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루소와 개츠비
토마스 만의 중편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는 시 또는 그림 같은 소설이다. 나는 이 두 소설을 음미하고 응시한다. 오랜 시간 여러 번 반복하여 바라보는 그림처럼 나는 이 두 소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이 두 소설을 몇 마디 말로 압축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사람을 바라보며 충격적인 황홀함을 느낀다.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고 아름다운 이를 떠날 수 없다. - <<베니스에서의 죽음>>
하지만 자신은 그 아름다운 이들의 세계에 동참할 수 없다. 결국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영원히 그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 <<토니오 크뢰거>>
아름다움 앞에 무력한 이는 그 아름다움을 감히 자신이 소유하거나 꺾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경탄하고 도취할 뿐이다. 사실은 그 강렬한 아름다움이 두렵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자신을 노예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취약한 사람들이라고 불러야 할까?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이에 대한 완벽한 은유인 것 같다.
그런데 한편, 어쩌면 이 소설은... 뭐랄까... 통속적으로 잘생기고 예쁜, 부유한 남자나 여자를 좋아하고 동경하는 마음을 뭔가 시적이고 거룩하게 만든 소설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대관절 이게 뭐란 말인가. 만약 내 의심이 맞다면 이 두 소설의 고귀한 느낌은 대체 뭐 때문이지?
루소가 <참회록>에서 상류층 여성을 동경했던 것과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데이지를 열망한 순간 자체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에 다름 아니지 않나? 루소가 좋아했던 여자들과 개츠비의 데이지는 모두 아름답고 부유했으니 말이다. 단지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타지오와 <토니오 크뢰거>의 한스 한젠이 미소년이라는 점이 독특할 뿐(토마스만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나? 루소와 개츠비를 옹호하는 이야기일 뿐 아닌가? 타지오와 한스 한젠 모두 부유하고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루소의 적나라하게 솔직한 <참회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실 침모나 식모나 여점원 따위에 내 마음이 유혹되지는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상류사회의 아가씨였다. 사람들은 모두 제나름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내 마음에 드는 여자는 언제나 그런 타입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은 신분이나 계급에 대한 허영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고상한 얼굴, 예쁜 손, 우아한 옷차림, 온 몸에 감도는 섬세하고 깨끗한 느낌, 옷 맵시와 말씨에 나타나는 그윽한 정취, 날씬한 웃옷, 예쁜 신발, 리본과 레이스, 맵시있게 빗어넘긴 머리, 내 마음을 이끄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얼굴은 비록 예쁘지 않더라도 이런 점만 지니고 있다면, 나는 이 쪽을 선택할 것이다.
p114, 루소 <참회록>, 집문당
이번엔 <위대한 개츠비>의 한 구절을 보자.
그녀(데이지)는 그(개츠비)가 처음 만난 '상류층' 여자였다. 그는 자기 나름의 수단으로 그런 부류의 여자들을 꽤나 겪어왔지만 늘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데이지에게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중략)
그렇게 멋진 집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이 그토록 숨막히도록 강렬했던 것은 바로 데이지가 거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185,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민음사에서 나온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김욱동의 해설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위대한 개츠비>>에 관한 이토록 명쾌하고 탁월한 해석은 여지껏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사랑과 젊음, 재산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일과 여유는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중략)
결국 개츠비와 피츠제럴드에게 데이지와 젤더는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한낱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휴머니스트에서 발간한 토마스 만의 두 소설에 관한 해설 제목이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한 갈망'이다.)
이 작품에서 피츠제럴드는 무엇보다도 환상과 이상의 중요성을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다룬다. 개츠비의 삶을 통하여 작가는 이상이나 환상을 지니는 데 바로 삶의 비결이 있으며 오직 이러한 이상이나 환상만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개츠비에게 부조리한 세계에서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이상과 환상뿐이다. 그런데 그 이상과 환상은 데이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아센바흐의 이상과 환상은 타지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학 시절이나 뉴욕 등지에서 아주 부유한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그(스콧 피츠제럴드)는 그들과 완전히 섞이지는 못하고 관찰자적 입장을 유지했으며(<<토니오 크뢰거>>의 주인공 토니오도 그랬다.), (중략)
댄 코디와 지냈던 이 시절 개츠비의 꿈은 부를 통한 신분 상승이라는 막연한 기대였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서 데이지를 만나게 되고, 개츠비의 꿈은 명확한 형상을 갖추게 된다.
데이지는 개츠비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만난 '멋진' 여자"였고, "흥분을 일으킬 정도로 소망스러운 존재"로서, 그녀는 개츠비에게 자신이 꿈꾸었던 거의 모든 것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센바흐에게 흥분을 일으킬 정도로 소망스러운 존재는 타지오였다.)
개츠비에게 데이지가 그랬듯, 토니오 크뢰거에게는 한스 한젠과 잉게보르크 홀름이, 아센바흐에게는 타지오가 이상이었던 듯하다. 매혹되는 환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상. 그 모든 것이었다.
토마스 만은 문학이 '어떻게'의 문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센바흐에게 타지오, 토니오 크뢰거에게 한스와 잉게보르크, 루소의 상류층 아가씨, 개츠비의 데이지가 모두 결국 어떤 귀족적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라면 말이다. 같은 소재나 주제를 ‘어떻게’ 보여주느냐. 마치 그게 같은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러니까 누군가는 루소의 상류층 아가씨에 대한 취향을 세속적이고 천박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토마스 만처럼, 그 아가씨가 가진 귀족적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황홀해하며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그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가치 있게 여길 수도 있다. 토마스 만의 이 두 소설은 치명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는 일을 고귀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나는 토마스만에게 설득당했다. 문학의 놀라운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