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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Mar 05. 2020

모든 형제들을 위하여

영화 <싱 스트리트(2016)>

나와 동생

저에게는 3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습니다. 형제지간이라고는 하나 평상시에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어쩌다 한 번씩 용건이 있을 때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냅니다. 데면데면한 걸 넘어서서 건조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이죠. 그러나 당사자인 저는 그 이상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어쩌면 동생도 그럴 겁니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좋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관계. 그래서인가 우애가 돈독한 형제를 볼 때면 복잡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괜한 의심에서부터 뭐가 됐든 대단하다는 순수한 감탄과 밑바닥에 깔린 은근한 부러움까지. 그 느낌은 한 단어로는 표현하기 힘듭니다.


딱히 형에게 요구되는 무언가를 해본 적도 없어서, 스스로 형답다고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그걸 느껴볼 새가 없었던 건 동생도 마찬가지겠죠. 맞이, 장남이라고 하면 부여받는 무언가. 영화 <싱 스트리트>에는 모든 형과 동생에게 해당될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영화 <싱 스트리트(2016)> 존 카니 감독


영화 <싱 스트리트> 요약

영화 <싱 스트리트>의 줄거리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소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작정 밴드를 시작한 소년의 이야기. 물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세부적인 디테일 하나하나가 영화가 지닌 매력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앞의 한 문장은 썩 훌륭한 요약은 아닙니다.


1980년대 아일랜드라는 시공간이 가지는 독특한 역사성과 사회적 분위기를 배제하면 영화는 흔한 로맨스에 그치고 말았을 겁니다. 서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인물과 사건, 배경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독특한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영화 <싱 스트리트>의 인물과 사건도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개성을 가진 셈입니다.


그러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서사 속에서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내용의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연출 등을 다면적으로 다루어야 하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한 가지 주제에 국한하려고 합니다. 바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형제, 코너와 브랜든 그리고 모든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화기애애 보이는 이 형제에게 무슨 문제라도?


이토록 현실적인 형제라니

영화의 초점은 코너(퍼디아 윌시 필로 분)에게 맞춰져 있지만, 다른 등장인물이 아니었더라면 영화가 지닌 호소력은 빛을 바랐을 겁니다. 특히나 코너의 형, 브랜든(잭 레이너)는 코너에게 음악으로 여자를 꼬시려면(?) 제대로 하라며 꾸짖는 건 물론, 그 후로도 계속되는 밴드 활동에 음악적 단서를 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렇다고 음악적 후견인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브랜든은 코너의 밴드 활동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니까요. 어디 한 번 할 테면 해보기나 하라는 식으로 견본만 툭 하고 던져주었을 뿐. 그런데 이게 웬걸, 브랜든의 예상보다 코너의 밴드 활동은 훨씬 진지했고 결과물도 훌륭했으니.


브랜든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겁니다. 이게 내 동생이라고? 아마 두 사람은 서로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별로 알지 못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이 형제는 혈연이라는 강하면서 어쩌면 빈약한 고리로 묶여있었을 뿐, 남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인가 이 형제의 관계는 딱히 돈독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이전에는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겠죠. 코너는 불황으로 인해 전학을 가게 되었고, 우연히 라피나(루시 보인턴 분)를 만나 그녀의 관심을 끌어보고자 '밴드를 한다'며 백지수표부터 던졌을 따름입니다.


코너의 주변에 음악에 관심이 있었던 건 브랜든 정도였을 테니, 그제야 형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겠죠. 물론 그 후 밴드 활동에서 활약하는 건 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들입니다. 프로듀서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밴드 '싱 스트리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특히나 로버트(에이단 길렌 분)는 어쩜 그리 재능이 뛰어난지 악기를 다루는 일은 물론이요 척하면 척, 코너의 머릿속에만 있던 악상에 형태를 입혀 현실에 구현해놓습니다. 그 외의 멤버들도 뮤직비디오의 촬영이며 악기 연주 등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멋지게 수행해냅니다.


동네 싱 스트리트(Synge Street)에서 따온 밴드 '싱 스트리트(Sing  Street)'의 멤버들


코너의 열정, 급조한 멤버들의 예상 이상의 실력 덕에 밴드 '싱 스트리트'의 활동은 순항합니다. 예상 이상으로 그들이 만든 음악도 훌륭하거니와, 당초 코너가 밴드를 시작했던 주된 목적인 라피나와의 관계도 부쩍 진전되었으니까요. 그러나 밴드 활동만이 영화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제부터죠. 형제간의 이야기는.


모든 장남과, 모든 차남의 문제

그때부터일 겁니다. 코너를 바라보는 브랜든의 감정이 달라진 것은. 물론 영화에서는 자세히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영화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죠. 단적으로 영화 후반부, 끝끝내 별거를 선언한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해야 자신의 공연에 초대할 수 있을지 조언을 구하는 코너에게 브랜든은 버럭 화를 냅니다.


자신이 어렵사리 얻어낸 것을 너는 너무나 쉽게 손에 거머쥐었다고. 그걸 알기는 아냐고. 지금의 너와 같이 나도 과거에는 열정이 있었노라고. 코너는 브랜든의 말을 듣더니 자리를 피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립니다. 형의 노고를 모른 척 해온 자신이 부끄러웠다거나, 미안해서는 아니었을 겁니다. 뭔가 다른 느낌이었겠죠.


형 브랜든(좌)과 동생 코너(우)


이 문제는 코너와 브랜든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의 모든 형제가 한 번쯤은 느껴봤을 불공평함에 대한 것이니까요. 형은 형이라는 이유로, 동생은 동생이라는 이유로 의무와 책임, 그리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그 영역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죠.


각자가 누리고 있는 혜택은 아주 선명하게 알 수 있지만, 무엇을 책임지고 있는가는 알기 어렵습니다. 형의 입장에서는 동생은 천덕꾸러기에 불과하고, 동생의 입장에서 형은 몇 살 일찍 태어난 걸로 유세나 부리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고충이 있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인간

가깝게 느껴지는 사이일수록, 정작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라고 다를 게 없죠. 가족이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니까 그런 변변찮은 이유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여깁니다. 정작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있으면서도 말이죠.


가족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이고,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누군가가 아닌 인간으로서 먼저 마주해야 합니다. 형과 동생의 관계로 돌아가 보죠. 형에게 있어 동생은 철부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본인은 어렵게 쟁취한 걸 동생은 아무 노력 없이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게 어디 '동생'을 탓할 문제인가요?


자기 덕에 동생이 누릴 수 있다면 그 부분을 있는 힘껏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걸요. 혹은 딱히 자신의 노력이 엄청난 게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부모도 처음이라서 익숙하지 않았던 걸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 모든 게 '자기 사정'에만 시선이 가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죠. 눈앞의 인간은 보지 못한 채.


형제가 서로를 모르듯 어머니 또한 자식을, 자식 또한 어머니를 모릅니다.


브랜든도 속으로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자신이 코너에게 화를 내는 건 투정에 불과하고 '형답지 못하다'는 걸요. 른답지 못했다는 걸. 브랜든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동생인 코너가 아닌 걸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열폭'을 브랜든 스스로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코너 또한 브랜든의 말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해오던 걸 '타인'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가족이라도 타인입니다. 그들은 아주 가깝지만, 내 인생까지 책임져주지는 못합니다. 코너는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코너는 브랜든에게 한 번 더 부탁합니다. 부모님이 자는 틈을 타서 자신과 라피나의 밀항을 도와줄 수 없는지. 브랜든은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브랜든도 가족, 그리고 형제라는 이유로 동생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던 겁니다. 결심했다면 그 선택을 존중하고, 있는 힘껏 믿어줄 수밖에.


지금이 아니면 떠날 수 없으니까

브랜든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합니다. 자그마한 요트에 몸을 싣고, 비바람을 헤치며 나아가는 코너와 라피나.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거라는 듯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배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다음의 노래가 흐릅니다. 


싱 스트리트 OST - Go now ( 링크 :  https://youtu.be/xIY_b10iehY )


지금이 아니면 떠날 수 없다는 내용의 가사는, 마치 코너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동생이 한 선택을 존중하고 등을 떠밀어주는 브랜든의 마음이 연상됩니다. 브랜든 그 자신은 가정 상황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가지고 있던 꿈을 포기한 채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죠.


그런 브랜든이 시간 날 때 만들어봤다며 코너에게 직접 쓴 가사를 건네주었죠. 아마 이 노래는 그런 브랜든의 심정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브랜든은 동생마저 자신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는 걸 원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지금 브랜든의 처지가 처지인지라 동생에게 대단한 걸 해주지는 못하지만요.


그래도 동생의 음악 활동을 도와준다거나 영국으로의 밀항을 도와주는 정도는 할 수 있죠. 적어도 그것이 무모하니 그만두라고 다그치지는 않는 딱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망설일 바에야 지금 당장 떠나라고 머뭇거리는 발걸음에 힘을 보태어 줄 수는 있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으니.


For Brothers everywhere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이라는 이유로 우리들 스스로에게 기대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상대의 미래를 억압하거나, 현재의 자유를 앗아가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제아무리 친분이니 혈연이니 나름의 이유를 들먹인다고 해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이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영화 <싱 스트리트>는 모든 형제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의 음악들도 좋았지만, 브랜든과 코너 두 사람이 대변하는 관계의 미덕 또한 훌륭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다른 인물들과 '신뢰' 내지는 '의리'가 바탕이 된 관계도 훌륭했지요.


존 카니 감독의 전작을 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 저만 해도 <원스>랑 <비긴 어게인>은 한 번도 안 봤거든요. 음악 영화가 낯선 분들이라도 이 영화는 감히 추천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일단 '사람'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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