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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Feb 27. 2020

사이비가 나쁜 이유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여기.

어머니의 걱정이 조금 달라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흉흉한 요즘, 어머니로부터의 전화가 부쩍 잦아졌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 번이었나, 그랬던 것이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신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아들이 걱정되시는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대구에 계시는 부모님 쪽이 훨씬 염려된다.


부모와 자식의 입장을 똑같을 수가 없나 보다. 전화의 내용은 항상 비슷비슷하다. 외출할 때 마스크는 끼고 다니는지, 손은 잘 씻는지. 기초적인 위생은 물론이요 사람을 만날 때도 조심하라며 거듭 당부하신다. 특히 주변에 신천지 신자가 없는지, 혹여 종교와 관련해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주의를 기울이라며.


성당을 오래 다니신 어머니가 이런 우려를 보이신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와 신천지가 연관되자 한층 더 불안이 커지신 게 아닌가 싶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아들놈이 어디서 뭘 하는지 어머니로서는 전화로 전해 들을 수밖에 없으니. 우려하시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때마다 괜찮다며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실제로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 쉬이 납득하기 어려우신가 보다. 그렇게 경고에 또 경고를 반복하시면서 찝찝하게 짧은 통화를 마친다.


종교와 사이비, 그 경계에 대하여

비신자가 보기에는 종교와 사이비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나 또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모태신앙으로 삼고 있지만, 기실 비신자와 하등 다를 바 없다. 나로서는 신 그 자체는 물론이요 천국과 지옥으로 대표되는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도 불분명해 보이거니와, 삶을 종교적 신념에 의탁하고픈 마음도 없다.


그럼에도 종교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종교이단, 그리고 사이비는 서로 엄밀히 구별되어야 하며, 그 기준도 존재한다. 종교와 이단, 사이비는 모두 개인을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며, 개인을 집단으로 묶어내는 기준이 된다는 것. 하지만 사이비의 경우 개인은 물론 나아가 사회 전체를 좀먹는다는 점이다.


교리의 차이로 갈라선 것이 종교와 이단이라면, 사이비는 그 목적 자체가 애당초 종교가 추구하는 개인의 구원이나 깨달음에는 있지 않다는 것. 교리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여 내적 결속을 공고히 하고, 구성원을 착취하고 세를 늘리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사이비다.


사이비(似而非)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로, 겉으로는 보편적으로 신흥종교 중에서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의 뜻으로 쓰인다
출처 - 위키백과


그 믿음은 우리를 배신한다

넷플릭스(Netflix)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세계를 설명하다>의 두 번째 시즌 중 사이비 종교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 <믿음의 함정>이라는 영상이 있다. 처음 영상을 볼 때만 해도 넷플릭스를 보는 이의 전반적인 심리가 그렇듯 시간이나 때울 겸 흥미로만 틀었다가 의도치 않게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의 고민을 글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이어나간 것이 다음의 글이다. 브런치에 해당 영상을 소개할 겸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고자 했다. 요는 '종교로 대표되는 외부적 가치에서 구원을 바랄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나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자'는 이야기였다.


https://brunch.co.kr/@keepingmemory/128


물론 사이비의 문제를 삶의 태도로 환원할 수는 없다. 인간이 사이비, 아니 종교에 빠져드는 이유를 어찌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비이성적인 선택의 이면에는, 당사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맥락이 존재한다. 설령 그것이 제삼자에게는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한 이들 모두가 이것은 나쁘지 않고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한정된 정보만을 제공한다누군들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일상의 곳곳에서 순박한 얼굴을 한 채 다가오기를 계속한다면? 개인은 이런 상황에서 예상 이상으로 나약하다.


그래서 사이비가 나쁜 이유는

사이비가 나쁜 이유라며 거창하게 시작해놓고 한참을 빙빙 둘러왔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사이비주변으로부터 시작해 사회 근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에 나쁘다. 비단 금번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해 신천지 신자들의 비이성적인 행동만을 포함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타인에 대한 신뢰 여부를 두고 항상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야한다는 게 이미 상당한 문제다. 건강하려면 적정한 수준의 스트레스가 필요하다지만, 늘 긴장을 놓치지 못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하물며 생판 모르는 남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이인 친구나 가족조차 의심해야 한다면?


신뢰는 형태가 없다 보니, 그 값어치를 매기기 어렵다. 평상시에는 가치가 있는지도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물론이요,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신뢰는 빛을 발한다. 공포를 이겨내는 이성의 바탕에는 내 주변에 대한 신뢰가 놓여있다. 그렇지 않다면 불안과 공포에 잡아먹히고 만다.


여기서 악순한이 생겨난다. 그럴싸한 확신으로 위장한 거짓 정보와 사이비 따위에 빠져들게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주변의 정보를 신뢰할 수 없으니 냉소적으로 변하거나, 무기력해진다. 개인으로서는 이런 상황을 쉽게 헤어나올 수 없다.


의심암귀가 내려온 자리

불신이 가득찬 상황에서는 무엇도 의지할 수 없다. 하물며 전염병과 같이 실체가 없는 대상을 마주할 때는,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쉬우며 이는 우발적인 행동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극단적으로는 폭력이나 집단적인 소요라는 형태로 분출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더욱이 여기에는 사이비마저 연관되었다.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를 좀먹어가는 그들의 행태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쉬쉬해오지 않았는가. 그들의 행태는 이전에도 문제였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쉽게 돌이킬 수 없다.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으며, 불안과 공포가 증폭된 채로 장기화되어가고 있다. 누구 하나의 잘못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분명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신뢰라는 기반 자체가 무너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 사태가 종식되면 잊혀지기를 바래야할까? 그래도 문제다. 의심암귀는 이미 우리의 주변에 자리잡고 말았으니.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는, 서로 다른 '우리'를 더이상 예전과 같은 신뢰가능한 존재로는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이 상처는 전염병보다도 더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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