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실천적 지혜에게 물어보다
인공지능 시대가 불안한가?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 지성으로 무장하라!
지식으로 지시하지 말고 지혜로 지휘하는 비결,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실천적 지혜에게 물어보다
여러분 요즘에 인공지능 시대가 온다고 하잖아요. 여러분 위협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주장했던 실천적 지혜(phronesis)라는 그 개념을 가지고 여러분하고 같이 한번 또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그래서 인공지능 시대가 불안한가. 여러분. 그러면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개발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기계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영어로는 practical wisdom입니다. 실천적 지혜를 갖추면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지능으로 개발한 지식으로 지시하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지성으로 지혜를 개발해서 지휘하는 시대를 열어가야 인공지능을 비서로 데리고 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실천적 지혜를 포함해서 인공지능이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함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실천적 지혜는 딜레마 상황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에서 습득되는 지혜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인공지능이 여러분한테 화를 낼 수가 있어요. 인공지능이 뭐 일을 시키는데 인간이 이걸 잘 못하면 인공지능이 여러분에게 화를 내면서 여러분을 해고시킬 수도 있는 세상이 다가옵니다. 인공지능한테 잘 보여야 돼요. 인공지능을 대리고 협업하면서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이 잘할 수 없는 분야에 우리들의 노력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공지능과 차별화된 능력을 갖고 인공지능을 비서로 데리고 인간이 하기에 복잡한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를 생각해보기 전에 아리스토텔레스 주변 이야기를 더 해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누군지 아시나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은 플라톤, 플라톤의 스승은 소크라테스입니다. 여러분 소크라테스는 딱 떠오르면 뭐가 떠오르나요? 너 자신을 알라. 네. 달변가예요. 그리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질문을 통해 계속 사람들한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산파술의 대가이기도 하죠.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한테 뭘 가르쳐줬느냐. 플라톤의 철학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우리가 찾는 진리는 여기 있지 않고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의 세계, 저 바깥에 있다는 거예요. 내가 찾는 절대적 기준은 세상 바깥에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플라톤한테 배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전혀 다른 철학을 추구합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플라톤이 이데아,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궁극의 진리를 밖에서 찾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실에서 진리를 찾은 거예요. 이데아는 모든 사물, 사람, 개별자 안에 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 스승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플라톤은 이상주의자지만 이상주의자인 스승한테 배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인 사상가로서 꿈을 꾸게 된 거예요. 라파엘로라는 화가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라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그리스-로마시대와 아테네 시절 활약했던 수학자부터 시작해서 기하학자, 다양한 철학자들이 모두 하나의 그림에 모여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정중앙에 두 사람이 서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누가 플라톤이고 누가 아리스토텔레스일까요?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플라톤은 손가락이 위로 올라가 있어요. 반면에 손가락을 약간 밑으로 내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플라톤이 손가락을 위로 올리고 있는 모습은 바깥 세계에 진리가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과는 정반대의 철학을 추구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지향하는 플라톤과 달리 손가락이 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도 이데아서 내려온 지혜가 아니고 우리라 살아가는 구체적인 상황, 다양한 문제가 공존하는 딜레마 상황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에서 습득되는 지혜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역지사지 입장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지혜입니다
실천적 지혜에 비추어 진짜 전문가가 갖추어야 될, 인공지능이 쉽게 개발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답이 없는 딜레마 상황이자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당장 빨리 의사결정을 해서 바로 실천에 옮겨야 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참고로 판단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요?. 이전 상황에 직면하면 누구를 대상으로 어디서 언제 실천하는지에 따라서 어떤 판단을 내려서 신속하게 행동에 옮기는 방법은 달라집니다. 만고불변의 진리가 우리에게 어떻게 할지를 알려주지 못합니다. 실천적 지혜는 단순히 똑똑함이 아니라 이걸 넘어서는 탁월함을 추구합니다. 탁월함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짜 전문성이 뭘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실천적 지혜라고 생각해본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 보면 우리가 가져야 될 전문성을 한 3가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 에피스테메(episteme)는 ‘이해력’이라고 할 수 있며,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게 만드는 풍부한 배경지식을 갖춘 지적 안목을 뜻합니다. 풍부한 배경지식은 빈약한 배경지식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빈약하다는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에만 집착하여 타 분야에 대한 지식기반이 취약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박한(naive) 좁은 안목, 흔히 논의되는 부분 전문성(speciality)으로 인해 취할 수밖에 없는 단견 또는 억견(doxa)입니다.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는 폭넓은 배경지식의 습득은 넓고 깊이 있는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세련된(sophisticated) 관점을 취할 수 있게 하는 전문가의 근본적 힘(power)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피스테메는 사물의 본질과 원리를 밝혀내는 높은 수준의 정신적인 활동입니다. 이는 어떠한 현상과 대상에 대하여 논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상태이자, 일정한 방식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전제가 분명히 인식되어 있는 상태로서 이론적 앎을 의미합니다. ‘관조적 앎’으로서의 에피스테메는 자신이 굳이 그것을 실천해보지 않아도 한 번쯤은 조용히 앉아서 생각해보면 그 이치를 알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핵심 요소인 에피스테메는 ‘know why’에 해당합니다. 이는 자신이 속한 전문 영역에 대한 know why를 지칭하는 것으로 특정 주제 영역에 대한 과학적 설명, 과학적 이해, 또는 철학적 이해가 에피스테메에 해당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원리를 따져 묻는 것, 자신이 한 행동이나 결과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는 것, 위대한 학문이나 철학의 힘을 빌리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수준에서 이를 설명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테크네(techne)입니다. 예술(art)과 기예(craft)가 결합된 용어인 테크네는 테크닉(technique)에 대비되는 용어입니다. 단편적 기법을 익힘으로 인해 실천이 도구의 정교한 활용 정도로 이해되는 테크닉에 반하여 자신의 일을 통해 질적인 표준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려는 전문가적 실행력이 바로 테크네입니다. 테크네는 제작의 영역에 속하기도 하고 행위의 영역에 속하기도 합니다. 테크네는 인간 삶의 가치나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생산해 내는 것을 가리켰다는 점에서 에피스테메와 구분됩니다. 제작과 행위의 영역 안에서 자신이 만지는 대상과 행위에 대해 성찰하는 힘이 있고 이를 고도화시키려 하는 노력이 충분히 수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문성의 핵심 요소가 됩니다. 만들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되면서 여타의 동물과 차별된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구분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테크네가 노동의 최초의 본질임을 증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기본 조건을 형성해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수많은 반복과 연습은 자신의 실천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일의 수준을 높여갑니다. 고도화된 전문가는 단순히 만들어내고 향유하는 능력을 넘어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써나가는 가운데 고도의 정밀함으로 보통 사람과 구별됩니다. 외과의사의 정교한 칼솜씨나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의 기술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최고 수준의 전문가는 일정 수준의 능력과 감각을 넘어 고도의 정밀함을 동반합니다. 고도의 수준을 가진 전문가는 결국 에피스테메도 고도화되어 균형을 유지하게 되어 남다른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에피스테메와 테크네는 상호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프로네시스는 무엇인가요? 바로 에페스테메와 테크네를 몸에 익혀서 특정한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실천인 건지를 깊이 숙고한 다음에 바로 행동에 옮기는 능력입니다. 실천적 지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병원에 청소부가 병실을 청소합니다. 병실을 청소하는데 그 방에 있던 환자가 잠깐 나갔어요.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에 이 병실을 청소하는 사람이 청소하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들어오자마자 청소하는 사람한테 야단을 칩니다. 화를 내면서요. 여기 왜 청소 안 하냐고. 청소부는 분명히 청소를 했는데 환자분은 청소를 다시 하라는 상황입니다. 이때 보통의 청소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까요? 청소했는데 다시 하라고 하면 아마 화를 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청소부는 이 상황을 숙고합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저 아픈 환자한테 어떻게 행동할까. 깊이 숙고를 한 다음에 청소를 한 번 더 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거예요. 일반적인 청소부는 보통 매뉴얼에 따라서 몇 월 며칠 몇 시에 청소를 했는데 환자가 그 상황을 모르고 야단을 치면 아마 같이 화를 내면서 환자에게 대응했을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는 실천적 지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실천인지를 잠시 숙고해보고 이 상황에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하는 지혜입니다. 청소부는 역지사지 입장에서 환자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그 사람 마음으로 들어가 본 거예요. 긍휼 감을 머금고 환자의 아픔을 숙고한 다음 저 환자를 위해서 청소를 한 번 더 하자고 다짐한 겁니다. 이게 바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는 실천적 지혜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모순을 끌어안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지혜입니다
이런 실천적 지혜를 발휘할 상황이나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기술의 발전을 들 수 있습니다. 복잡하고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건 기술한테 맡깁니다. 인간은 그 사이에 편리하고 편안한 걸 추구하면서 실천적 지혜도 실종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기술은 스마트(smart)해지지만 사람은 스마트한 기술에 종속되면서 점차 스튜핏(stupid) 해지고 있어요.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은 인간적 접촉을 통해 뭔가를 습득하고 공유하기보다 기술적 접속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습득한다. 접촉이 없는 접속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실천적 지혜는 절대로 기술적 접속으로 전수할 수 없다. 두 번째, 삶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삶의 밀도는 천박해지고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각도는 좁아집니다. 모두가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에서 실천적 지혜를 발휘할 기회는 점차 없어지는 게 당연한 귀결입니다. 셋째, 속성재배가 우리 생각을 지배하면서 뜸을 들이고 기다리면서 숙성할 때 탄생하는 실천적 지혜는 없어지고 있습니다. 속성으로 뭔가를 많이 만들어내려는 계량적 사고방식에는 숙성이 들어간 틈이 없는 거죠. 넷째,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이 하기에 불편한 일은 기계에 맡기고 편리한 일만 추구합니다.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어서 쉽게 해결 대안을 찾을 수 없는 불편함 속에서 고뇌할 때 실천적 지혜는 싹을 틔웁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기술적 편리함을 활용해서 효율을 추구하는 나머지 효과 없는 일을 많이 합니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데 조금 투입하고 많이 뽑아내려고 하는 도둑놈 심보가 효율입니다. 문제는 효율은 높지만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원래 하려고 했던 의도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적은 자원으로 최대의 성과를 보려는 노력이 계속될수록 사람의 마음은 피폐해지고 삶은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가급적 빨리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정리하면 접촉보다는 접속이 많아지고 밀도, 각도보다는 속도가 빨라지고, 숙성보다는 속성이 많아지고, 불편한 거보다는 편리한 게 많아지고 효과보다는 효율이 높아지면서 인간적 수고스러움과 애쓰는 과정을 기술이 대체하기 시작할 때 실천적 지혜 역시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복잡하고 힘든 상황에서 깊이 숙고하고 판단하며 실천하는 일이 없어지면서 기술은 스마트 해지지만 사람은 스튜핏 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술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사람은 점차 인공지능이나 기술에게 힘들고 복잡한 일을 맡깁니다. 그 부수효과로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앞으로 인간의 머리의 용도는 3가지밖에 안 남는데요. 제가 오늘 여기 찾아오는데 내비게이션을 틀어놓고 찾아왔을까? 아니면 제 머리를 써서 찾아왔을까요? 내비게이션이 여기 찾아주는데 내가 머리를 썼을까요? 안 썼을까요? 안 썼잖아요. 그러니까 머리의 용도가 불필요해지기 시작합니다. 머리 쓰는 기능을 기계한테 맡기니까 머리의 용도가 앞으로 3가지밖에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첫째, 베개 벨 때 머리가 필요합니다. 둘째, 모자 쓸 때 머리가 필요하고 마지막으로 머릿수 셀 때 머리가 필요합니다. 이외에는 복잡하고 힘든 걸 기계한테 맡기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천적 지혜를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상실되고 있는 겁니다. 실천적 지혜를 개발하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접촉과 접속, 각도와 속도, 숙성과 속성, 불편과 편리, 효과와 효율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보다 빠른 해결 대안을 찾는 접근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노력이 아니라 두 가지 이질적인 속성과 모순을 끌어안고 융합해서 새로운 걸 창조해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기업으로 따지면 품질을 높이고 가격을 내리는 게 과거에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해졌습니다. 여러분, 오늘 강의가 끝나고 집에 갈 때 시원섭섭하시죠? 네. 시원하고 섭섭한 거는 시원한 거예요? 섭섭한 거예요? 시원한 감정과 섭섭한 감정은 한 군데 어울릴 수 없는 양극단의 감정이지만 우리말에는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노력이 바로 양극단을 떨어뜨리지 않고 하나로 통합하는 양자병합(兩者竝合) 또는 양단불락(兩端不落)적 사고입니다.
과일가게 가서 과일 서너 개 달라고 하면 몇 개 줄까요? 3개 줘요? 4개 줘요? 주인아주머니 마음대로 3~4개 중에 선택해서 주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미국 과일 가게에 가서 “애플 쓰리 오어 훠 플리즈(Apple three or four please?), 그러면 주인 아주머니가 똑바로 쳐다보면서 바로 이런 질문을 하죠. 하우 매니 두유 원트(How many do you want)? 당신이 원하는 게 세 개인지 네 개인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해서 말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서양사람들은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이 일상적 습관으로 몸에 밴 사람이라서 사과 서너 개 달라는 부탁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엘리베이터(elevator)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승강기(昇降機)입니다. ‘오를 승(昇)’자, ‘내려갈 강(降)’ 올라갔다가 내려온다는 양단불락적 의미가 포함된 번역입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영어로 올라가는 기계입니다. 엘리베이터라는 말에는 올라갔다 내려온다는 의미가 포함된 말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엘리베이터는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안 되는 기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올라간다는 의미와 내려간다는 의미가 하나로 합쳐져 있잖아요. 실천적 지혜는 이렇게 모순적인 상황에서 두 가지를 끌어안고 최적의 대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발현되는 지혜입니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네 가지 고유한 능력
접속(클릭)과 접촉(터치)은 자꾸 만나야 됩니다. 아날로그적 접속과 디지털 접속이 자주 자꾸 만나야 되고. 제가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아나디지다》라는 책을 쓴 적이 있어요. 아날로그가 있어야 디지털에 꽃이 핀다는 문제의식으로 쓴 겁니다. 아날로그라는 삶의 토대와 근본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디지털만으로는 절대로 꽃을 피울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잘못 착각하면 아날로그 없이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디지털 혁신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여름 땡볕을 맞아가며 땅에 가서 누군가 벼농사를 지으며 땀을 흘리는 고생을 해야, 거기서 생산된 농산물을 디지털로 유통을 할 수 있잖아요. 아날로그적 접촉이 없는 디지털 접속만으로 추진하는 변화와 혁신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증해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실천적 지혜도 딜레마 상황에 직면해서 복잡한 문제와 씨름하면서 다양한 의사결정과 실천적 적용을 하는 가운데 온몸으로 느끼고 깨닫는 감각적 체험과 깨달음의 교훈을 배우지 않고서는 단편적인 지식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천적 지혜에 비추어 찾아보고 그런 능력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에 우리들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인공지능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도 알고리즘으로 질문을 하지만 호기심을 갖고 질문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호기심을 갖고 질문합니다. 특히 동심 가득한 어린아이일수록 호기심을 갖고 질문합니다. 예를 들면 딱따구리가 나무를 찍는 걸 보고 지나가던 아이가 지나가다 생겨서 아빠한테 물어봅니다. 아빠, 저 딱따구리는 나무를 저렇게 찍어대는데도 왜 두통에 안 걸려? 인공지능이 이런 질문할 수 있을까요? 호기심 어린 질문을 받은 아빠는 틀에 박힌 방식으로 대답하면서 아이의 호기심을 사정없이 무시합니다. “딱따구리가 그럼 고무를 찍냐? 당연한 걸 질문이라고 하냐?” 이렇게 얘기하면 아이는 상처를 받는 거죠. 아무튼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능력은 인공지능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중의 하나입니다. 기계는 정해진 알고리즘 안에서 가능한 질문을 하지만 인간은 무한한 호기심을 품고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합니다. 질문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전대미문의 색다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관문입니다. 질문이 바뀌면 관문이 바뀌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뀝니다. 질문은 익숙한 집단의 소속감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진입하려는 용기 있는 결단입니다.
두 번째, 인공지능이 쉽게 할 수 없는 거.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 바로 감수성입니다. 감수성을 기반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감수성은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입니다. 감수성으로 포착되는 측은지심이 있어야 타인의 입장에서 보고 들으며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능력이 생깁니다. 내가 타자의 입장이 되어 직접 해보지 않으면 공감능력은 생기지 않습니다. 머리는 좋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는 책상 똑똑이(book smart)가 문제가 되는 것도 공감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타자의 아픔을. 그래서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고 친정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잖아요. 이건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냥 아픈 부위가 다른 거예요. 그래서 진짜 생각은 여러분 뭔가 잘못했을 때 반성할 때 두 손을 머리에 대고 반성하지 않고 가슴에 대고 반성합니다. 진짜 생각은 가슴이 하는 겁니다. 이건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려운 세 번째 인간의 고유 능력은 이연연상(二連聯想)의 상상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창의력입니다.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한 다음에 그 아픔이 포착되면 그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지 계속 밤잠을 안 자고 아이디어를 이연연상시켜 제안하는 능력이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은 밑도 끝도 없는 뜬구름 잡는 생각이 아닙니다. 상상력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포착된 타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실천 가능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가운데 발현됩니다. 창의력은 없었던 생각을 새롭게 제기하는 발상(發想)이 아니라 익숙한 기존의 것을 낯선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연상(聯想)입니다. 감수성으로 포착된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치유할 수 있을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는 이연연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는 능력이 바로 창의력입니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근간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보는 가운데 떠오르는 연상의 결과입니다. 상상력은 2가지를 연결시켜서 연속해가지고 뭔가를 생각하는 능력.
마지막으로 상상력으로 잉태되어 나온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아이디어가 현실에 구현됐을 때 비로소 세상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는 실천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불굴의 의지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딜레마 상황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뭔가 새로운 게 탄생합니다. 호기심 어린 질문으로 시작,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한 다음,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제안한 아이디어를 몸을 던져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내 몸에 체화되는 것, 이게 실천적 지혜입니다. 인간의 고유한 능력은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 해결을 통해 깨닫는 체험적 통찰력이자 실천적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4차 산업혁명이 주도하는 기술혁명 시대에 기술적 실수로 발생하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인간밖에 없습니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순간적인 판단과 즉흥적인 결단으로 과감하게 실행하면서 축적하는 실천적 지혜는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질문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이제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 번째,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미국의 작가 메리 올리버는 《휘파람 부는 사람》에서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두 가지 다른 능력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집니다. 곧 사랑은 질문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할 때 여러분 질문이 많아요? 적어요? 많아요. 그렇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당연히 알고 싶고 궁금해져서 질문이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잘못된 말이에요.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두 가지가 아니고 한 가지 능력입니다. 사랑은 곧 질문이니까요. 처갓집의 땅은 얼마나 되는지. 이 친구가 밤에 잘 들어갔는지. 아침에 밥은 먹고 출근했는지, 비가 오는데 우산은 갖고 갔는지. 온통 질문이 많아지다가 사랑이 식기 시작하면서 질문도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밥은 먹었는지 막. 잠은 잤는지. 땅은 팔아먹었는지, 비 오는 데 우산은 갖고 출근했거나 말거나. 이런 질문이 없어지기 시작한다는 얘기는 사랑이 식었다는 반증입니다. 질문이 없어지면 사랑이 끝나가거나 끝난 겁니다. 호기심을 기반으로 질문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 교육도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을 찾는 능력은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합니다.
인간은 질문하고 기계는 대답합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기계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습니다.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기말고사 문제를 스스로 출제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답을 찾는 능력은 계속 배워왔지만 질문하는 능력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잖아요. 전대미문의 새로운 질문이나 문제는 대답도 색다른 걸 요구합니다. 질문이나 문제가 틀에 박히면 대답도 당연히 틀에 박히게 나옵니다. 질문을 던지는 능력. 문제를 잘 내는 능력. 이런 인재를 전문용어로 문제아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는 문제아입니다. 질문에 대해서 재미있는 사례를 살펴볼까요. 개미다리는 몇 개일까요? 6개입니다. 앞에 붙어 있는 두 개는 다리가 아니고 더듬이입니다. 개미다리가 8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지네 다리는 몇 개일까요?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개죠. 어느 날 개미가 호기심이 생겨 지나가는 지네에게 물어봤어요. “야, 지네야. 너는 앞으로 걸어갈 때 저 수많은 다리 중에서 도대체 어떤 다리를 첫발로 내딛느냐?” 이렇게 질문했더니 지네가 깜짝 놀랐어요. 왜 깜짝 놀랐을까요? 지네는 앞으로 걸어갈 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네는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녔던 겁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고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지네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질문을 던지면 사람은 생각해요. 제가 2007년도에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한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순간 던진 첫 번째 질문이 뭔지 아세요? 여기가 어디야? 두 번째 질문, 내가 여기 왜 와있지? 세 번째, 여기 있는 나는 누구지? 평상시에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정신 나가봐야 이런 정신을 뒤집어엎는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가슴으로 생각하는 공감이라야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이 쉽게 따라잡기 어려운 인간의 두 번째 고유한 능력은 공감능력입니다. 공감능력은 머리로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저 일을 하면 분명히 나한테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발 벗고 나서 가지고 타자의 아픔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능력입니다. 연민(sympathy)이 머리로 계산하는 능력이라면 공감(empathy)은 가슴으로 아파하면서 실제로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노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관계가 겪고 있는 아픔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단순한 연민의 감정보다 공감을 느낄 때 비로소 인간관계도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관계가 아니라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희망의 연대임을 알게 됩니다. 《타인의 고통》을 슨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 연민하는 감정과 공감하는 능력의 차이를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본과 에콰도르의 지진 관련 뉴스를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도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처럼 흘려보냅니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고통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애도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생각 사(思)’자를 보더라도 ‘밭 전(田)’자와 ‘마음 심(心)’자의 합성어입니다. 여러분 ‘생각 사’자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위에 ‘밭 전’자가 있고 밑에 ‘마음 심’자가 있습니다. 이 ‘밭 전’자는 밭이 아니고 인간의 숨골, 즉 이성이나 머리를 뜻하는 상형문자입니다. 그리고 밑에 ‘마음 심’은 심장입니다. 생각 사(思)의 위에는 머리가 있고, 밑에는 심장이 위치하는 걸로 봐서 생각한다는 것은 머리와 가슴의 합작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따듯한 가슴(warm heart)은 없고 냉철한 머리(cool head)로만 지성을 쌓아나갑니다. 머리는 똑똑한데 가슴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 대량 양산되고 있습니다. 공감능력이 무엇인지 이해를 돋우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돼지는 목뼈 구조상 15도 이상 목을 못 든다고 합니다. 돼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셈입니다. 돼지는 그래서 늘 땅만 보고 살아가는 슬픈 짐승입니다. 돼지 목에 담긴 이 슬픔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가슴으로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까요? 돼지 목살을 맛있게 드시면서 돼지 목에 담긴 슬픔에 대해서는 한 번도 가슴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돼지 목살을 드실 때는 30초간 묵념을 올리고 드세요. 그런데 돼지가 하늘을 보는 유일한 방법은 걷다가 발을 잘못 디뎌 뒤로 자빠지는 겁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늘을 볼 수는 없습니다. 넘어지고 자빠져봐야 평상시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상상력은 타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는 이연연상입니다
이제 세 번째, 상상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타자의 아픔을 포착한 사람은 그걸 어떻게 하면 치유할 수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능력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은 밑도 끝도 없는 뜬구름 잡는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 타인의 아픔을 포착한 다음에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밤잠을 안 자고 아이디어를 내는 분투노력입니다. 재미난 예를 하나 생각해보면 상상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휘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알람시계와 관련된 아픔은 저마다 다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겁니다. 알람을 못 듣는 경우도 있고 알람을 듣고 바로 무의식적으로 끄고 잠깐만 더 잔다는 것이 알람 시간을 훨씬 넘겨 뒤늦게 일어나는 당황스러운 경험도 많이 있을 겁니다. 알람시계와 고객이 만나는 접점에서 고객이 느끼는 불편함, 불안감, 불만족스러움을 포착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고객들을 알람 시간에 맞게 확실하게 깨울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알람시계에 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알람이 울리면 퍼즐이 풀리는 데 알람시계를 끄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풀렸던 퍼즐을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켜야만 알람이 꺼지는 시계가 있습니다. 퍼즐을 정확히 맞추려면 잠을 그만 자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죠. 또 다른 알람시계는 늦잠을 자면 자신이 싫어하는 단체로 돈이 출금되는 알람시계도 있어요. 내가 잠을 자는 사이에 돈이 계속 빠져나가는 데 잠이 올까요? 벌떡 잠이 깨겠죠. 이런 알람시계를 만든 사람들은 발상은 알람시계와 관련돼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아픔을 사랑하는 공감능력이 상상력으로 연결되면서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시켜 생각해냅니다.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면도하는 게 귀찮을 때가 많습니다. 면도하기 귀찮은 남자들의 아픔을 포착한 사람이 남자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혁신적인 면도기를 개발했습니다. 기계가 돌려주는 데로 한 바퀴 돌면 면도도 되고 이발도 되는 혁신적인 기계가 개발됩니다. 여성들은 또 아침에 출근할 때 화장하기 귀찮잖아요. 화장하기 귀찮은 여성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한 사람이 혁신적인 화장품을 개발했습니다. 스탬프처럼 얼굴에 찍으면 화장을 마치고 바로 출근할 방법이 생겼습니다. 이런 걸 장난기로 볼 게 아니라 저런 걸 만든 사람들의 발상 구조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장하기 귀찮은 여성들의 아픔을 포착한 사람이 그 아픔을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험하면서 마침내 혁신적인 화장품을 개발한 것입니다.
저는 공업고등학교 다니면서 용접을 할 때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지금은 소주를 못 마시는 아픔이 있습니다. 소주를 액체 상태로 못 마시는 사람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한 사람이 소주 정수기를 넘어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기존의 소주 정수기는 빨간 꼭지를 누르면 따뜻한 정종이 나오고 파란 꼭지를 누르면 청하가 나오는 혁신적인 소주 정수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주 정수기도 소주를 못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기필코 소주를 마시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즉 소주를 액체 상태로 못 마시는 사람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한 사람이 소주를 기체 상태로 코로 흡입하는 소주 가습기를 개발했습니다. 이걸 틀어놓고 주무시면 그 이튿날 출근이 불가능한 사태가 발생합니다. 소주는 액체 시장만 있는 게 아니라 기체 시장이 있다는 놀라운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소주를 못 마시는 사람들의 아픔을 사랑한 사람만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소주 가습기와 같은 혁신적인 발상을 하게 된 겁니다. 이처럼 타인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한 사람이 그 아픔을 치유 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창조됩니다.
상상력의 최고봉, 이그노벨상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그노벨상은 단체사진을 찍는데 도대체 몇 장을 찍으면 눈 안 감는 사람이 나올까. 이런 걸 연구한 사람. 그다음에 곰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사람이 곰을 가까이서 보다 물려 죽을 뻔한 아찔한 체험을 하고 나서 곰이 가까이서 물어보아도 아무도 이상이 없는 우주복과 같은 옷을 개발했어요. 자비 2억을 투자해서 옷을 개발, 그 옷을 입고 행복하게 곰 앞에 가서 곰을 보는 꿈을 이룬 사람은 이그노벨 의류학상을 받았습니다. 미국 버지니아대의 한지원씨가 커피잔을 들고 다닐 때 커피를 쏟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 공로로 2017년 이그노벨 유체역학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인도 여러 명이 이그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그노벨상은 이처럼 호기심, 재미, 상상력의 산물로 우리 일상을 변화시키는 재미있는 발상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걸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상이다. 상상력은 실천적 지혜를 잉태하는 텃밭이자 기반입니다. 상상력은 아픔을 사랑하는 감수성이 포착한 타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는 이연연상에서 나옵니다. 딜레마 상황에서 심사숙고함과 동시에 어떤 조치를 취하면 주어진 상황이 직면하는 문제나 위기를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원동력이 실천적 지혜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딜레마 상황을 탈출하는 묘안입니다
실천적 지혜가 탄생되는 순간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누군가 난해한 질문을 했을 때 나보다 지적 수준이 낮거나 나와 전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쉽게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발현됩니다. 코닥이라는 회사에 한때 유치원생들이 견학을 갔습니다. 필름을 만드는 코닥에 견학 간 유치원생들이 던진 질문은 “필름이 뭡니까?”였습니다. 그랬더니 코닥의 전문 기술자가 전문용어를 사용하여 “필름이란 빛에 노출되면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화학반응하는 물질”이라고 설명합니다. 당연히 유치원 아이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죠. 고심을 거듭하다 코닥의 전문 기술자는 “필름은 그릇이다!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다 담을 수 있으니까”라고 쉽게 설명합니다. (Steven Sasson) 그랬더니 아이들이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놀라운 지혜가 언제 탄생하느냐? 내가 갖고 있는 굉장히 복잡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유치원생이나 나하고 전혀 다른 사람들한테 설명했을 때 그 사람이 알아듣도록 만드는 이 고민하는 순간에 이제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이 전공하는 전문분야를 여러분의 자식들에게 설명해보세요. 그 아이가 알아들으면 여러분은 지혜로운 인간이 될 자격을 취득한 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했죠. "실천적 지혜란 도덕적 자발성과 도덕적 스킬의 조합"이라고 말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단순한 사실관계나 법률과 규칙이나 원칙, 직무기술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서로 갈등하는 몇 가지 선의의 목표를 조율하거나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기술이 필요합니다.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와 규율만 고수하는 전문가가 많을수록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의《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는 다음과 같은 실천적 지혜에 관한 사례가 나옵니다. 레모네이드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가게에 하나밖에 없는 마이크스 하드 레모네이드(Mike's Hard Lemonade)를 무의식적으로 사주었습니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 레모네이드가 알코올 도수 5도인 제품인 줄도 모르고 레모네이드라는 글씨만 믿고 아들에게 사준 것입니다. 때마침 경비원이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던 아들을 발견하고 경찰에게 신고합니다. 경찰은 구급차를 불러 급히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지만 아들에게 아무런 알코올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의사들은 아들을 퇴원시킵니다. 하지만 경찰은 아들을 아동 보호소의 위탁 가정에 맡깁니다. 경찰은 원하지 않았지만 절차에 따라야 했습니다. 3일 동안 보호소에 머문 아들은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아버지는 집을 떠나 2주 동안 호텔에 투숙해야 된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판사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주정부의 법률적 절차에 따라야 했습니다. 2주가 지나서야 가족은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알코올이 든 음료수인 줄 모르고 아들에게 건넨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음료수를 정기적으로 주거나 아이가 알코올을 남용해도 눈감는 아버지와 동일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상황에 따른 도덕적 판단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지 않고 그냥 관례대로 규율과 절차에 따라 법집행을 감행한 판사의 고지식함이 가져오는 어처구니없는 사례입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놓고 심사숙고했어야 했습니다. 매점 주인은 과연 알코올 도수가 5도짜리인 레몬레이드를 아이가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팔았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도수 5 도인 줄 알고 레몬에이드를 아이에게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아이는 알코올 도수 5 도인 줄 알고 레몬에이드를 마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회색지대에서 당사자들이 겪었을 판단과 행동 조건을 고려할 때 판사는 과거의 판례대로 판결을 내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원칙은 소중하지만 판단이 실종된 원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규율이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칙은 또 다른 원칙과 갈등하지만 조율되어야 합니다. 엄격한 규율과 교조적인 원칙이 상황판단과 조율에 필요한 실천적 지혜를 주변으로 몰아낸다면, 훌륭한 판단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려면 공감과 거리감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겪고 있는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다른 이의 관점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도 주어진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공감하는 의사는 미묘한 감정적 실마리를 알아채는 통찰력과 상상력이 있으며, 말로 표현하지 않는 내용을 듣기 위해 몸짓 언어와 얼굴 표정을 읽어내는 예민함이 있습니다. 현명한 의사는 공감을 통제하고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실천적 지혜는 책상머리에서 잔머리 굴려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실천적 지혜는 예를 들었던 병원이나 판사의 판결 내리는 상황처럼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딜레마 상황에서 직접 부딪쳐가면서 심사숙고해보고 판단해서 행동해보는 체험적 각성이 축적될 때 비로소 생기는 지혜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몸으로 앎을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실천적 지혜는 컴퓨터 알고리듬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다양한 의사결정의 딜레마와 몇 가지 변수를 기계적으로 조합해서 대안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습득되지 않습니다. 도덕과 윤리적 딜레마는 정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겪는 회색지대는 만고불변의 보편적 진리가 통용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누가 그 상황에 개입되어 의사결정을 이루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실천을 유도하는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사실적 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됨은 물론 문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역지사지로 공감하는 능력을 동시에 발휘하면서 올바른 실천으로 가는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인공지능은 타자의 입장이 되어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딜레마 상황에서 도덕적-윤리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인지를 숙고하는 능력을 갖추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설명은 실증을 기다리는 현실의 미묘한 힘을 다른 삶의 높이에서 통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삶에서 실증된 지식으로 이 삶을 봉쇄하기 때문이다. 필연의 맥락에 갇혀 과거로만 현재를 설명하는 모든 이론적 이해는 우리를 위로하거나 한탄하게 할 뿐 실천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355쪽). 황현산의 《잘 표현된 불행》에 나오는 말이다. 설명과 이론의 무력함과 허망한 한계를 꼬집는 말 중에 이런 문장을 능가하게 쓸 수 있을까요? 설명을 들을수록 바보가 된다는 《무지한 스승》의 저자 랑시에르의 설명의 무한 퇴행론과 일맥상통한다. 설명은 이미 실증된 지식으로 현실의 가능성을 새로운 관문으로 유도하지 않고 과거의 지식으로 현재를 가둬버리는 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론적 이해 역시 이론 탄생 시점이 과거였기에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현실의 아픔을 설명하고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줄 수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과감한 실천을 촉발시킬 수 없습니다. 설명과 이론적 이해의 무력한 한계와 허망한 폐해를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실천적 지혜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회색 지대에서 고뇌를 거듭하는 인간에게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가장 현명한 답, 현답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