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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Aug 09. 2022

탕수육을 같이 먹자고 해줘서 고맙습니다

마라도에 가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푸른 들판이 멋져 보였다. 우리나라 최남단이라니 한 번쯤은 가보고 싶기도 했고. 일어나자마자 모슬포항으로 향했다. 컨디션이 딱히 좋진 않았다. 어제 먹은 저녁이 얹혀서 새벽에 깼고 다시 잠이 안와서 오래 설치기도 했다.


오늘도 날씨는 좋았고... 3일째가 되니 뚜벅이 제주 여행도 나름 익숙해졌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쨍쨍한 여름 날 정류장 옆 이발소에서 TV 소리가 새어나오고 문 틈으로 쇼파에 누워 낮잠 자는 아저씨의 발이 보였다. 어딘가 그 광경이 평화로워 한참을 봤다.


작년 겨울 제주에 왔을 때 가파도에 가기 위해 모슬포항에 온 적이 있었다. 반년 만에 왔는데 엊그제 온 것처럼 낯익었다. 표를 사고 대합실에 앉아 책을 읽었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절반 정도 읽었을 뿐인데 항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달라 보였다.


배멀미에 취약한 나는 배를 타자마자 자리에 누워버렸고 그 덕에 마라도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짜장면 집에 들어갔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테이블은 모두 다인용이었기 때문에 나는 꽤 오래 서성였다. 5분쯤 지나서 직원 분이 말했다. 여기 이 분도 혼자 왔는데 두 분이서 좀 같이 앉아요.


학생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애가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그 아이와 한 테이블에 어색하게 앉았다. 주문을 하려는데 이 친구가 말했다. 탕수육 하나 시켜서 나눠 먹을까요. 탕수육은 안먹기 아쉬운데 혼자 먹기엔 부담돼 고민이던 나는 바로 좋다고 했다. 그 대화 덕에 분위기는 풀렸고 나에겐 마라도 식사자리에서의 말동무가 생겼다.


경북 영주에 사는 27살이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 도보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벌써 보름이 넘었고 공항 쪽에서부터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돌아 마라도까지 왔다고 했다. 우리는 혼자 여행하는 것의 장점이나 외로움에 대해 나눴다. 별 대화 아니었지만 난생 처음 와본 섬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오래된 사이처럼 얘기를 하니 기분이 좋았다.


혼자인 게 조금은 쓸쓸했었구나. 스스로에게 속으로 말했다. 나는 탕수육을 같이 먹자고 먼저 말해준 게 고마워 우리 테이블의 밥값을 전부 냈다. 친구는 고맙다며 아이스 커피를 사줬다. 마주치면 인사하자고 하고 여행 잘 하라며 작별했다. 당연히 모슬포로 돌아가는 길에 또 만났고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보길래 그의 폰으로 직접 검색해 내게 팔로우를 걸어줬다. 나는 이번 여행 인스타를 들여다보지 않기로 다짐해 앱을 삭제했으나 그의 팔로우 신청을 받아주기 위해 잠시 앱을 깔았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오늘이면 거의 다 읽을 것 같았기에 모슬포 주변 서점에 가 새 책을 또 샀다. 아무튼 시리즈의 아무튼, 아침드라마. 이거 계산하려니 주인이 재밌는 책 잘 고르셨네요 라고 했다. 아무튼 시리즈는 무언가에 깊게 빠진 사람들의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는 오랫동안 어디에도 깊게 빠져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이 읽고 싶었다. 술이나 달리기나 이런 것들이 아닌 그냥 티비 켜서 보면 되는 아침드라마가 그 대상이라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숙소에 와서 씻고 한 숨 자고 책을 읽다가 오늘 마라도에서 찍은 사진을 오래 연락을 못한 오래된 친구들에게 보냈다. 서울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다들 좋아했다.


정류장에서


마라도
탕수육 같이 먹자고 해줘서 고맙습니다


마라도 인증


아무튼 아침드라마


숙소에서 본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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