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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트 스페이스 Feb 18. 2018

페기 구겐하임@구겐하임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을 나와서 센트럴파크를 가로질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호수 주변을 걸었다. 반 바퀴를 돌 즈음 저 멀리 무채색의 맨해튼 건물 사이로 화이트 색상과 달팽이 모양의 특이한 외관을 한 구겐하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선형 계단의 내부가 독특한 이 미술관은 뉴요커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광객이 찾고 있는 세계적인 현대 미술관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국 뉴욕, 독일 베를린, 이탈리아 베네치아, 스페인 빌바오 등 세계 여러 곳에 있는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자선사업가이자 미술을 사랑했던 솔로몬 구겐하임 Solomon R. Guggenheim 에 의해 탄생되었다. 1937년, 솔로몬 구겐하임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구겐하임 재단을 세웠다. 자신의 소장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1943년 프랭크 롸잇 Frank Lloyd Wright에게 구겐하임 미술관을 의뢰한다. 뉴욕 롱아일랜드 바닷가의 구겐하임 저택을 방문하면 라이트와 구겐하임이 미술관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테라스를 구경할 수 있다. 라이트가 이 디자인 구상을 시작할 당시 70세였으며,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 장장 16년간 매달린 생애의 대작품이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솔로몬 구겐하임이 죽은 지 십 년 뒤인 1959년 가을에 오픈한다. 



솔로몬 구겐하임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형인 대니얼 구겐하임의 아들 해리 구겐하임이 박물관 일에 적극 관여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구겐하임 저택은 벤자민 구겐하임과 솔로몬 구겐하임의 동생인 대니얼 구겐하임의 저택이다. 페기 구겐하임은 예술품에 대한 안목과 풍부한 지식, 그리고 수집한 미술품들이 있었기에 멘토가 될 수 있었다. 마거리트 페기 구겐하임 Marguerite Peggy Guggenheim (1898.8.26-1979.12.23) 은  미국 미술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재벌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녹록치 않았던 삶을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을 통해 위로받고싶어했기에 "예술과 사랑은 내게 자유이자 희망이었고 구원이었다"라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의 예술을 연결하고, 무명의 수많은 미국 예술가를 발굴해 키워내고, 예술가들이 더더욱 예술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그녀의 인생은 그녀가 그토록 감탄했던 예술품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페기는 독일계 유태인 부호 구겐하임 가문의 딸로 1898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구겐하임 가문의 역사는 마이어 구겐하임이 뉴욕 행상인으로 시작했던 18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세기 만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이다. 그의 일곱 아들 중 다섯째 아들이 페기 구겐하임의 아버지 벤자민 구겐하임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여성편력이 심했고, 집을 자주 비웠다고 추억한다. 한 번은 아버지에게 "그럴 바에는 아예 정부를 들이시지요?"라고 대들었다가 식탁에서 쫓겨나 숨어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실제로 벤자민 구겐하임은 1911년 완전히 집을 떠나 정부와 함께 프랑스에 살림을 차렸고, 이듬해 뉴욕 집으로 오기 위해 정부와 함께 타이타닉호 일등석에 승선했다가 침몰했다. 정장을 갖춰 입고 신사답게 죽음을 택하겠다던 그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다루고 있다. 평생 어머니를 외롭게 했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의 사망으로 페기는 정신적 충격을 받고 어지러운 방황을 시작한다. 그때 페기의 나이 열세 살이었다. 예전에 '뉴요커'에서 페기 구겐하임에 대해 다른 기사를 보았는데, 페기는 "저는 아버지의 죽음을 끝끝내 극복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재벌 가문 상속녀였지만 아버지의 죽음 후 페기 가족은 저택을 줄여서 옮겨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서점에서 일을 하면서 책을 가까이했고, 점점 예술에 관심을 키워나간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스물한 살에서야 페기는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게 되고, 그 상속은 그녀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미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들의 후원을 하도록 발판을 마련해준다. 


영국으로 건너간 페기는 1938년 구겐하임 죈느 Guggenheim Junne라는 이름의 갤러리를 열어 전시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이름을 떨쳤지만, 실은 적자였고, 이듬해 6월 문을 닫는다. 1940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뒤에는 몽파르나스의 카페를 중심으로 예술가들과 문인,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예술가적 지식과 안목을 키워나가면서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거트루드 스테인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영화에서는 거트루드 스테인의 실제 모습도 만나볼 수 있다. 거트루드 스테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캇 피츠제럴드, 싱클레어 루이스, 에즈라 파운드 같은 대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또한 멘토이며 비평가였다. 또한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쓰 같은 예술가들에게 교류의 장을 열어주며 예술활동을 지지해주었다. 그런 거트루드 스테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페기의 롤모델이었다. 같은 독일계 유대인이었고, 일찍 부모를 여의었고, 예술에 안목과 조예가 깊었으며, 미국의 예술과 유럽의 예술을 이어준 여인들이었다. 피카소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녀는 그 보답으로 [피카소]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 초상화는 매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걸려있고, 맨해튼 브라이언트 팍에는 그녀가 대모처럼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다.



나치의 유태인 압박이 심해지던 유럽, 페기는 파리에서 작은 아파트를 하나 렌트한 뒤, 전쟁 통에 피난을 가기 전에 소장한 작품들을 헐값에 넘기고 가려는 사람들로부터 미술품을 마구 사들였다. 유태인 성을 가졌고, 외모도 유태인인데 잡혀갈 거라는 두려움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아뇨, 전혀요, 나는 뭔가를 두려워하는 성격은 아니에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전쟁과 나치 독재는 전 세계 예술품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는데, 그 시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영화들도 많다. 또한 페기는 유럽 예술가들의 미국 망명을 적극적으로 도운 다음, 목숨을 걸고 열정적으로 모은 엄청난 유럽 미술품들을 싣고 1941년 여름 고향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맨해튼 57번가에 '금세기 미술관 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오픈해 유럽 미술을 미국에 선보인다. 당시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가난한 예술가들을 발굴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잭슨 폴록이었다. 페기 구겐하임을 이야기할 때 잭슨 폴락을 빼놓을 수 없고, 잭슨 폴락을 이야기할 때 페기 구겐하임은 꼭 등장할 수밖에 없다. 잭슨 폴락의 인생을 담은 영화 [폴락 Pollock] 에는 페기 구겐하임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 두 가지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페기는 자신 있게 그중 하나가 '폴락'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남자들 품에서 구원과 안정을 얻으려 했던 페기는 스물셋에 첫 경험을 했고, 일곱 번의 낙태를 했다. 천명이 넘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남자들 중에는 예술가가 가장 많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어쩌면 작품을 싸게 줄지도 몰라서 같이 잤다"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비평가, 음악가, 문학가도 있었다. 그중에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킷,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존 케이지 등도 포함된다. 페기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첫 남편 로렌스 베일 Laurence Vail 은 폭행을 일삼았다. 인터뷰에서 "베일이 많이 때렸나?"라는 질문에 담담한 어조로 "내 배 위를 걸어 다니기도 했고, 화가 나면 머리에 잼을 처바르기도 하고, 물에 밀어 넣고 머리를 못 들게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첫 결혼은 7년 만에 끝났다. 베일과의 사이에서 두 아이, 신밧드 Sindbad 와 패 이긴 Pegeen을 얻는데, 딸 페긴은 어려서부터 참 힘든 아이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마약중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수십 번의 자살시도를 했다. 결국 마흔 하나의 나이에, 네 아이를 두고 알코올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전남편 베일과 아들 베일은 "당신이 페긴을 죽였어 You killed Pegeen"이라는 말을 했고, 페기는 "가끔 정말 내가 그 아이를 죽였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페기는 "나는 엄마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지를 몰랐다"라고 회상한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페기의 여동생도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맨해튼 럭셔리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두 번째 남편은 1942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 망명을 도와주었던 독일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였다.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달콤한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페기와 이혼한 에른스트는 같은 초현실 주의 화가 도로시아 태닝과 바로 결혼을 하고 애리조나로 떠나버렸다. 페기는 1947년 갤러리 문을 닫고 이듬해 고향인 뉴욕을 영원히 떠나버렸다.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곳은 이태리 베니스였고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그녀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토록 갈망했던 아름다운 작품들과 함께 보낸다. 1979년 여든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자신의 애견들과 함께 베니스에 잠들어있다. 페기가 말년에 살았던 베니스 저택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The Peggy Guggenheim Museum 베니스 분관이 되었고, 베니스 구겐하임 뮤지엄의 가장 볕이 잘 들어오는 곳에는 자신의 딸 페긴 Pegeen Veil 의 영구 전시관을 마련해두었다. 그리고 페기의 소장품 가운데 상당수 작품이 이곳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이 되었다. 폴락,  칸딘스키, 세잔, 샤갈, 피카소, 에른스트, 칸딘스키, 몬드리안, 마그리트, 모딜리아니 등 누구에게나 친숙한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구겐하임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잭슨 폴락 [Alchemy, 1947], [Untitled, 1946], [Circumcision, 1946 



막스 에른스트의 [The Kiss, 1927] 와 프랑스 출신 초연실주의 화가 이브 탕기 [The Sun in its Jewel Case, 1937], 폴 델보 [The Break of Day]



네덜란드 화가 피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의 작품들,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몬드리안은 무명의 잭슨 폴락을 페기 구겐하임에게 소개해주었던 장본인이었다. 



마크 샤갈 [The Flying Carriage, 1913],  [The Soldier Drinks, 1911-1912], [Paris through the Window, 1913]



에드가 드가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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