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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Feb 12. 2020

임자의 침묵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


지난 2월 7일, 늦게나마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몇몇 생각을 짧게나마 남겨봅니다.




1.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인간적이다. 아니, 한심하다는 게 정확하다. 딱히 어른스럽지도 않고, 감정에 흔들리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높은 자리에 위치한 인간이라고 해서, 그에 걸맞은 품격과 능력을 겸비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이.


스스로의 의중은 드러내지 않은 채,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일방적인 충성을 종용한 후 끝끝내 내치고야 마는 박 대통령과 그나마 상식인처럼 묘사되지만 사명감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될 뿐, 굴종을 견디지 못했을 뿐인 김 부장. 무소불위의 권력을 뒤에 두고 그 자신이 대통령인 양 기세 등등하게 행동하는 곽 실장.


김 부장과 곽 실장.

위의 세 사람이 아닌 다른 인물이라고 다를 게 없다. 자기 보신과 명예, 욕망, 제각각의 기준을 두고 눈알을 굴리며 무게를 달아보는 이들의 모습은, 사사로운 욕망 사이에서 곧잘 흔들리는 우리를 보는 것 같다. 영화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심에 서있던 자들의 민낯을 드러낸다.


그들 모두가 우리와 똑같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이성적인 판단보다도 눈앞의 욕망에 갈팡질팡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쉽게 잊히곤 한다. 저 높으신 분들 또한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그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2.

작 중에서 박 대통령은 김 부장과 그 전임자였던 박용각에게 '임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는 말을 내뱉는다. 그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토사구팽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임자'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좀 더 집중해보는 것도 좋겠다.


임자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물건의 주인, 물건을 통제할 힘을 가진 존재, 배우자를 부르는 말. 혹은 허물없는 상대를 부를 때 쓰는 말. 박 대통령이 사용한 '임자'의 의미는 마지막 용례에 해당할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에서 진짜 '임자'는 박 대통령 본인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임자', 박 대통령.


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 제 손에는 피를 묻히기 싫으며, 아랫사람에게 비위를 맞추게끔 하여 그 위치만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하는 이. 주인인 동시에 통제력을 가진 존재가 대통령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이 모든 것을 은근히 '너'를 위한 것이라 말한다.

나는 네 옆에 있고, 네 뜻이 나의 뜻이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중요한 때에 임자는 침묵한다. 결과가 닥쳤을 때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며, 애초에 임자가 무엇을 바랐는지 알 수도 없다.


임자를 불러 세운 것은 우리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임자의 존재를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이미 임자는 우리 옆에 있고, 은근히 그에게 무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100% 반영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관객에게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다면 만듦새의 문제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제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한들, 그 과정과 수단에 있어서 곡해가 있었다면 본말전도다.


영화가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기능한다는 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끝내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향한 김 부장의 선택을 '역사가 제 궤도에 갈 수 있었으나, 끝내 역행하고 말았다'는 식의 연출이 의미하는 바도 모호하기 그지없다.


역사에 IF가 없다는 식의 해묵은 말까지 꺼낼 필요도 없다. 역사의 흐름은 어떤 개인, 특정한 인물의 선택에 오롯이 달려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한 가정은 흥미를 유발하기에 그럴싸할지는 몰라도, 의미 있는 논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비추는 한국 현대사는 정치와 역사가 몇몇 신화적 인물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인상을 강화할 공산이 크다. 그들의 영향을 아예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거대한 물줄기의 방향을 틀 수 있었던 건 소수의 선택이 아닌,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모두'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0.

영화의 재미는 보장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고, 연출과 전개에서 드러나는 분위기는 시종일관 관객을 압도한다. 인물의 관계에 주목해서 보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상사를 대하는 부하의 고충을 느껴본다거나, 이해득실 속에서 우정이나 충성 따위의 인간적 감정이 흔들리는 양상을 지켜볼 수 있다.

배우의 연기 중 몇 가지 이야기하자면, 곽 실장의 행동거지하며 말투는 인물의 성격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의 모습은, 배우의 연기를 통하여 육화해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또한 막걸리나 양주, 담배 따위의 소품을 인물의 성격과 작 중의 상황을 담아내기 위해 적절하게 활용했다.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모습 때문에 미화라는 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다. 특히나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상대적인 후광 효과도 있는데, 그렇다고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닐 것 같다.


대통령의 자금줄을 맡고 있는 존재 '이아고'는, '전 장군'일 것이라 암시될 뿐 극의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고 갈등을 촉발하는 소재에 그친다. 대통령의 비자금을 챙겨 나오면서 대통령의 책상을 바라보는 그의 미묘한 시선은 권력이라는 욕망과 그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존재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영화를 두고 좋다, 나쁘다거나 어떻다는 둥 일방적으로 감상을 늘어놓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이 영화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건 참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즐기기에는 부적합한 영화인듯도 합니다.


사실 감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므로, 무어라 하든 직접 보지 않고는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그러니 영화가 내리기 전에 한 번 쯤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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