 소린가 싶었는데 몇 번 겪어보니 역시 알겠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고 앞 일을 장담할 수도 없다. 생각을 조심하고 말을 아껴야겠다는 다짐을 문득 한다.
지금 시각은 여섯 시 삼분. 잠에서 깨어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다섯 시 사십오 분경.
열두 시가 넘어 잠든 것 같은데 일찍 깨어났다. 취기가 가시지 않아 머리가 약간 지끈거리고 속이 더부룩하다. 너무 더워서 깬 것 같다. 이불을 보니 밤새 덮지 않은 채 접혀 있고 어제 입은 티와 바지가 내 옆에 나란히 누워있다. 초저녁부터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와 있고 생각 없이 이 새벽에 여기저기 답을 했다. 아차 싶었으나 모두가 깨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저 오징어처럼 좀 더 널브러져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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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큰 어항이 있었다. 어항에는 알록달록 예쁜 금붕어들이 있었는데 한 마리만 검은색이었다. 어느 날 어항 속엔 검은 물고기 혼자 배가 빵빵해져 있었고, 그때 이후로 우리 집 어항은 사라졌다.
이 사건을 줄곧 여덟 살 때 일로 기억해 왔는데 실제로 네 살 때 일이었다는 것을 며칠 전에 알았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옛날이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친구에게 구피 치어를 받아올 때만 해도 기쁨보다 걱정과 불안함이 컸다. 어미가 새끼를 낳자마자 잡아먹는다는 얘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수돗물에 담가놓고 하루에 한 번 눈곱만큼의 먹이만 주면 알아서 잘 산다는 말에 덥석 받아온 지 일주일.
검색해보니 일명 '물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어항에 산소공급기와 여과기, 수초 등을 넣고 수돗물도 받아놨다가 하루 뒤에 넣어주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형부도 물 생활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어서 물어보았더니 문자가 끝도 없이 왔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친구 말대로만 했는데 아주 잘 산다. 무서울 만큼 잘.
이제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세 마리 모두 수컷이어라.
올해 들어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 참 많다. 그중 무언가 살아있는 것을 키우는 일이 제일 새롭고 신비롭다. 베란다 텃밭부터 허브, 풍란, 열대어까지. 엄청 신경을 쓰고 '내가' 키우는 것 같지만 내가 하는 거라곤 어느 정도의 환경만 준비할 뿐, 사실은 다 '지 알아서' 잘 산다는 것도 처음으로 몸소 깨닫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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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하고 꿉꿉한 것보단 훨씬 좋은 맑은 오늘이었지만 더워도 너무 더워서 하루 종일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떼지 않았다.
하늘이 하도 예쁘길래 아파트 복도 창문에 매달려서 몇 번 찍고 누워있기. 밥 먹고 누워있기. 구피(열대어)랑 눈 맞추고 누워있기. 구피랑 눈 맞추고.
지난주에 집을 비운 동안 형부가 와서 어항에 변화를 주고 갔다. 친구들이 떠나고 홀로 외로운 구피를 위해 새우와 물풀을 넣었는데 새우가 무려 스무 마리.
나는 병적인 무언가가 있어서 연꽃과 해바라기를 못 보는 사람, 뉴스에 물고기 떼죽음이나 벌집이 나오면 눈을 질끈 감는 사람이다. 그런데 스무 마리라니. 물풀이라니. 수화기 너머 내가 좋아해 마지않을 것으로 믿고 기대에 찬 형부의 목소리에다 대고 차마 "왜 이랬어요. 징그러워서 볼 수가 없어요."라고 할 순 없었다. "구피 이제 안 외롭겠네요. 고마워요." 하고는 일주일 동안 어항을 못 봤다. 구피 밥도 눈을 감고 줬다.
직접 씨앗을 심어 기른 방울토마토를 맛보니 구피 생각이 났다. 방울토마토의 꼭지가 너무 선명한 별 모양이어서 여러 개가 있으면 그것조차 보기 힘든 나인데 넉 달 동안 애지중지 키워서인지 그저 예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못 볼 것도 아니고 다 살아있는 것들인데 이렇게 유난스러울 게 뭐가 있나 싶어 실눈을 뜨고 조심스레 어항을 봤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일주일 만에 본 구피는 부쩍 자라 생선다운 면모를 내뿜고 있었고 새우들도 나름 여기저기 잘 붙어 있었다.
어쩌면 나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액자 속 그림 보듯 보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을 처음부터 쉽게 좋아하다가 자세히 알면 실망하고ㅡ그 사람이 잘못한 것 없이 나의 기대가 잘못한 것이다ㅡ 나를 보여주는 것이 겁이 나 숨어 버린다. 사물의 예쁘고 깔끔한 것만 보고 싶고 이면에 있는 진짜 모습 앞에선 눈을 감아버리는 것. 사람 사는 세상과 자연을 멀리서만 보고 방관하고자 하는 성향이 이런 병을 키우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의지를 갖고 고쳐나가야지. 당장 아무거나 쳐다봤다간 기절할 수 있으니 조금씩 마음을 다잡고. 예쁜 마음과 예쁜 눈으로 들여다보면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던 엄마의 말씀처럼. 예쁜 마음과 예쁜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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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법 그를 아는 줄 알았다. 어느 정도는 그와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은 내가 아는 그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가 아닌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내가 그를 제법 아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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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면 자존감과 자신감이 충만해지는 약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