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정원, 대학원
당신은 학원생인가? 대학원생인가?
학원생은 주어진 공부를 반복하면서
어제보다 성적을 많이 받는 게 목표입니다.
하지만 대학원생은 주어진 공부를 비판적으로 전개하면서
어제와 다른 개념을 습득,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식견을 쌓는 데 공부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만큼 세상은 보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지 않습니다.
대학원은 개념의 정원입니다.
개념의 정원에서 마음껏 공부하면서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안목의 수준을 제고시킬
개념을 몸에 익히는 과정,
그 탐구 여정이 바로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개념 탐구의 여정을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코나투스(conatus)로 시작해봅니다.
코나투스는 자기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일종의 관성입니다.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입니다.
대학원 공부는 코나투스를 찾아내서
그걸 더 강화시키는 공부를 하면서
자기다움을 강화시키는 욕망 탐구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면 즐겁고 신나서 코나투스가 더욱 발현되는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 째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나오는
엘랑비탈(Elan Vital)을 통해
생명이 약동하는 힘을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엘랑비탈에서 엘랑은 도전과 약동을 의미하고
비탈이란 생명을 의미합니다다.
따라서 엘랑비탈은 '생명의 도전과 약동을 일으키는 근원적 힘'입니다.
나를 비약적으로 약동시키는 엘랑비탈,
비탈길이 험난하다고 해도 위험을 무릅쓰고
내 생명의 꿈틀거리게 만드는 그 순간을 찾아
무한 탐구하는 과정이 바로 대학원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알아볼 개념은
마르셀 뒤샹의 '앵프라맹스'(inframince)입니다.
'앵프라맹스'는 '아래'(infra)와 '얇음'(mince)의 합성어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미한 차이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구분하기 힘든 창조물을 지칭합니다.
남자 소변기를 떼다가 샘물이라는 제목을 붙여
예술작품으로 출품했던 듀상의 파격적인 예술적 시도,
예술은 더 이상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의도와 의미를 부여하는 개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화장실에 있던 소변기와
작품 출품대 위에 있는 소변기는
극미한 차이를 지칭하는 앵프라맹스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예술적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대학원 공부도 결국 평범해서 진부한 개념도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을 바꿔서
극미한 차이지만 의미심장한 차이를 지니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탄생시키는 탐구과정입니다.
네 번째 알아볼 개념은
르네 마그리뜨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입니다.
데페이즈망은 익숙한 이미지의 낯선 중첩으로 생기는
색다른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익숙한 이미지이지만
그것을 낯선 방식으로 조합하면
색다른 상상력을 잉태하는 새로운 텃밭으로 변신합니다.
미지(未知)의 세계를 꿈꾸는 이미지에서
미지(未地)의 세계로 달려가는 상상력을 잉태하는 과정,
내버려두면 익숙하지만 특정한 의도로 중첩시키거나
재배치하면 색다른 이미지로 탄생시켜
색다른 세상을 지향하는 상상력을 잉태하는 과정,
그 속에 대학원생의 호기심과 질문이 살아갑니다.
데페이즈망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는 개념으로
레 비스트 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나오는
브리꼴레르(bricoleur)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접목해보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이 나오고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대안이 뜻밖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브리꼴레르는 사전에 계획된 방식을 그냥 따라가지 않고
주어진 매뉴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우발적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해결 대안을 찾아내는
임기응변의 명수, 맥가이버형 인재를 지칭합니다.
대학원 공부는 사전에 기획된 각본대로 앎이 생기는
체계적인 규칙 준수 과정이 아닙니다.
예측불허의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계획된 의도대로 공부가 풀리지 않는 상황이
더 많이 발생합니다.
대학원 공부는 정해진 답보다 답이 없는 상황에서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현답을 찾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연구를 반복하다
우연한 깨달음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마주침의 과정입 니다.
다섯 번째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리좀(Rhizome)은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항상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을 의미합니다.
리좀은 체계성과 계획성보다 우연성과 무목적성을 선호합니다.
브리꼴레르의 우연성처럼
리좀도 다양한 개념과 우발적으로 만나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리좀,
전공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사이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무한 리좀을 양산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대학원에서 마음껏 즐겨야 되는
공부의 즐거움입니다.
여섯 번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힘에의 의지’는 발버둥 치며 성장하려는 의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저기로 가려는 상승작용의 의지,
나에게 없었던 힘을 주는 의지,
나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면서 힘이 되는 의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적 의지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힘이 되는 공부를 하면서
그 공부를 통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
여기에서 만족하는 공부가 아니라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저기로 가려고 발버둥 치며
동료들과 함께 서로에게 힘을 주는 과정이 대학원 공부의 참맛입니다.
일곱 번째, 대학원 공부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
자기 변신을 부단히 반복하며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위버멘쉬(Ubermensch)의 삶을 따라가는 과정입니다.
위버멘쉬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초인이 아니라
지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고 운명조차 거부한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사투하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넘어서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위버멘쉬는 대학원 공부를 통해
자신의 비극적 운명마저도 수용하고 사랑하면서
운명애(amor fati)를 지니고
끊임없이 자기극복을 시도하는 삶의 주연 배우입니다.
여덟 번째, 들뢰즈와 가타리의 같은 책에 나오는
아장스망(agencement)은 영어의 배치(arrangement)가 시사하듯
기존 사물과 사물의 낯선 조합과
우연한 마주침으로 생성되는 흔적과 주름으로
나는 이전과 다른 나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학원 공부는 다양한 개체들이 이전과 다른 배치를 통해
또 다른 개체로 생성되는 무한 반복의 과정 속에서
또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는 즐거운 탐구과정입니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마주친 흔적이나 주름으로 생긴
다중체(multiplicity)입니다.
다중체는 이제까지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흔적과 주름의 역사적 산물입니다.
대학원 공부는 익숙한 주름을 제거하고
낯선 환경에 몸을 던져 배치를 바꾸고
없었던 흔적과 주름을 만들어가는 지난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홉 번째, ‘아비투스(habitus)’는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구별짓기》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아비투스는 특정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행동 체계를 의미합니다.
결국 아비투스란 특정 환경으로 인해
개인 안에 내면화된 사회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막걸리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사회 환경이 막걸리를 능가하는
고급술을 즐길 수 없게 만든 결과입니다.
대학원 공부는 비록 나의 지금 취미와 성향은
내가 처한 계급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구조를 다시 구조화시키는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배우는 성찰과 다짐의 여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 공부를 통해서 도달하고 싶은
공부의 경지는 실천적 지혜로 번역되는
프로네시스(phronesis)입니다.
프로네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회색지대에서
도덕적으로도 옳으면서 윤리적으로도 어긋나지 않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올바르게 행동함으로써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지혜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적 행동,
논리적 객관성에 매몰된 나머지
인간적 실존을 위협하는 편파적 이성,
전문 지식과 기술로 무장했지만
타자의 아픔에 눈감는 재수 없는 전문성에 경종을 울립니다.
대학원 공부는 책상에서 전문 지식을 습득하고
과학적 실험을 통해 객관적인 논리를 훈련하는 과정을 넘어섭니다.
진정한 공부는 비록 개인적인 공부로 자각에 이르렀지만
그 깨달음의 지혜를 타자의 아픔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선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살신성인의 미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 보면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감정입니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입니다.
익숙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푼크툼의 세계로 보입니다.
달리 보이는 것 없이 늘 세상과 일상은
정상적으로 보이고 다가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했던 현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당연했던 세계가 다르게 보이면서
불편한 문제의식을 잉태합니다.
툰크툼의 세계로 보이게 만든
낯선 개념을 습득해서 그저 그렇게 보였던 세계가
다른 자극으로 나에게 각인되면서
깊은 앎의 상처가 만들어집니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8쪽).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나신 황현산 작가님의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말입니다.
진짜 공부는 문학적 시간을 역사적 시간으로 승화시켜
미학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시간의 소중함을 나누는
깨달음의 시간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