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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규정된 의미를
파괴하는 미지의 도끼다

어른의 전달력은 규정된 의미를 파괴하는 미지의 도끼다


어른의 전달력은 숨은 진리로 작동되지만 그것의 진면목을 파헤쳐보면 사실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의 편파적 이익이나 이념이 침잠되어 있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믿고 의지했던 사회적 통념이나 보편적 가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청중에게 알려 깨닫게 하는 힘이다. 사리판단을 어둡게 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깨고 잠들어가는 영혼을 뒤흔드는 힘이 어른의 전달력이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가짜 심장을 건드려 다시 심장 뛰는 삶으로 이끌어가는 추진력이자 추동력이 바로 어른의 전달력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편리로 포장된 진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삶은 누구에게나 일리 있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서 저마다의 컬러와 스타일로 살아내지 않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깨우치는 각성제다. 어른의 전달력이 세상의 진리를 전달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이것이 내가 믿는 진리니까 믿어야 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어른의 전달력은 무엇이 진리인지라는 물음보다 “왜 그것이 진리인지, 누가 그걸 진리라고 정했는지?” 또는 “우리가 믿는 진리는 과연 믿고 따라야 하는 강제성을 누가 정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선호한다. 이처럼 맹목적 믿음을 의심해 보는 질문을 니체는 계보학적 질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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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언어적 점성을 깨부수는 도끼질이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누가 진리를 정의하는가?”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의 관점에 숨어 있는 의도는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니체가 관심을 두는 계보학적 질문이다. 계보학적 질문은 익숙한 것, 당연한 것을 더 이상 익숙하지 않도록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비판적 질문이다. 기원을 찾아 올라가 나의 조상이 위대하다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나를 정당화하려는 족보학과 다르게 계보학은 기원을 찾아 올라가긴 하지만 그 기원이 얼마나 근거 없는 믿음인지를 의문에 붙이고 비판하는 방법이다. 이런 계보학적 질문은 누군가의 강의를 듣고 무조건 전달자가 주장하는 메시지를 믿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의도는 무엇인지?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인지를 따져보고 파헤치는 질문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확신하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만고불변의 진리로 설명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편견과 편리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옳다고 믿는 신념이나 가치체계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의문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나아가 어른의 전달력은 익숙한 세계에 길들여져 있는 세상의 관습을 벗겨내고 새로운 습관의 옷을 입혀보려는 안간힘이다. 타성과 통념이 전세 들어 살던 집에 들어가 보면 고정관념의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손손 내려오던 관례가 마치 난공불락의 철칙처럼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작은 관념의 파편들이 미세먼지처럼 온방의 공기로 가득 차 있고, 그 어떤 소리로도 번역하기 어려운 나태와 자만의 소음이 소리소문 없이 폐부 깊숙이 들어차있다. 어른의 전달력은 녹슨 철로 위를 힘겹게 운행하면서 껍데기에 가려져 있던 낡은 관습과 통념들을 통렬하게 깨부수고 굳어진 습관의 저변에서 힘겹게 숨죽이며 살아가다 고장 난 고정관념과 타성의 찌꺼기들을 들춰내서 강력한 세제로 세탁하는 세척력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세탁이나 세척은 관념적인 개념적 처방이 아니라 몸으로 감각한 깨달음의 언어로 폐부 깊숙이 자리 잡은 세속적인 식상한 상식을 흔들어 깨우는 신체적 각성이다. 실천 앞에는 언제나 과감한이라는 형용사가 붙고, 검토 앞에는 적극이라는 부사가 달라붙어 다른 형용사와 부사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언어적 관성을 깨부수는 도끼질이 바로 어른의 전달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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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낯설게 하기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글쓰기는 주체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타는 대장간”이라는 말을 “전달 무대는 주체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타는 대장간”이라고 바꿔 써도 일맥상통한다. 전달은 단순히 생각이나 감정을 말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전달력은 전달자의 주관적인 생각들(‘주체’)이 바깥세상(‘세계’)과 만나서, 대장간의 불꽃처럼 뜨거운 에너지와 땀, 노력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걷잡을 수 없는 생산적인 에너지다.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은 보편적인 경험이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공통적인 것을 자기만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하는 힘이다. 너무 낯설으면 청중에게 오해나 저항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전달력은 내용의 참신성과 더불어 방법의 독특함에서 비롯된다. 오랫동안 인간이 갖추어야 할 보편적인 미덕, 예를 들면 사랑과 행복, 도전과 열정, 상상과 창조와 같은 추상명사도 그 단어와 관련된 경험의 깊이와 넓이를 나만의 언어로 번역, 진부함과 익숙함의 틀을 깨고 관습의 글레를 벗어던지는 표현력을 연마할 때 어른의 전달력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다가오는 미래를 끌어당겨 우리가 지향할 모습을 미리 보여주려는 데 매력이 있다. 어른의 전달력이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는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면서 타성에 젖은 언어를 사용,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낯설게 하기가 핵심이다. 낯설게 하기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공유해 온 개념의 의미를 재정의함으로써 똑같은 현상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시도다. 예를 들면 흔한 컵 하나를 보고도 “이 컵은 단순한 음료 용기가 아니라, 우리 삶에 끊임없이 채워지는 열정이나 기회를 담는 그릇”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의 천재는 시인이다. 시인은 동일한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도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재해석한 다음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언어로 사물이나 현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 “나이테는 그 여름의 연서이자 그 겨울의 난중일기”라고 표현한 반칠환 시인의 ‘둥근 시집’에 등장하는 시 구절이다. 새로운 생각은 언제나 새로운 표현이며 전달이다. 아무리 참신한 생각을 했어도 그걸 매개하는 언어가 타성에 젖어 있으면 생각도 천박해지고 전달도 힘을 잃는다. 낯설게 하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적 공감대는 특정 단어에 대한 의미를 공유할 때 일어난다. 나이테를 그 여름의 연서이자 그 겨울의 난중일기라고 재정의한 반칠환 시긴의 나이테 낯설게 하기는 그 순간 익숙한 나이테가 된다. 이제 전달자는 자기만의 언어로 나이테를 다시 낯설게 정의하지 못하면 의미심장한 어른의 전달력이 되지 못하고 다시 틀에 박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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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범주에 갇힌 의미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나는 눈이라는 미지의 도끼를 가졌다.” 정병근 시인의 ‘눈과 도끼’라는 시에 나오는 문장이다. 눈은 미지의 도끼다. 눈을 다르게 바라보는 낯설게 하기다. 눈이 미지의 도끼인 까닭은 아직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는 고정관념을 도끼로 깨부수듯 새로운 깨달음의 시각을 열어주는 창조적 파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며 오래 머무는 순간 하나의 앎이 탄생된다. 하지만 그 앎으로 인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앎은 차단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시선이 사선(死線)을 그어놓는 순간 일정한 범주로 묶어서 의미를 고정시켜 버린다. “시선이 한 사물에 오래 머물 때, 앎이 만들어지고 앎으로 사물은 폐허가 된다”(178쪽). 오민석의 《이 황량한 날의 글 쓰기》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시선이 멈추는 순간 사물은 기존 앎으로 의미가 규정되고 다른 의미와 만나 일정한 범주를 만들어간다. 범주 속에 갇힌 사물은 다르게 정의될 가능성을 상실한다. 기존 앎으로 사물이 폐허가 되기 전에 미지의 도끼로 그 앎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기존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력을 멈추어야 한다. 다른 시선이 바로 미지의 도끼 역할을 하는 다른 눈이다. 한 가지 의미로 규정하려는 시선에 저항하는 힘이 미지의 도끼다. 어른의 전달력은 미지의 도끼를 갖고 규정당한 의미의 껍질을 깨부수는 의미해체 작업이며, 범주 속에 갇힌 공통점보다 범주에 포함될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는 힘으로 깨달음을 주는 영향력이다. 어른의 전단력의 핵심은 규정당한 의미를 거부함으로써 의미를 다르게 부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줌으로써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는 잠재성을 일깨우는 힘이다.


“소음은 사물들의 모국어”라는 이재무 시인의 ‘나는 여름이 좋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음을 시끄러워서 피곤함을 자극하는 소리로 정의하지 않고 ‘사물들의 모국어’로 재해석해서 전달하면 소음은 낯선 음악을 들린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하나로 정의해서 정체된 명사의 의미로 한정하지 말고 모든 명사가 품고 있는 의미를 부단히 바꿔가며 어제와 다른 명사로 거듭나는 동사로 바꿔서 해석하면 어른의 전달력은 새로운 영향력이 생긴다. “명사에는 진실이 없다/진실은 동사로 이루어진다/신이나 진리를 명사로 가두지 마라.” 이재무 시인의 ‘동사를 위하여’에 나오는 구절이다. 명사는 하나의 의미를 품으면 그걸 죽을 때까지 간직한다. 대 부분의 불변하는 진리나 경전은 진리를 명사 속에 간직한다. 반면에 동사는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어제와 다른 의미를 품고 일상을 탈출한다. 의미의 결정체를 명사로 가두지 않고 어제와 다른 의미의 주로를 달리면서 늘 다른 의미로 변주한다. 탈주와 자유로 이어진다. 어른의 전달력은 모든 추상명사에 갇힌 정체된 의미의 결정체를 문제의식에 녹여 움직임을 부여한다. 추상명사가 어떤 상황에 놓이는지에 따라 다른 꿈을 품고 동사로 탈주를 거듭한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추상명사가 질문을 품으면 불가능에 도전하며 삶의 혁명을 일으키는 전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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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앎이 암으로 바뀌기 전에 생각을 바꾸는 각성제다


동사(動詞)는 정체되는 순간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동사(凍死)당한다. 동사는 언제나 불안감을 먹고 자란다. 어제와 다른 움직임으로 자신을 변신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멈추는 순간 동사는 명사에 포섭당해 삶을 마감해야 되기 때문이다. ‘나는 여름이 좋다’라는 시에서 이재무는 “여름은 동사의 계절/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라며 여름이라는 계절은 동사가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계절임을 예찬한다. 여름은 모든 생명체가 마음을 열고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를 받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에너지를 다른 생명체와 교환하면서 생장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의 계절이다. 동사는 불안을 먹고 자란다. 불안은 지금부터는 지금까지 했던 방식으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경고 메시지이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시도해 보라는 각성의 신호다.


“문학은 가짜 행복과 거짓 만족과 대문자 진리를 조롱하며,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선물한다. 문학이 조장하는 불안은 재난의 미래에 대한 예고이고 경고이다”(26쪽). 오민석의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문학’을 ‘어른의 전달력’으로 바꿔 써도 의미는 그대로 맥을 타고 흐른다. “어른의 전달력은 가짜 행복과 거짓 만족과 대문자 진리를 조롱하며,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선물한다. 어른의 전달력이 조장하는 불안은 재난의 미래에 대한 예고이고 경고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청중을 편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감에 휩싸여 좌불안석으로 만든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나 진실이 잘못된 믿음으로 생긴 사이비 메시지이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신념도 통념이라는 사실이 통렬하게 깨지면서 기존 앎에 심각한 생채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존 앎이 정체되어 다른 앎으로 대체되지 않고 신념의 그늘에 가려지고 확신의 틀 안에 갇히면 앎은 암이 된다. 어른의 전달력은 앎이 암으로 바뀌기 전에 각성제를 처방하고 통증을 유발해서 앎의 병원에 입원시키는 경고장이다. 앎이 암으로 바뀌는 까닭은 왜 그런지 근거나 이유도 찾아보지 않고 남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앎에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따라가기 때문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나에게 좋고 나쁜 주관적이고 윤리적인 가치판단 기준을 따라가지 않고 사회가 정한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옳고 그른 기준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와중에 앎은 암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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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잠재력을 실현하려는 생명력이다


이런 점에서 어른의 전달력은 니체식으로 말하면 도덕(morqal)을 따르기보다 윤리(ethics)를 추구하는 설득력에 가깝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에서 말했던 선과 악을 가르는 도덕(moral)을 폐기하고 나의 입장에서 좋고 나쁜지를 판단하는 윤리(ethics)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의사결정하는 힘이다. 니체가 도덕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왜 윤리적 기준을 따르라고 했는지, 어른의 전달력 역시 도덕적 정언명령을 따라가는 설명력이라기보다 윤리적 선호도를 따라가는 설득력인지를 알아보려면 우선 도덕과 윤리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개인적인 욕망은 가급적 억제해야 한다”, “어른들에게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와 같은 가르침들은 사회가 개인에게 주입한 ‘도덕적 명령’이다. 이러한 도덕이 과연 개인의 진정한 성장과 삶의 긍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니체는 비판한다. 니체가 말하는 도덕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회가 정한 ‘보편적’ 선악의 굴레다. 도덕은 주로 사회 전체가 합의하고 강요하는, 혹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적인 규범에 더 가깝다. 니체가 말하는 도덕은 주로 기독교적 가치관이나 약자들이 강자들을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낸 ‘노예 도덕’이라고 봤다. 개인의 독자적인 판단이나 삶의 긍정을 억압하고, 인간의 생명력과 개성을 획일적인 틀에 가두는 굴레로 작용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개인의 '좋고 나쁨'의 감각이 아니라,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강제된 ‘옳고 그름’에 대한 약속이 바로 도덕이다.


이에 반해 윤리는 개인이 창조하는 ‘좋고 나쁨’의 주관적 판단 기준이다. 사회적 정한 보편적 도덕이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때 필요한 지침이 바로 윤리적 판단 기준이다. 니체에게 윤리는 개인이 스스로 삶의 가치를 창조하고,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좋고 나쁨'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주관적인 기준이다. 여기서 ’힘에의 의지‘는 타인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하려는 생명력의 표현이다. 즉 자기 극복과 창조적 변화를 통해 더 풍부하고 강력한 존재가 되려는 근본적 충동을 의미한다.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창조적 에너지이자 자기답게 살아가려는 생산적인 욕망이다. 니체는 윤리적 판단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도덕을 넘어설 것을 주장한다. ‘노예 도덕’에 대칭되는 ‘주인 도덕’의 개념이 바로 윤리다. 즉, 강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개인이 자신의 생명력과 위버멘쉬(초인)가 되려는 의지를 바탕으로 “이것이 내가 따라야 할 지침이라서 마음에 들고 ‘좋다’라고 생각하는 주관적 판단기준이 개인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다. 때로는 자신의 선호도나 취향에 비추어 볼 때 사회가 옳다고 믿었던 도덕적 규범이라도 내 삶이 굴레가 되고 걸림돌이 될 때 “이것은 ‘나쁘다’”라고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좋다’, ‘나쁘다’는 사회의 보편적 기준이 아니라, 개인의 생(生)의 증진과 관련하여 주관적으로 평가되는 가치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삶을 찬미하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긍정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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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근거 자체를 뒤집어엎는 혁명가적 영향력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사회가 정한 가치판단기준에 비추어 이것은 해야 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을 말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은 겸손, 자기희생, 동정심을 ‘선’으로 규정하고, 겸손하지 않고 자기희생적 삶을 살지 않으며 동정심이 없는 삶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왜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겸손해야 하는지, 무조건 자기희생적 삶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도 없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처럼 기독교적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사회가 도덕에 근거한 노예적 삶을 강요한다. 특히 니체는 기독교 도덕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고 창조적 에너지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 창조자인 위버멘쉬가 기존 도덕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용기, 명예, 자긍심을 중시하며 자신의 탁월함을 과감하게 표현함으로써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위버멘쉬의 생명력을 긍정하고 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향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선악에 종속되어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살아왔다. 니체는 그동안 우리는 사회가 정한 도덕적 기준에 종속되어 바깥의 기준에 기반을 둔 원심력에 끌려 다니는 노예적 삶이었음을 스스로 비판해 보고,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하려는 노력을 통해 주인으로 살아가는 위버멘쉬가 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분류한 네 등급의 사상가는 네 등급의 어른의 전달자에 적용해도 일맥상통한다. 첫째, 현상의 표면을 바라보는 ‘피상적 사상가’다. 둘째, 심층이나 현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깊은 곳을 연구하는 ‘심오한 사상가’다. 셋째, 사물의 근거를 파고들어 현상 밑의 바닥을 탐구하는 ‘철저한 사상가’다. 이들은 사물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무조건 밑으로 파고들어 깊이만 추구하는 사상가보다 사물의 근본이나 뿌리를 파헤쳐 그것이 담고 있는 숨겨진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사상가의 더 소중한 역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진흙탕에 박고 밑바닥을 뚫고 들어가서 파헤치고 뒤엎는 ‘지하의 사상가’다. 마지막 지하의 사상가는 ‘심오한 사상가’처럼 깊이를 추구하거나 ‘철저한 사상가’처럼 근본을 해명하지 않고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근거 자체를 뒤집어엎는 사상가다. 니체의 표현을 따르면 이들이야말로 사랑스러운 지하 철학자다. 니체는 평생 지하의 사상가처럼 깊이 파고들어 세워놓은 이전의 철학적 전통을 뿌리째 전복시켜 지금까지의 철학적 탐구와 성취결과가 무의미하며 잘못된 신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파헤치는 전복과 파괴의 스승이다.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하는 사상가는 바로 마지막 네 번째, 지하의 사상가다. 지하의 사상가야말로 사회가 정한 도덕적 가피판단 기준을 전복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의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주관적 좋고 나쁜 윤리적 기준을 따르는 전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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