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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Feb 15. 2023

레이서 그랜마

짧은 여행일지라도 사흘, 나흘을 지내다보면 루틴이 생긴다.


내가 묵고 있는 삿포로의 에어비앤비는 어느 일본 가족의 가정집이다. 할머니와 엄마 아빠, 그리고 손주 셋이 산다. 이 숙소의 차별점은 할머니가 손수 아침을 차려준다는 것인데 모든 리뷰에서 이 식사를 칭송하고 있었다. 와서 먹어보니 과연 그랬다. 고급 식당에서 파는 가정식 같았다. 이 호사스런 아침 식사가 내 일주일 일본 여행의 첫 루틴이다.


다음은 샤워다. 일본은 화장실과 욕실이 구분되어 있다. 욕실은 오로지 씻기 위한 공간이다. 내부에 휴지나 수건을 놓을 필요 없으니 깔끔하다. 타일이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돼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편안함을 준다. 여기선 아무리 물이 튀겨도 아무것도 흐트러질 염려가 없다.


씻고 나서는 나갈 준비를 한다. 채비를 마치고 나가면 할머니가 집안 일을 하다가도 뛰어나오신다. 손님을 역까지 데려다주기 위해서다. 난 처음에 픽업을 거절했다. 새로운 동네를 걸어보는 것도 좋고 또 과한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도 극구 데려다준다고 해서 할머니의 차를 탔다. 그리고 느꼈다. 손님을 역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할머니에게는 꽤나 큰 기쁨이라는 것을...


2월의 삿포로는 온 도로가 눈이다. 한국에서라면 운전을 포기할 만큼 미끄러운 길인데 할머니는 완전히 이 도로를 몸에 익힌 것처럼 보였다. 코너링을 할 때는 그 맛을 즐기려 일부러 핸들을 팍 꺾는 모습도 봤다. 어제는 파파고에 '운전을 상당히 잘하시네요'라고 쳐서 일본어로 말했더니 깔깔깔 웃으셨다. 들어와서 며느리한테 그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일본 여행에서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이 언제였냐 물으면 할머니가 운전하는 차에 타서 역으로 향할 때라고 대답할 것 같다. 좁고 미끄러운 길을 능숙한 운전으로 요리조리 지나가면서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눈 덮인 마을을 바라보던 시간들... 언젠가 삿포로를 추억할 때 꼭 떠오를 것이다.


내일은 오타루의 숙소로 이동한다. 식사든 픽업이든 진심인 가족과 4박을 함께해서 아주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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