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빡빡머리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도 있나?”
거울 속 짧게 자른 동생 머리를 보며 실없는 농담을 했다. 아들 군대에 보내는 엄마 마음이 이럴까. 섭섭한 마음 들키지 않으려고 까슬한 동생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었다.
연구실에서 두 살 어린 옆 반 남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티키타카 농담을 해가며 계란을 까 먹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부장님이 우리 둘을 보더니 꼭 오누이 같단다.
“부장님, 제 동생은 잘 생겼거든요.”
옆 반 선생님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래도 내 동생만큼 잘 생기고 멋진 사람이 없다.
170cm 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우리 집안의 단신 유전자를 꿋꿋이 이겨내고 돌연변이처럼 혼자만 훤칠하게 큰 동생. 중고등학교 시절 한창 길거리 농구에 빠져서 농구 동아리 활동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때 했던 농구 덕분인지, 아니면 농구 후 허기져서 다섯 봉지씩 거뜬히 먹어대던 라면 덕분인지 동생은 키가 181cm까지 자랐다. 키뿐 아니라 눈, 코, 입 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는 미남이다.
내가 동생을 이렇게나 멋지게 여기고 아끼는 이유는 동생의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동생은 마음 씀씀이가 외모 못지않다. 연년생으로 태어나 친구같이 지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동생의 자라는 모습을 보았다. 때로는 친구같이 편안하고 때로는 오빠같이 듬직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평생 서로에게 따뜻한 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매 사이였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 동생과 나는 그런 사이다.
수능을 치고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용돈 벌던 열아홉 살의 동생은 시급의 1.5배를 받을 수 있다며 일부러 힘든 야간 타임에 일을 했다. 야간 교통비까지 받으면 그걸 아꼈다가 햄버거 집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서 한숨 자고 새벽 첫차를 타고 집으로 오곤 했다. 집 가까운 국립 대학교에 등록해 딱 한 학기 대학 생활을 한 동생은 대학물 먹어 봤으니 그걸로 됐다며 스무 살 겨울에 해군 부사관으로 지원해 입대했다. 부사관 월급 받으면 그걸 아껴다 대학교 다니던 나에게 용돈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런 동생 덕분에 돈 걱정 접어두고 대학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얼굴에 여드름이 하나씩 돋을 때쯤, 나는 낡아서 끼릭끼릭 소리가 나는 시장 카트를 끌고 오일장에 가는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했던 할머니는 장날이 되면 꼭 나와 내 동생을 앞장 세워 장터까지 나가곤 하셨다. 짐을 끌어줄 사람이 바로 우리였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할머니는 시장에 널린 군것질거리를 단 한 번도 아무 조건 없이 사주신 적이 없었다. 카트 가득 푸성귀와 생선, 부식 거리를 담은 할머니는 나와 내 동생 손에 카트를 쥐어주며 집까지 끌고 가자고 시키셨다.
장을 보고 집으로 오려면 친구들이 뛰놀고 있는 학교 운동장을 지나와야 했다. 다리를 저는 할머니와 함께 시장 카트를 끌고 그 앞을 지나오는 것은 곤욕이었다. 남몰래 좋아하던 아이라도 마주칠까 봐 할머니는 두고 혼자 학교 앞을 내달렸다. 나의 이런 못된 마음 동생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까지 가는 지름길을 따라 길모퉁이를 도는데 저쪽에서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아이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녹이 슬어 곧 부서질 것 같은 두 발자전거 뒷좌석에 바구니 하나가 줄로 묶여 있었다. 그 안에 무언가를 잔뜩 실은 채 기우뚱기우뚱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순간, 동생이 갑자기 전봇대 뒤로 숨더니 반대편을 가리켰다. 오늘은 먼 길로 돌아가자며 빨리 자기를 따라 뛰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동생을 따라 숨차게 달린 그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아이가 우리를 마주치면 혹시라도 당황할까 봐, 부끄러운 마음이 들까 봐, 일부러 가까운 길을 놔두고 먼 길을 돌아 집으로 가자고 했던 것이었다. 무뚝뚝해 자기 속마음은 한 번도 꺼내 놓은 적이 없었던 동생은 속 깊고 배려할 줄 아는 아이였다.
자기보다 키가 한 뼘은 작은 내가 누나랍시고 놀리고 무시하고 화풀이 해대도, 단 한 번 나를 때리거나 무시한 적이 없던 동생이다. 밖에서는 세상 착한 척하면서 집에 와서는 온갖 신경질을 부리는 나의 부끄러운 민낯을 다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동생은 늘 나를 누나 대접해 주고 존중해 주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동생은 중학교 1학년. 동생 키가 내 키보다 더 커진 이후로 우리는 단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연년생 남매의 흔하디 흔한 말다툼조차 그 이후론 없었다. 다 마음 넓은 내 동생이 져 준 덕분이었다.
갑작스레 엄마의 부재를 겪게 된 우리는 서로가 아프고 슬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엄마’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올 거라는 걸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탁 터놓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견디는 비쩍 마른 아빠와,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늘 한숨만 쉬는 할머니와, 예민하기 짝이 없는 사춘기 누나에게 자기의 힘든 마음까지 보태지 않으려고 동생은 어린 나이에 빨리 철이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딱 한 학기 다녔던 동생의 대학교 1학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길렀던 동생의 머리는 예쁜 곱슬머리였다. 누가 보면 유명한 헤어숍에서 솜씨 좋은 헤어 디자이너에게 펌을 맡긴 것처럼, 내 눈에는 연예인처럼 멋져 보였다. 그런 동생이 고등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짝 머리를 깎고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자기 꿈을 좇아 살기에는 너무 착했던 동생은 마흔이 넘는 지금까지도 성실히 복무하고 있다. 착실히 군 생활을 잘해 동기보다 승진이 빠르다는 동생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을지 헤아려진다. 동생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이게 누나 마음인가 보다.
동생이 자기의 꿈도 펼쳐보지 못한 채, 짧게 머리를 자르고 입대하던 그날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동생에게 아직도 꿈이 있다면, 잃어버리지 말고 간직했다가 꼭 다시 도전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힘듦을 헤아려주고 어루만져주고 누나인 나보다 더 빨리 철이 들어버린 동생에게 사실은 오빠처럼 여기고 마음으로 많이 의지했다고, 고마웠다고. 이제야 이 글을 통해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