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아와 로마
브리튼섬 남부 런던은 고대 로마 시대 그 섬을 침공해 브리타니아 속주를 개척한 라틴족이 세운 도시였습니다. 바다에서 테임즈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으로 진출하는 교통의 요지에 요새를 건설한 것입니다. 당시의 이름은 론디니움으로 현재 첨단 금융가인 시티 지구가 그곳 오리지널 런던입니다. 상대적으로 런던의 테임즈강 서안 버킹검 궁전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지역은 웨스트민스터 지구라 부릅니다.
브리튼섬 중부에 위치한 요크는 고대 로마인이 세운 요새를 북부에서 내려온 바이킹족이 발전시킨 도시입니다. 살기 좋은 남쪽을 침공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그들과 가까운 지역인 요크를 거점 도시로 삼았을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도시라 불러도 이의가 없는 미국 뉴요크의 기원이 되는 도시입니다. 요크는 중세 초기 영국인 7왕국 시절 노섬브리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브리튼섬 북부에 위치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는 그곳이 고지대로 척박한 데다가 사람들도 강인해 외지인이 탐을 덜 냈던 관계로 현지인이 세운 도시입니다. 로마인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간 켈트족의 후예들이 세운 요새가 발전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인은 스코틀랜드를 거칠고 강인한 사람이란 뜻을 가진 그곳 켈트족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칼레도니아라 불렀습니다. 그들 때문에 로마 제국은 브리튼섬 싹쓸이에 실패했기에 스코티시에게 칼레도니아는 매우 영예로운 이름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로마인은 그들이 개척한 식민지인 속주에 많은 도시를 건설했고 그곳에 그들의 문화와 문명을 이식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쇠락과 멸망으로 그들이 철수한 후에도 그것은 남아서 유산이나 유적이 되었습니다. 특히 유적은 건축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로마인이었기에 지금도 그들의 제국이었던 지중해 주변의 유럽과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곳곳에서 과거의 영광을 가늠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오늘날 영국인 브리타니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국 곳곳엔 로마의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습니다.
런던의 대표 명물인 테임즈 강가의 런던 타워는 도버 해협을 건너온 정복왕 윌리엄이 1070년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맨땅에 세운 것이 아닌 로마인이 쌓은 성벽 위에 세웠습니다. 그곳은 말이 탑이지 성에 가깝습니다. 요크엔 요크 민스터라 불리는 커다란 성당 마당에 313년 기독교 공인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당시 서방정제였던 그가 로마 제국의 황제로 취임한 곳이 바로 요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아버지를 도와 속주의 영토를 북방으로 확장 중에 있었습니다. 그 성당을 둘러싼 요크 성벽도 로마인이 세운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와 브리타니아의 국경엔 122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쌓은 120km에 달하는 방벽이 있습니다. 칼레도니아의 저항에 넌더리가 난 로마인이 상호불가침 선으로 그 벽을 쌓은 것입니다. 흡사 작은 만리장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방벽은 오늘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경선과도 거의 유사합니다.
고대 영국의 핫플레이스 바스
그래도 영국에서 로마 시대의 흔적이 완전체에 가깝게 남아있는 도시를 꼽으라면 그곳은 바스(Bath)일 것입니다. 아직도 로마 시대의 기능이 살아있는 유적이 있는 도시이니까요. 바스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200km쯤 가면 나오는 고대 로마의 온천 휴양지입니다. 그곳이 중세, 근세 이후로도 발전하여 오늘날 영국의 유명한 관광 도시가 된 것입니다. 로마인이 그 땅의 지배자였던 시절 바스는 브리타니아 전역에 있던 귀족이나 장교의 핫플레이스였을 것입니다. 뜨거운 온천이 샘솟기도 했지만 그곳엔 목욕과 연계된 체육과 오락 시설 등도 갖춰있었으니까요. 실제 가서 보면 욕탕 이외에 다양한 용도의 공간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2천 년 전 로마인이 지은 온천 욕장인 로만 바스
로만 바스(Roman Bath)라 불리는 바스의 욕장은 지금도 방문객들 앞에서 뜨거운 온천수를 콸콸 쏟아내고 있습니다. 상태도 유적지만 아니라면 텀벙하고 탕에 들어가 온천욕을 즐겨도 될 정도로 온전해 보입니다. 목욕 문화의 대명사격인 수도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은 6세기에 고트족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는데 그들의 식민지인 브리타니아에 서기 60~70년 건설한 욕장은 아직까지도 멀쩡한 것입니다. 과연 목욕이 도시 이름이 되어버린 바스답습니다. 물론 로만 바스는 잉글랜드로 넘어온 이후 시절 몇 번의 리뉴얼을 거치긴 했습니다.
그런데 바스가 그때부터 계속해서 2천 년 동안 온천 휴양지로 명맥을 이어온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 바뀌면서 도시의 운명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욕장을 애지중지한 로마인은 제국의 쇠락과 함께 410년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했습니다. 당시 남아있던 현지인들은 지배자인 그들의 철수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서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로마에 있는 황제에게 청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황제였던 호노리우스의 대답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 먹고 잘 살아라"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로마 제국은 66년 후인 476년 멸망하였습니다. 그만큼 거대 제국을 운영할 여력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 민족은 예외 없이 과거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살기 좋은 브리튼섬도 침공을 하였습니다. 라틴족을 대체한 앵글로색슨족이 그 섬에 들어온 것입니다.
중세 영국에서 식어버린 바스
기독교로 개종한 앵글로색슨족은 675년 바스에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온천탕인 로만 바스 바로 옆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로만 바스는 그 수도원의 부속 건물로 용도가 바뀌었습니다. 과연 금욕과 청빈의 시대인 중세였습니다. 로마 시대엔 벌거벗고 활보하며 휴양을 즐겼던 시설이 엄격한 수도원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다가 훗날 그 수도원은 바스 대성당(Bath Abbey)으로 변신해 문패를 바꾸어 달았습니다. 카톨릭 수도원이었기에 헨리 8세 때 수난을 겪어 폐쇄되기도 했지만 1620년 잉글리시 처치의 성당으로 그간 닫혀있던 문을 연 것입니다. 하늘까지 연결된 야곱의 사다리 부조로 유명한 그 성당은 유럽의 모든 도시가 그러하듯이 바스 올드 타운의 중심가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18세기 초 중세엔 침묵했던 바스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대명천지, 근대의 시작입니다.
바스의 중심가. 중앙에 바스 대성당, 오른쪽 건물이 로만 바스
근대 영국에서 부활한 바스
런던의 귀족들은 잃어버린 도시와도 같았던 바스를 다시 주목했습니다. 로만 바스가 건설된 이후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온천수가 나오는데 18세기 그때도 멈출 리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바스로 요양 겸 온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엔 인플런서 중의 최고 인플런서인 당시 앤 여왕도 포함되어 있어 1702년 그녀는 온천욕을 위해 바스로 향했습니다. 우리 조선 시대에 세종을 비롯한 영정조 등의 왕들이 병약해진 몸을 담그기 위해 온양 온천으로 향하고 그곳에 온궁까지 둔 것과 비슷한 행차였습니다. 이렇게 초상류층이 움직이며 바스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요양과 여행은 과거엔 왕족이나 귀족 등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는데 출현한 순서로 보면 요양이 먼저이고 여행은 나중이었습니다. 여행은 여가선용의 유희라 안 가도 그만이지만 요양은 건강이나 생명과 직결되기에 서둘러 몸에 좋다는 곳으로 떠났을 테니까요. 오늘날 경제 포럼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다보스도 본래는 맑은 공기를 찾는 결핵 환자들의 요양지였습니다. 이렇게 요양을 다니면서 여행과 관련한 교통수단, 용품, 가이드, 숙박 시설과 식당 등 많은 인프라가 발전했을 것입니다. 루비통은 요양이든 여행이든 집을 나서는 상류층을 위해 화려하면서도 튼튼한 가방을, 에르메스는 더욱 폼나고 오래가는 마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말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도로는 더 넓어지고 마차 대신 기차와 자동차가 출현했습니다. 바스는 더욱 발전했고 외지 방문객은 늘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 바스의 획기적인 발전엔 온천인 로만 바스 이외에도 그곳에 새로 지어진 어떤 건축물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2009년에 발간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도 선정된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입니다.
바스의 신흥 랜드마크 로열 크레센트
조지안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 로열 크레센트. 하단은 바스 시민의 공간인 로열 빅토리아 파크 (2024. 7)
1775년 바스의 높은 언덕(Upper street) 위엔 밑에서 보면 하늘에 떠있는 노란 초승달이 지상으로 내려와 안착한 것만 같은 길고도 아름다운 건축물이 세워졌습니다. 수도인 런던에서도 보지 못한 이국적인 건축물이 지방의 조그만 휴양지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 초승달 건축물은 아래에서 보면 보면 마치 거대한 UFO가 착륙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건축가인 존 우드 부자가 야심차게 건설한 석조 건물로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건축가인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건축물입니다. 이 시기 영국의 건축물들은 당시 왕인 조지의 이름을 따서 조지안 양식(Georgian architecture)이라고 불립니다.
로열 크레센트의 정체는 4층의 고급 타운하우스로 그곳엔 30채의 호화 주택이 붙어있습니다. 건물 앞으로는 그 곡면이 품은 프라이빗한 잔디밭이 있고 그 아래로 바스 주민의 쉼터인 로열 빅토리아 파크가 있습니다. 초승달을 닮은 파사드 뒤편으로는 각 세대의 개별 정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측 옆으로 300m 떨어진 곳엔 존 우드 부자의 또 하나의 작품인 보름달을 닮은 서커스(Circus)라 불리는 원형 타운하우스가 있습니다. 건물 사이 세 방향으로 길을 내고 3채가 동그랗게 중앙을 감싸고 있어 그런 이름을 붙인 듯싶습니다.
로열 크레센트의 앞뒤 모습. 뒤편은 각 세대의 개별 정원. 사진 상단 나무를 에워싼 건물이 서커스 (사진 출처, 네이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근대 영국의 핫플레이스 바스
신전이나 궁전과도 같이 아름다운 로열 크레센트의 출현으로 바스는 일회성으로 한번 가서 온천하고 돌아오는 휴양지가 아닌 정주형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런던의 귀족을 비롯한 상류층이 바스에 체류하거나 살기를 희망했으니까요. 물론 그들이 그러고픈 집은 단연 로열 크레센트였습니다.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것입니다. 실제로 그곳엔 당시 영국의 많은 유명인들이 살았습니다. 퍼스트 하우스이든, 세컨드 하우스이든 그들 눈높이와 기호에 맞게 지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매력 있는 상류층이 언덕 위 로열 크레센트에 거주하게 되니 그 아래엔 그들에게 물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몰려오고 시설들이 들어섰습니다. 마치 과거 일본의 다이묘가 사는 성 아래 마을인 조카마치(城下町)와도 같은 도시 구조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쇼핑 거리로 유명한 밀섬 스트리트엔 당시 웨지우드 도자기 매장을 비롯해 상류층의 의식주를 충족시켜주는 각종 명품 매장들이 들어섰습니다. 런던의 명품 거리인 본드 스트리트의 축소판이 바스에 들어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바스 대성당에서 걷히는 헌금은 오늘날까지 그 성당 400년 역사상 사상 최고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귀족들은 바스에 와서 온천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속성상 유희도 즐긴 것입니다. 그래서 바스엔 당시 최고의 오락인 무도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점점 사교의 중심지가 되어간 것입니다. 로열 크레센트 저택에서 아침을 맞은 그들은 집에서 오전을 보내고 오후엔 로만 바스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곳엔 온천뿐이 아니라 사교의 중심이 된 펌프 룸(Pump Room)이 있었으니까요. 본래는 온천을 하고 영양분이 함유된 온천수를 마시는 곳이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애프터눈 티와 카드놀이 등도 즐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바스 곳곳에 있던 어셈블리 룸(Assembly Room)으로 자리를 옮겨 무도회나 음악회를 즐겼습니다. 정치나 비즈니스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런던과는 달리 온전히 치유와 유희만 있는 아더왕의 아바론과도 같은 바스였을 것입니다.
2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온천수를 쏟아내고 있는 로만 바스의 수원. 앞에 "Work in Progress"라 쓰여있음.
바스의 여인 제인 오스틴
로열 크레센트에서 로만 바스 사이의 언덕을 내려가다 보면 한 유명 여류 작가의 집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오만과 편견>으로 유명한 제인 오스틴의 집입니다. 그 집은 그녀가 20대 중후반 시절인 1801년부터 6년간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제인 오스틴 센터가 되어 방문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근처인 햄프셔에 살았던 그녀의 가족이 왜 바스로 이사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바스는 영국인 모두가 살고 싶은 선망의 도시였습니다. 특히 혼기가 찬 딸들을 가진 부모들은 더 그랬습니다. 어쩌면 제인 오스틴의 부모도 혼기가 찬 여식인 제인 오스틴의 신랑을 구하기 위해 바스로 이사 왔을지도 모릅니다. 언덕 위에 있는 로열 크레센트의 입성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랑을 추구했던 제인 오스틴이었기에 그녀는 바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스에서 옥스퍼드 출신의 매우 부유한 연하의 청년에게 청혼도 받아들였으나 그녀는 곧장 번복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어쩌면 그때 그녀의 머릿속엔 집안 사이즈가 맞지 않아 헤어진 첫사랑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딸에게 충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1805년 그녀가 29세 되던 해에 갑작스레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스를 떠났습니다. 본래 살던 햄프셔로 다시 이사를 간 것입니다. 이사 후 쓴 그녀의 작품인 <설득>과 <노생거 수도원>에선 바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어쩌면 그녀에게 바스는 애증이 서린 도시로 기억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바스를 떠났지만 오늘도 그녀의 집 앞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많은 방문객들이 줄을 서서 다음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 7월 제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바스에서 6년간 살았던 제인 오스틴의 집. 현재는 그녀의 문학 흔적을 볼 수 있는 제인 오스틴 센터
영국 전성기의 판타지 <브리저튼>
현재 시즌 3까지 방영된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브리저튼>에선 귀족의 여식인 과년한 레이디의 집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많은 젊은 귀족남들이 나옵니다. 아름답고 인기 많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브리저튼>은 근대 19세기 초 영국 상류 사회의 사랑과 결혼을 다룬 드라마입니다. 아니 사랑은 아래로 깔려서 덜 보이고 그보다는 결혼이 압도적으로 많이 보이는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거래였으니까요. 사교 시즌이 되면 성장을 하고 사교계에 데뷔하는 레이디들과 그렇게 결혼 시장에 나온 그녀들을 주목하는 젊은 귀족남들은 매우 바빠집니다. 결혼을 만드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이익이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서입니다. 그들 남녀는 서로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에서 빠르게 주판을 튕기며 손해 보는 장사는 피해 갑니다. 서로의 가문에 도움이 되는 최고의 신랑감과 신붓감을 찾기 위해 밀당을 펼칩니다. 금맥에 버금가는 혼맥을 캐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도회는 사교계의 무대이자 공인된 결혼 시장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브리저튼>은 많은 시간을 화려한 무도회에 할애합니다. 의상도 무려 1700벌이나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무도회에서의 젊은 귀족 남녀와 귀족 부인들이 상대를 관찰하는 모습이나 매칭하는 방법은 흡사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카리브해의 노예 시장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서 추문성 가십의 양산은 필수입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수도 런던이지만 그것은 그 시절 바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스에서도 사교 시즌엔 1주일에 두 번씩 무도회가 열렸다고 하니까요. 영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많은 무도회가 열린 도시였습니다. 그렇듯 바스에선 많은 커플들이 탄생했을 것입니다. 위의 제인 오스틴도 어쩌면 결혼할 뻔했던 돈 많은 구혼남을 바스의 무도회에서 만났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브리저튼> 드라마는 바스에서 많은 촬영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귀족의 저택인 위의 로열 크레센트의 모습은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의 화려한 무도회 장면
영국의 살아있는 역사 바스
하지만 바스는 화려한 그 명성을 계속해서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사치와 도박, 무질서와 성적 문란함으로 소돔과 고모라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지나친 향락이 문제가 되며 도마 위에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언론에서 바스를 비판하는 기사들이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상류층은 그들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조용한 휴양지를 찾아서 떠나갔습니다. 화려하고 달콤했던 바스의 골든 에이지와 벨 에포크가 끝난 것입니다. 로열 크레센트에서의 파티는 끝났고, 펌프 룸은 썰렁해졌으며, 어셈블리 룸에서의 무도회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만 바스의 온천수도 현대에 들어와선 목욕과 음용이 중지되었습니다. 위생의 문제점이 제기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스는 지금도 연간 3백만 명이 찾는 매력적인 도시로 영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브리타니아 시절인 고대 영국의 모습과 잉글랜드 시절인 중세 영국의 모습, 그리고 그레이트브리튼 시절인 근대 영국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는 역사적인 도시이니까요. 온천을 못 해도, 무도회에 못 가도 보는 것만으로도 유익하고 즐거운 도시가 된 것입니다. 문학은 보너스입니다. 그래서 바스의 거리를 걸을 때엔 마치 영국의 역사책을 넘기면서 걷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날 그 거리엔 바스 대학교의 가운을 입고 활보하는 학생들이 관광객들 틈에 많이 보였습니다. 지난 7월 제가 그 도시를 방문했던 그날이 그 학교의 졸업식이 열린 날이었나 봅니다. 로열 크레센트 앞 잔디 공원, 바스 대성당 앞 광장, 밀섬 스트리트 쇼핑가 곳곳에서 그들은 시원한 영국의 여름 햇살 아래 왁자지껄 환하게 웃으며 졸업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이후 UK가 된 현대 영국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로열 크레센트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요? 안다 해도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궁금해서 드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도시 바스와 로열 크레센트의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 30채의 저택은 현재 1호 집은 박물관이 되었고, 15호와 16호 집은 5성급 럭셔리 호텔이 되었습니다. 견학과 체험의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27채는 여전히 개인 주택입니다.
250년 전인 1775년 8년의 공사 끝에 입주가 시작된 로열 크레센트의 전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