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솔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바닷가 어디서 짠내를 묻어왔어도 반갑기 그지없다.
한낮에 뜬 해가 지치지도 않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희숙은 연실 땀이 나는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기 바쁜 남편을 보기가 안쓰러워 죽겠다.
"고만 좀 쉬었다가 하세요 여기 냉수라도 한 컵 드셔."
"요까지 거 하길 뭘 쉬었다 해, 후딱 해치워야지."
"고집 고만 부리고 얼른 와요."
더우면 덥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게 뭔 자존심이 상한다고 남편이 마지못해 온다는 투로 걸어오더니 대뜸 딴청이다.
"센스가 빤스구먼. 시원한 동동주라도 하나 챙겨 오지."
"일 같지 않은 일이라며 또 뭔 대낮부터 술타령이에요 술타령이…."
"그래도 맹물이 맨숭맨숭해서 목구멍에 술술 들어가나."
"그건 그렇고 멀쩡한 나무에 구멍을 뚫어두어도 되나 모르겠네요?"
"요정도 나사 구멍엔 꿈쩍도 안 해요 걱정 붙들어 둬요."
부부가 꽁냥이는 소리에 옆집 석열이네 할머니는 궁금했는지 꾸부정한 허리로 걷는 듯 마는 듯 슬금슬금 다가온다.
"어마 이것이 다 모다냐?"
아랫집 할머니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린 공구들과 카메라들을 바라보며 다가왔다
"거시기 이기 다 뭐랑가? 가을볕에 사람 타 죽겄는 디 밭에다 시방 뭘 하는감?"
"어머 형님, 나갔다가 일찍 돌아오시네요?"
"이 나가봐도 뭐 잼난게 없네. 다들 그려서. 근디 이게 다 뭐란가?"
"별거 아니예여 그냥 뭘 좀 방비를 하려구요."
"잉 뭔 방비?"
"고추밭이 아이고 작년도 그러고 재작년도 그러고 암만 봐도 누가 도둑질을 하는지 고추가 심어놓은 게 수확을 할라치면 양이 팍 줄어버리잖아요. 암만 봐도 이상해요. 하다 하다 안 되겠어서 올해도 또 그럴런가 걱정이 되어서요. 여기다가 카메라를 설치하는 거예요. 도둑놈들이 놀라서 그냥 가라고, 호호."
"그랴 어째싼다요? 별별놈의 도둑놈이 다 있네 그랴. 넘에 농사진 걸 다 쎄배가는 그런 나쁜 놈들이 있다요 허그 참 나. "
"그래 말이에요 오죽 제가 부아가 나면 이러겠어요"
석열이네 할머니는 무인카메라를 연신 훑어보는라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거시 전기를 먹는 건가? 전기요금이 많이 나와 불겄네. 시방."
"아니에요 형님 이거 진짜가 아니고 가짜 카메라예요. 도둑놈들 놀라라고 ㅎ ㅎ"
"아 그렁가 가짜여? 워메 가짜가 이리 좋은 놈이 있네 그려 난 진짜베기로 봐 부렀네."
"네 요즘은 진짜가 가짜 같고 가짜가 진짜 같아서 저도 헛갈려요 하하"
"그려 세상 좋아부렀네, 난 들어가 볼랑게 얼렁 싸게 싸게 하소"
"그래요 들어가세요"
남해바다 끝에 이곳으로 귀농을 온 지 5년이 다 되어 가는 희숙은 남편과 단출히 살아가며 재미 삼아 심어 먹을 요량으로 밭을 가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욕심이 붙어 심어 놓은 게 늘어만 가고 이제는 절반은 농사꾼이 되어 버렸다.
나이를 먹어 이제 퇴물이 되어 은퇴하겠다고 내려온 이곳은 좀 마음이 성급했던 것 같았다.
서울과 시골은 나이를 따로 세는 것인지 은퇴한 두 부부는 마을의 청년축에 드는 나이였다.
나이 드신 양반들이 혼자서 사는 집이 대부분이고 내외가 덜렁 둘이 사는 집도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었다.
텃세가 심하면 어쩌나 괜스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텃세보다는 관심이 너무 많은 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남편이 전에 직장이 무엇이었는지, 자식은 뭘 하는지부터 집에 세간에도 하다못해 앞마당에 기르는 풀 한 포기조차도 다 지켜보고 있었다.
적응이 안 되는 일이 투성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직 공무원이었던 남편의 직업을 안심한 것인지 동네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었다. 아니면 성격 좋은 희숙의 살가운 성격도 한 몫하였다. 할머님보다 친근하게 나이 든 치들에게 언니며 형님이며 하며 살갑게 굴다 보니 이제는 오래 산 이웃같이 좀 편안해졌다.
올여름에는 마른장마라더니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맑은 날도 아닌 어중 띤 날들이 계속되니 농작물들이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농부들 마음이 타들어 갔다.
6월, 7월 장마에 비가 좀 오고 나야 8월 9월 볕이 좋아 밭이건 논이건 심어 놓은 것들이 잘 자랄 텐데 올해는 여름에 유난스럽더니 늦은 장마가 왔다.
태풍이 연달아 오고 난 후라 채소 금이 금값이라 서민들이고 장사꾼들도 다 아우성이었다.
밭에서 조금씩 심어 먹는 희숙네야 식구도 단출하여 별걱정이 없지만 고추나 배추는 수확해서 김장을 담가 먹거나 찬을 만들 때 요긴히 쓰이니 신경이 쓰였다.
전원생활이라고 해도 농사일이 어디 손쉽고 고되지 않은 일이 하나 있을 가 싶었다.
더욱이 평생 농사는커녕 화분의 분갈이도 못해 죽인 화초들이 태반이었던 도시 아줌마에게는 처음부터 실패에 연속이었다,
남편은 자신만 믿으라고 본인이 다 알아서 하겠다 하였지만 아무리 봐도 미덥지 못했다.
한다 한다 말은 철석같이 하고 요지부동인 남편을 믿을 수 없어 결국 희숙 씨가 나서다 보니 농사일이 전담이 되어 버렸다.
배추도 심어서 김장을 한다고 했다가 한해를 해보고는 포기한 적도 있었다.
농사가 이력이 붙질 않아 힘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편하게 그냥 남들처럼 세상 편하게 집 앞까지 대령해 주는 절임 배추를 사다가 김장을 담그기도 하였다.
옆집에서 좀 얻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사다가 절여서 하려니 꾀가 났다.
남편도 아들도 절여서 오는 편한 배추를 두고 뭘 고생을 하냐고 해서 두 해를 절임 배출 사다 담가보니 편하긴 편하였다
그러다 작년에 한번 싸다고 산 절임 배추의 실상을 알아버고 말았다
코로나로 온통 난리통인 세상이었는지 어쨌는지, 배추가 올라오기로 한 날이 한참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조금만 기다리라는 문자만 오고 소식이 없어 참다가 화가 나서 배추를 파는 집에 전화를 해보았다.
희숙은 소개로 대어 먹던 절임배추가 계속 늦어 지자 취소를 하든 독촉을 하든 가부간 결판을 내려고 전화를 걸었다.
일을 하다 바쁜지 전화벨이 한참을 울려도 받지를 않았다. 벨소리 열 번을 손으로 꼽으며 안 되겠다 이젠 끊으려 하니 그제야 연결이 된다"
"여보세요 거기 해남농장이지요?"
"여보세요 네 맞는데요"
왠 어린아이가 전화를 받는다.
"아 배추 주문한 사람인데 도착날짜가 한참 지나도 안 와서 그런데 어른은 안 계신가요? "
"네 부모님이 전화를 두고 가셨는데요 배추는 음, 배추 컨테이너가 아직 안 들어왔어요 언제 들어올지 몰라요. 조금 기다리셔야 된데요"
아이는 문의전화가 꽤나 많이 왔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배추배송이 지체된 이유를 알려주고 말았다.
희숙은 어이가 없지만 더 꼬치꼬치 물어볼 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배추값을 환불해 달라는 문자를 보내고 나선 내년에는 세상없어도 직접 배추를 심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웬만하면 직접 길러서 먹으려 노력했다.
세상일이란 게 거저나 싼 거치고 좋은 일이 없었다.
내손이 내 딸이라는 친정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직접 하나하나 챙기는 계기가 되었다.
배추도 배추지만 채소 중에는 고추는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었다.
기르고 수확을 하고 또 말려서 고춧가루를 내기까지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지라 국산은 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몇몇 농산물 중 참기름과 고춧가루는 중국산이 시중에는 국산으로 둔갑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세상이 각박해지니 쉬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직접 수확한 고추를 옥상과 마당에 기껏 태양초로 말리고 난 후에도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바꿔 치는 사기를 당할까 싶어 방앗간으로 가져가서도 자리에 서서 지킨다.
별생각이 없이 길렀을 때보다 고추라는 애물단지를 거둬들이는 일이 고된 것을 알고 나서는 더욱 신경을 더 쓰게 되었다.
매해 얼마나 열렸는지 많이 열렸는지 적게 열렸는지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지 일절 관심이 없었지만 재작년부터 고추가 심은 것에 비해서 예년보다 좀 적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낌새가 보였다.
특히나 작년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채소 금이 비쌌기에 유심 있게 보다 보니 훌렁훌렁 고랑 중간마다 뭉터기씩 고추가 빠진 것이 유독 눈에 뜨였다.
조금씩이야 서리하듯 동네 사람이 따갔나 하고 말았을 텐데 그러기에는 좀 심했다. 올해도 어서 고추를 따고 말려야 고춧가루를 낼 터인데 올해도 또 그럴까 싶어 방비책을 세운다는 게 감시카메라였다.
농사라고 하기에도 뭐 한 작은 밭을 지킨다고 매달 돈을 내는 업체에 카메라를 맡기기엔 부담스러웠다.
서울 사는 아들 녀석에게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깜깜무소식이었다.
결혼한다고 하니 그래도 자식이라 아까운 줄도 모르게 서울집을 처분하고 아파트를 작은 거라도 사는데 돈을 보태 주었다.
아파트 한 채를 받은 아들 녀석은 더 받을 게 없어 그러나 하는 짓이 영 괘씸하기만 하였다. 자주 오지는 못하더라도 연락도 없고 모처럼 엄마가 부탁을 하는데 어찌 저럴까? 얄미운 마음에 준 것도 도로 뺏고 싶었다.
결국은 못 미더워도 남편을 볶아 채서 알아보라 하니 어디서 얻어 왔는지 쓰다가 떼어 논 고물 카메라들을 잔뜩 들고 왔다.
저 고물로 뭘 하려는지 이리저리 설치한다고 씨름 중이다.
"아니 그래도 녹화가 돼야지 도둑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 선이 다 빠진 카메라를 달아 놓으면 뭔 소용이 있어요?"
"허허 참 사람도 기다려 보래도 그러네. 이게 다 생각이 있다니까요. 원래 작전이란 게 고지식하게 하면 무슨 효과가 있겠나? 허허실실 작전이니 걱정 놓으라고. 이게 다 가짜 같은데 진짜 카메라도 두 대가 있지, 있어. 봐봐 다 가짜 카메라구먼 하고 도둑놈이 방심을 하다가 덜컥 찍히게 된다고. 그냥 진짜만 설치해 봐야 도둑놈이 바보가 아니고 카메랄 피해서 훔쳐가지 않겠나 이 말이야."
"어이구 그럴 땐 머리가 잘 돌아가네."
희숙 씨는 말인 즉 듣고 보니 평시에 늘 못 미더운 남편 말이라도 그럴싸해 들린다.
일을 맞춰 놓고 해가 질락 말락 선선해지기 시작하자 남편은 술추렴을 하려는지 이장님 댁이 하는 식당으로 쏠레 쏠레 내려간다.
고생했다고 오래간만에 저녁에 고기라도 굽고 아끼는 술도 꺼내 놓을까 했는데 남편은 이장님 댁 파전과 막걸리가 좋은가 보다.
시골이라도 택배로 없는 것 없이 구할 수 있는 세상인지라 이런저런 요리도 다시 해볼까 싶다가도 남편의 촌스런 입맛을 찾는 모습을 보곤 마음이 싹 사라진다.
혼자 남아 저녁 겸 먹으려다 옆집 석렬이네 할머니와 순이 아줌마가 언덕 위에서 내려오는 게 보인다.
"안녕하세요 어디들 다녀오시나 봐요?"
"저녁들은 자셨어요?"
"어이 먹어야지 어째 나와있는가? 웃동에 재복이네 아들네가 뭘 사놨다고 귀경하고 오는구마"
"네? 뭘 사셨대요?"
" 뭐 별거두 아닌디 잉 냉장고여 냉장고 고거 하나로 뭐시라고 유셀 그리 떤당감 시방 눈꼴이 시어 버려 에고 거시기햐"
석렬이 할머니는 연신 기분이 상하셨는지 씩씩거리신다.
"형님도 냅두시요, 얼마나 좋음시롱 그럴까?"
"얼른 가서 저녁이나 드시오."
" 아직 식사 안 하셨음 저희 집으로 오셔서 구운 빵 좀 드시겠어요?"
"잉 머시라 밥때가 되았는디 빵을 먹으라고?"
"아 빵이요 제가 직접 만든 거라 파는 거랑 달라요 맛있으니 빵 좀 드시라고요. 포도주도 드시고.."
"늙응께 빵이 밥이 돼 간? 밥을 먹어야제"
"아이고 직접 만들었다는데 가서 자십시다. 난 집에 밥도 새로 해야 하는데 형님 싫음 혼자 가소 난 여서 먹을랑께"
"그러세요 입에 안 맞으심 밥도 있어요"
"바깥양반도 있을텐디 시방 우덜이 가도 되나? 거시기 한디..."
"마침 바깥양반 없어요 이장님 전화받고 나갔어요. 거기서 또 한잔 먹고 오나 보니까 천천히 드시고 가셔도 돼요"
팔순이 넘은 석렬이 할머니와 이른 다섯 된 순이할머니에 비하면 희숙은 어찌 보면 딸벌이나 조카뻘 밖에 되지 않은 나이이다.
겨우 환갑이 좀 지난 나이에 처음 이사 와서 같이 어울리는 것이 어려웠다
나이 차이도 차이지만 살던 환경이나 정서가 비슷할 리 없어 매번 곤욕스럽기까지 하였다.
전원생활이라고 한다고 내려온 동네가 외지사람이 모인 전원주택단지가 있는 곳도 아니요 그저 남편 고향이 가깝다는 이유 하나였기에 억지로라도 정을 붙이려 노력을 많이 했다,
서글서글한 희숙 씨는 노인들에게도 싹싹하고 시원시원했다.
퉁명 스러 보이던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에게 얼마 안 가 인정을 받았다.
마을 언니들과 친헤지고 나니 취미 같은 농사일부터 집안팎으로 이리저리 도움 받을게 많았다.
물건을 인터넷으로 구매하거나 쇼핑을 도와주기도 했고, 길러 놓은 농작물이나 과일들을 도매업자에게 밭데기로 거저 넘기는 것을 직접 나서서 서울에 아는 인맥들을 연결하여 팔아주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것들을 귀찮은 티를 내지 않고 도와주니 마을사람들은 고맙기도 하고 희숙 씨 존재가 큰 도움이 되어 주기도 하였다.
도시 출신 희숙 씨는 땅에서 나는 작은 것 하나하나가 먹거리가 되고 밥상에 오르는 찬이 되는 게 그저 신기하기도 했다.
언제 가는 첨 보는 참외김치라던지, 고추소박이나 이름 모를 나물무침들을 얻어먹어보기도 하고 손맛이 짱짱한 남도 할머니들의 음식에 마음을 뺏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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