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의 시작과 끝, 나가사키 <하>

일본 vs 포르투갈 / 네덜란드 / 미국

by 마하

전국 시대 2기 실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은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랐습니다. 1587년 규슈 정벌 시 그는 본토인 혼슈와는 달리 급성장한 기독교의 교세에 놀라 기리시탄을 위협 세력으로 간주하고 통치 내내 불안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일본엔 그 교세에 맞게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사제들이 들어와 조직을 갖추고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금교령을 내려 그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신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1597년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끌고 가서 처형식을 거행한 26 성인의 순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표적인 박해 사건입니다. 기독교의 본거지인 나가사키의 기리시탄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1598년 그가 죽음으로 인해 기독교의 뿌리까지 뽑지는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유린한 주범이자 그의 좌장 격인 고니시 유키나카조차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포르투갈 신부를 조선 땅까지 데리고 가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에는 미사를 드릴 정도였으니까요.


3기 실력자이자 전국 시대 최종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으면서 기독교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 역시 히데요시에 이어 1614년 금교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은 그 가문의 쇼군들도 계속해서 기독교를 탄압하며 기리스탄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신자들을 가리켜 국적이라 부를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이를 참지 못한 기리스탄들이 1637년 규슈의 시마바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막부는 12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이를 토벌하고 더욱 강력하게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신도들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동남아로 망명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메이지 시대가 될 때까지 250여 년간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숨은 기독교도를 뜻하는 가쿠레기리시탄(潜伏キリシタン)이라 부릅니다. 1873년 메이지 유신 정부의 실력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서구 국가들의 요구로 기독교 금교령을 해제했습니다.


시마바라의 난 때 기리시탄 반군의 본거지인 하라 성을 공격하는 막부군 (출처, 나무위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Silence)>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에선 배교했다고 알려진 포르투갈인 주교 페레이라(리암 니슨)의 배교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마카오를 거쳐 나가사키에 온 그의 두 제자 신부의 순교와 배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의 마지막 포르투갈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전파하고 노예무역을 일삼던 포르투갈인에게 넌더리를 내어 그들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바로 위에 등장한 나가사키 앞바다에 인공섬인 데지마를 조성하여 그곳에만 모여 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조치를 취한 것이 1634년의 일인데 그나마 3년 후 근처에서 기리시탄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막부는 그곳조차 폐쇄하고 그곳에 살던 포르투갈인을 단 1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인이 떠난 그 자리를 꿰찬 서양인이 바로 위에서 앞에서 등장한 네덜란드인입니다. 그들은 1643년 포르투갈인이 추방되어 비어있던 데지마에 입주를 하였습니다. 나가사키에 데지마라는 인공섬이 지어진 것이 네덜란드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막부에서 요청한 입주 조건은 절대로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국가였지만 네덜란드는 이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과연 역사상 매번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웠던 그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박대하고 추방한 위그노나 유태인을 받아들일 정도로 국가 이익을 앞세웠고, 오늘날에도 서구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리버럴한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포르투갈인은 신성한 포교를 위해 일본에 왔지만 네덜란드인은 돈 되는 장사를 하러 일본에 왔습니다. 포르투갈이 일본에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었음에도 그 땅에서 완전히 퇴출이 되고 네덜란드가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준 두 번째 서양 파트너로 역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같은 장소인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멤버 체인지였습니다.


100년 간 일본을 드나들었던 포르투갈인이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총포와 기독교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나가사키의 명물인 카스텔라는 포르투갈인이 전파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인기가 많은 카스텔라는 포르투갈과 동맹이었던 오늘날 스페인의 주축이 된 카스티야의 빵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도 점점 주식화 되어가는 빵이란 말도 포르투갈어로 이때 일본에 전파되었습니다. 일본어로 튀김을 뜻하는 템푸라(tempura)의 어원도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컵을 뜻하는 콧푸, 보당이라 불리는 버튼, 메리아스, 베란다 등 생활 속 많은 용어들이 이 당시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또한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제들이 들어오며 유럽의 천문학, 의학, 항해술, 인쇄술 등이 자연스레 일본에 유입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문화와 사회적으로는 포르투갈인이 들여온 유럽의 모자, 시계, 안경, 의복 등의 패션과 음악과 회화 등의 예술도 전해져 일본에서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남만문화(南蠻文化)라 부릅니다. 중국에서 남만은 남쪽의 오랑캐를 가리키지만 일본 역사에선 이 시기 남쪽에서 건네진 문화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즉 일본엔 네덜란드 이전에 포르투갈이 있었고, 난학 이전에 남만문화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함선의 도착, '남만인도래도', 가노 나이젠(1570~1616), 고베 시립박물관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의 경쟁자였던 스페인이 종교 이외에 일본에 적극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것은 그 두 국가가 해외 식민지 싸움에서 부딪치지 않기 위해 영역을 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과 사라고사 조약(1529)에 의해서였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자마자 식민지 경쟁국인 포르투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당시 교황인 알렉산더 6세의 중재로 아메리카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선을 그었는데 그것이 조약을 맺은 스페인 도시의 이름을 딴 토르데시야스 조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 서쪽은 스페인이 갖고 동쪽에 있는 남미의 거의 절반인 브라질은 포르투갈이 가져간 것입니다. 그 경계선에 따라 스페인은 이후 북으로 올라가 북아메리카 동쪽인 플로리다와 서부인 캘리포니아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가 1498년 인도에 도착하고 마젤란이 1522년 세계일주를 완성하며 인도양과 태평양 항로를 발견하자 지구 반대 편에 날짜변경선 같은 또 하나의 식민지 경계선이 필요해졌습니다. 그 선 역시 조약을 맺은 스페인의 도시 이름을 딴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엿장수 마음대로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선 서쪽의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그래서 포르투갈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 말레이시아의 믈라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중국의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뱃길을 따라 항해하여 일본에 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계선들은 이후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하고, 그 두 국가의 국력이 쇠해지면서 다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해양강국으로 떠오른 영국이 인정할 턱이 없었겠지요.


오늘날 나가사키시 정경 (출처, 나가사키현 공식 관광 홈페이지)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서양 파트너는 미국입니다. 그들은 1853년 에도 앞바다에 흑선을 띄운지 6년 만인 1859년 네덜란드가 독점했던 나가사키의 상관 데지마의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서양의 배들은 나가사키 이외에 가나가와, 니카타, 효고, 하코다테 등의 혼슈와 홋카이도까지 자유롭게 일본에 직접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미국에 무릎을 꿇은 막부는 그 무능함에 분개한 개혁파들에 의해서 무너지고 천황을 앞세운 메이지 유신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안겨준 그 굴욕으로 인해 그 시기 일본은 서양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19세기가 끝나기 전 근대화를 이루었습니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이라 불리는 106명의 메이지 유신의 주축 세력들은 아메리카호라는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12개국을 돌며 선진 문명을 견학하고 연수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총 22개월의 외유 기간 중 미국에서 가장 오랜 8개월을 보낼 정도로 일본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사절단엔 돌아오자마자 일본의 실권을 잡은 오쿠보 도시미치와 그의 후계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축이 되어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그 힘을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를 침략하는 나쁜 데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으로 참전해 인류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그들을 근대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세 번째 서양 파트너인 미국을 향해 1941년 공습을 감행하였습니다. 타깃은 하와이의 진주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으로 돌아왔습니다. 4년 후인 1945년 8월 9일, 3일 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도 일본이 항복 반응이 없자 미국은 일본에 두 번째 폭탄을 투하해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역사의 아이러니일까요? 또 아니면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뚱보(Fat Man)라 불리는 그 원자폭탄이 떨어진 도시가 나가사키였으니까요. 조총을 전수받아 일본을 최초로 서양화된 무기로 무장하게 한 도시가 더 큰 총으로 무너졌습니다. 나가사키가 원폭 투하의 후보지로 선정된 것은 그곳에 메이지 유신의 영웅인 사카모토 료마의 지원 아래 고향 친구인 미쓰비시 창업자가 세운 군함 조선소와 제철소가 있는 등 일찍부터 근대화된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나가사키에서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는 나가사키에서 끝이 났습니다.


일본의 근대화를 끝낸 최후의 일격, 1945. 8. 9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인 팻맨


하지만 일본은 1945년 항복 후 불과 7년 후 다시 살아났습니다. 맥아더가 수장으로 있던 연합국 최고사령부에서 배상이 아닌 재건을 목적으로 한 전후 처리로 일본을 현대화된 국가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는 가장 먼저 신으로 추앙받던 천황을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1889년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제국주의 헌법을 미국식 민주주주의 헌법으로 바꾸었습니다. 지금도 일본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헌법입니다. 그리고 군대를 제외한 모든 국가 시스템을 미국식으로 개조하였습니다. 그러더니 해체시킨 그 전범의 군대마저 우리 한반도에서 6.25가 발발하고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위험이 커지자 자위대란 이름으로 곧바로 부활시켰습니다. 일본의 근대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일본의 현대화가 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파트너는 또 미국이었습니다.


풋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은 19세기 말 나가사키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서양인이 가장 많이 들락거리던 서구화된 도시였습니다. 게이샤 출신의 어리고 순진한 나비부인 초초상은 그녀와 결혼하고 본국으로 떠나간 미군 장교 핑커튼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과거 우리나라와 베트남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미군이 주둔했던 지역에서 흔히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진심을 믿고 나가사키 시내 언덕 위에 있는 집에서 바다와 항구를 내려다보며 배가 들어올 때마다 가슴을 설레었습니다. 마치 트로이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이타카의 왕 율리시즈를 하염없이 기다린 페넬로페 왕비처럼 말입니다. 그 왕비가 텔레마커스란 아들이 있듯이 그 부인에게도 핑커튼과의 사이에서 난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초초상에겐 페넬로페처럼 돈 많은 남자의 구혼도 있었습니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전설적인 프리마돈나 미우라 타마키(1884~1946), 나가사키 글로버 공원


하지만 3년 후 미국에서 돌아온 핑커튼은 나비부인의 바람과는 달리 본국에서 정식으로 결혼한 여성을 대동하고 나타났습니다. 아.. 그녀의 지난했으나 달콤했던 꿈이 깨졌습니다. 그는 돌아왔으나 나비부인이 그토록 기다렸던 <어느 맑게 개인 날>은 끝내 오지 않은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돌아온 이유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찾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의 결혼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까지 했던 그녀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녀에게 하나 남은 선택지인 죽음을 택합니다. 미국 남자가 일본 여자에게 안겨준 나가사키의 비극이었습니다. 마치 그녀의 이 비극은 나비효과로 증폭되어 50년 후 나가사키가 겪은 큰 비극의 전조와도 같이 느껴집니다. 어디선가 나비부인 초초상의 흐느낌과도 같은 그 오페라의 <허밍 코러스>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https://youtu.be/tK9STHqcl9Y


https://youtu.be/_SIfazpqJfY



* 일본 근대화와 관련해서는 제가 일전에 5회에 걸쳐 기고한 <일본 근대화의 기수>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아니 간략하게가 맞겠네요. 그 글에 네덜란드와 미국에 관한 내용이 적잖이 들어 있어서 이 글은 그 이전 시대에 100년 간 등장한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썼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일본 근대화의 시작과 끝, 나가사키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