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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Dec 08. 2019

보라, 이 거침없는 청춘의 목소리를.

<크로우즈 제로(2007)>, <크로우즈 제로2(2009)>

들어가기에 앞서

편견은 나쁘다지만, 제게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편견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양아치에 대한 편견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외모에 대한 편견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풍기는 이미지가 '양아치스럽다'(?)는 판단이 들면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떻든, 좀처럼 좋게 볼 수가 없더군요.


양아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품행이 천박하고 못된 짓을 일삼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는데 참 적확한 설명입니다. 학창 시절에 장난을 빙자한 괴롭힘을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학을 뗍니다.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그들.


이 양아치(...)는 아닙니다.


문제는 오늘 다룰 영화가 바로 그 '양아치'들의 영화라는 겁니다. 바로 동명의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하여 2007년에 개봉한 영화 <크로우즈>와 2년 후에 개봉한 후속작 <크로우즈 제로2>입니다. 아래에 업로드한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양아치' 부류입니다.


좌: <크로우즈 제로>(2007), 우: <크로우즈 제로2>(2009)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작품에 관심도 없었으나 그 악명은 웹상 어디서든 전해 들릴 만큼 자자했습니다. 오죽하면 작중의 배경에 등장하는 고등학교 스즈란은 '고유명사'처럼 활용되곤 했습니다. 어느 고등학교가 한국의 스즈란이라는 둥, 일종의 상징이었지요.


원작 만화도, 영화도 볼 생각이 없었고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혔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계획에 없던 일이 일어나고는 합니다. 어쩌다 보니 보고만 겁니다. 이 두 작품을!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날따라 너무 심심했으니까요. 왓챠 플레이를 두리번거리다, 눈에 들어왔고 보게 되었죠. 어땠냐고요?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저는 만화 원작의 일본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 점도 분명 이 두 작품을 좋게 보는데 적지 않은 작용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원작 만화를 모르고 봤는데도 재미있었습니다. 영화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럼 양아치에 편견을 지닌 저(?)까지 매료시킨 작품 <크로우즈 제로>에 대해 이야기해보지요.


장르로서의 '폭력'

이 영화가 선사하는 쾌감 중 하나는 거침없는 폭력에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인 스즈란은 규칙이 통용되지 않는 무법지대처럼 묘사되지만도 만은 통용됩니다. 오로지 강한 자만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신으로는 '정점'에 설 수 없기에 다양한 이들이 이합집산하며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


스즈란이라는 공간을 넘어서서, 외부 세력 호센과의 싸움을 다룬 <크로우즈 제로 2>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두 학교가 왜 앙숙처럼 치고박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건 두 학교 중 누가 진정한 최고인지를 가리고 싶어 한다는 것뿐이죠.

 

정점을 노리는 자들, 타키야 겐지의 세력(좌)과 세리자와 타마오의 패거리(중간), 호센의 나루미 타이가(우)


이들이 싸우는 이유는, 글쎄요,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합니다. 힘이 정의인 곳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정점에 서려는 자들이니 싸움은 일종의 '대화'이며 폭력은 '수단'입니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듯이, 자연스럽게 폭력을 수반한 싸움이 동원되는 거죠.


그래서 <크로우즈 제로>는 물론 <크로우즈 제로2>의 인물이 벌이는 싸움은 아주 멋들어지게 표현됩니다. 살과 살이 부딪히고, 뼈가 부러지며 피가 튀는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객에게 싸움은 끔찍하다거나 무익하다는 교훈을 주는 게 아니라, 대리만족을 선사합니다.


온갖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거칠 것 없이 자신의 몸뚱이를 험악하게 굴려대는 규격 외의 미남은 영화에나 존재할 테니까요! 현실의 싸움은 그렇게 멋지지도 않으며,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치료비 청구서와 평생을 갈지도 모르는 상처, 지금 이 순간 분명하게 느껴지는 격통이 남을 뿐입니다.


<크로우즈 제로2>의 마지막, 두 학교의 자존심과 최강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싸우는 타키야 겐지와 나루미 타이가


영화는 그저 보면 됩니다. 진흙탕을 구르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일어서서 주먹을 내지르고 헛발질을 하는 처절한 데다 우스꽝스러운 모습마저 아름답게 포장됩니다. 심지어는 이 모든 게 '청춘'이라거나 그 비슷한 단어로 수식되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쟤네는 대체 커서 뭐가 되려나,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3학년에 1년만 지나면 졸업인 녀석들이, 장래가 어떻게 되든 팔자 좋게 주먹다짐이나 하는 건 그야말로 만화 그리고 영화라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장르'로서의 폭력이 가진 매력이며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과정과 결과가 일부 생략된 채로 지나칠 만큼 멋있게 묘사된다는 거죠. 괜히 영화를 보고 나서 허공에 주먹 한 번 휘두르고 싶고, 날아 차기를 하고 싶어 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화나 게임이 사용자로 하여금 폭력을 조장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폭력'의 위험과 의미가 왜곡될 가능성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름 아닌 폭력의 정당함 내지는 미학에 대한 프로파간다가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어디까지 영화 속의 폭력은 연출이라는 걸 감안해야겠지요.


양아치이되, 양아치 아닌.

더욱이 이들의 폭력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에는 어떤 '정당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바로 싸움에 관심이 없는 자, 관여하지 않은 자, 패주 하는 자에 대한 예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부 양아치이기는 하지만, 지킬 건 지키는 양아치라고 해야 할까요?


유치할 수 있습니다만, 일단 한바탕 싸우고 나면 그걸로 끝입니다. '남자의 세계'에서 우열이 가려졌거나, 내가 너를 인정했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 암묵적인 룰이 아주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거칠 게 없는 수컷들이라도, 그런 룰 하나는 아주 철저하게 지킵니다.


물론 '약자'를 괴롭히는 묘사가 등장하긴 합니다. <크로우즈 제로>의 경우, 없는 학생을 묶어놓고 인간 볼링을 즐기는 세리자와 타마오의 모습이 묘사되지요. 스즈란에 입학한 이상 '방관자'로 있을 수는 없다는 묘사로 봐야 하는 건지, 뒷맛이 씁쓸하기는 합니다만.


어쨌거나 이들의 '최강 다툼'은 철저히 찻잔 속의 폭풍처럼 그들 안에서만 진행됩니다. 물론 영화는 카메라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까지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선량한 시민을 괴롭혔다거나 무고한 이들에게 삥을 뜯었다거나 불법과 불의를 자행했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스즈란 출신에, 현직 야쿠자인 카타키리 켄


단적으로 카타키리 켄이 그 예시입니다. 그는 전직 스즈란 출신인 데다 현직 야쿠자라는 평범한 삶의 궤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야쿠자가 버젓이 학교 교정에 나타나고, 학생과 시비가 붙는 게 일상인 곳이라니. 어쩌면 스즈란이 있는 도시 자체가 정상 규격 외의 공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스즈란이 낭만적인 장소이며, 그곳의 학생은 '청춘'이나 '순수'로 읽어낼 수 있는 이유는 현실의 여러 복잡한 사안을 전부 제거한 채로 최강의 자리를 향한 열망과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힘과 힘의 충돌만이 그려지기 때문일 겁니다.


이 곳의 양아치들에게는 복잡한 현실 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약자에 대한 행동도 묘사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굳이 그런 걸 묘사할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최강과 최강이 격돌하는 모습을 그려내야죠. 그야말로 '표백된 순수'에 폭력과 거침없는 행동 모든 게 허용됩니다.


날고 싶다, 변하고 싶다. 청춘!

뭔가 들끓는 10대의 피를 분출하며 이래저래 날뛰고는 싶은데, 그러기엔 눈치가 보입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뭐 먹고 살 거냐는 어른들의 질문과 불안하고 막막한 미래에 대한 근원적인 걱정. 그럼에도 이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변하고 싶다는 마음만은 한 가득. 그게 바로 사춘기이고 10대의 마음이겠죠.


<크로우즈 제로>와 <크로우즈 제로2>에는 그런 '복잡한 심정'이 작품 전체에 틈입해있습니다. 작중의 인물들이 행하는 폭력과 무의미해 보이는 싸움, 그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로서는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 10대들만의 고민과 존재 양식이 숨어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작품의 OST인 <I Wanna Change>에서 그러한 메시지가 아주 뚜렷하게 보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변하고 싶다고. 허스키한 보이스로 뿜어져 나오는 가사를 듣고 있다 보면, 절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PTtYRh3eOD8 )

영화의 OST, The Steerts beats의 <I Wanna Change>


끝으로

복잡하게 따지고들 것 없이, 한가한 시간에 생각 없이 보기 좋은 영화인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게 일단 타키야 겐지 역의 오구리 슌과, 세리자와 타다오 역의 야마다 타카유키가 정말 멋있거든요. 문득 그 당시에 왜들 그렇게 바지와 벨트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는지 알 것 같더군요.


그럼에도 하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크로우즈 제로>의 이야기는 '창작물'로 바라볼 수 있지만 한국 영화 중 소위 양아치를 다룬 작품은 다른 층위에서 접근해야한다는 겁니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폭력이든 설정이든 현실감이 넘치는 데다가, 그런 부류의 이야기에는 필연적으로 피해자의 존재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서 다분히 각색되고 낭만적으로 묘사되었다면 더더욱 문제입니다. 누군가는 '추억' 운운할 수 있는 기억인지 몰라도 그 시간을 함께 했던 피해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지옥 같은 순간이었을 수 있으니까요.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어보지요.


매력이 철철 넘치는 두 인물 타키야 겐지(좌), 세리자와 타마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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