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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Oct 10. 2019

한글, 한국어, 한국문학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10월 10일 목요일, 81번째


어제는 한글날이었습니다. 1년에 한 번뿐인 날인 데다, 지금 이렇게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모두 한글 덕분이니 그에 관한 글을 써도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날의 인상 깊었던 것을 글로 남겨보자는 것이 <하루한편>의 취지(?)라 여겨서 4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여파를 다루었지요.


오늘은 대체 뭘 써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거다 싶은 주제가 떠오르질 않더군요. 뭐라도 걸리기만 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휘적휘적 뉴스를 들여다보니 마침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더군요. 오호라, 이걸로 글을 쓰면 되겠다! 어제가 한글날이기도 했으니 '한국문학'에 관해 가볍게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한국에서도 수상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양한 반응을 찾아볼 수 있지만 개중에는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없는 이유가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 한국어 특유의 어감이나 맛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는 글도 더러 있었지요.


*이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메가스터디 김기훈 강사 님의 이야기입니다. 영상을 첨부합니다.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KadhggLwE9Q)


언뜻 보기에 상당히 그럴싸한 주장입니다. 저도 꽤나 말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한글 이외의 언어의 특징을 감안하지 않았고, 한국문학에 대해 자세히 몰라서 생긴 착각일 뿐이라는 걸 최근에 깨닫게 되었지요.


가령 '한국문학은 번역이 곤란하다'는 주장의 요체가 되는 근거 중 하나는 색채어의 다양성이죠. 노랗다를 예로 누르죽죽하다, 누렇다, 샛노랗다 등 무수히 많은 용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느낌을 살려서 번역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 싶지요. 다른 언어라고 해서 이런 표현들이 정말로 없을까요?


당장 영어만 해도 Yellow에서 파생되는 여러 색채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Green-Yellow, Lemon-Yellow, Olive-Yellow 등등, 색상표만 검색해도 확인할 수 있죠. 그저 유사한 표현을 찾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어에는 없는 색상 표현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색상의 문제도 아닌 것 같고, 다른 이유를 고민해보지요. 분명히 같은 표현임에도 철자 표기나 상황에 따라서 전연 달라지는 미묘한 뉘앙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가령 X발 같은 비속어가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농담은 꽤 유명하죠. 이것도 딱히 한국어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색채어가 다양하다거나, 표현의 미묘한 뉘앙스는 분명히 번역하기에 어렵겠지만 아주 치명적인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번역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까요. 언어가 바뀌었는데 원본 그대로 옮겨내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혹은 아주 많이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도 있으니.


그럼에도 한국문학을 번역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종종 거론되는 건 '한국어'가 아닌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반영된 결과로 보입니다. 한국문학의 문제를 '문학' 자체에서 찾는 게 아니라 언어의 난해함 내지는 우수함으로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요?


한글날을 맞이해 세종대왕께 감사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물론 한글은 우수한 언어입니다. 한 사람-즉 조선의 왕 세종에 의해 만들어져, 유래와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언어지요. 올해 개봉된 한 영화에서는 이를 두고 다른 이의 숨은 공로를 주장했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이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글쎄요, '언어'를 만든다는 일이 한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건 워낙에 믿기질 않으니. 이해는 갑니다. 또한 이 뛰어난 업적에 한국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질만하죠.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한글과 한국어는 또 다르고, 한국문학이 노벨상을 받는 이유와는 또 다른 일이죠.


한글은 분명 익히기 쉽고, 과학적이며 굉장한 글자이지만 문법 그 자체는 아닙니다. 한국어는 한글로 쓰일 뿐 의사소통의 수단이고, 그 과정에서 표기를 위한 문법 체계가 뒤따르게 되죠. 국어학개론을 좀 더 성실히 들어두었더라면 훨씬 설명이 자연스러웠을텐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로 갈음하겠습니다.

(링크 : https://ppss.kr/archives/31279)


요는 한국어는 영어와 같은 언어이고, 한글은 알파벳과 같은 표기입니다. 한국어도 알파벳으로 표기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쓰인 글이 '영어'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러면 한글-한국어는 그렇게 정리해두고, 문제의 한국문학으로 넘어가보지요.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없는 이유라. 글쎄요, 그건 언어에서 찾을 게 아니라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국문학 자체의 문제로 보아야할 겁니다. 꼭 노벨문학상을 받아야하는 이유나,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뭐,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자격이 대체 무엇인지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정말로 한국문학에서 노벨문학상을 배출하고 싶다면 '문학' 그 자체로 승부를 하는 수밖에는 없어보입니다. 한국문학에는 그럴 잠재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이미 16년도에 소설가 한강 님이 맨부커 인터네셔널 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물론 이는 소설가 한강 개인의 위업이지 '한국문학' 전체로 곧장 이어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요. 또한 번역의 문제도 고려해볼만한 이야기이기는 하구요. 여하간, 노벨문학상에 관하여서는 한글과 한국어, 한국문학 이 세 가지를 뭉쳐 두루뭉술하게 논의하기보다는 이들을 나누어놓고 면밀하게 따져야할 겁니다.


사실 한국문학 자체에 관심이 없는 현실에서, 노벨문학상만 수상했다고 무엇이 바뀔까 싶기도 하군요. 물론 개인에게는 굉장한 영예가 되겠지만, '한국문학'의 부흥과 이어질지는 의구심이 드는군요. 물론 한국문학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저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진 것 뿐이겠지요.


한글날은 이미 지나갔지만, 한글의 쓰임과 그 중에서도 한글로 쓰인 글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노벨문학상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과연 한글로 쓰인 글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지금부터 진지하게 궁리해 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우선은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또 뵙겠습니다 


*이에 관하여 참고 하셔도 좋을 글

https://tong.joins.com/archives/34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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