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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Mar 14. 2019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3.14

9. 화이트데이

오늘은 3월 14일, 화이트데이입니다. 밸런타인데이를 비롯해 이런 종류의 기념일은 제과회사의 상술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이런 걸 구실로 삼아 뭐든 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좋은 거고,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으면 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니까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지요. 한 가지 생각해볼 지점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날이나 시기의 시작과 끝을 명료하게 다른 일상으로부터 구분해낼 수 있는 걸까요? 그러니까 화이트데이는 정확히 3월 14일 00시 00분에 시작해 같은 날 23시 59분이면 끝이고, 그 이후는 다시 평소와 같은 일상이 되나요? 화이트데이가 오기 전에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관련 상품을 매대에 내어놓고, 설령 끝이 나더라도 며칠 동안은 계속 진열이 되지 않던가요?


저에게는 화이트데이라고 하면, 동명의 게임 화이트데이: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이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기념일로 대표되는 비일상의 순간과 평상시의 삶인 일상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달라지는 건 사람의 마음가짐뿐인데 말이죠. 달력에 매일매일을 별개의 숫자로 표기하는 것부터 이미 일종의 의미 부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오늘, 3월 14일도 사람들이 편의상 1년을 365일로 정하고, 그 1년을 또다시 12달로 나누어 세 번째 달의 14번째 날에 해당한다고 정했을 따름입니다. 만약 달력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나 오늘만 있을 뿐 하루하루가 다를 게 없는, 해가 뜨고 지는 나날의 반복일 겁니다. 계절이 바뀌니까 그에 따른 차이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적도 부근에 위치한 나라들처럼 1년 동안 계절의 변화가 거의 없다면 또 다를 수 있겠군요.


이래저래 사족을 달긴 했지만, 현대인은 달력을 비롯해서 날짜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의미 없는 가정입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고부터 만들어냈던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가 달력이었으니까요. 한 해 농사에 집단의 흥망이 걸려있으니 작황에 영향을 미치는 계절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구체적인 날짜로 표기해 후대에까지 이어지도록 했을 겁니다. 그 후손인 우리 역시 달력을 통해서 한 해의 대략적인 흐름을 예상해보고, 그에 따른 방침을 결정하고 있지요.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만큼 농경이 우리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우리가 기념하는 순간들도 바뀌었다는 거겠죠. 


우리는 이제 화이트데이 같은 명칭을 붙여 한 해의 특별한 순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매년 특정한 날을 정해두고 기념한다는 점에서 절기와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절기는 어떤 시기의 시작을 대략적으로 알릴 뿐, 그날 하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 기념일은 시작과 끝이 한 번에 함축되어있다는 게 차이점이겠네요. 둘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어떤 특정한 시기가 다른 시기와 명백하게 구별되고, 나아가 그 시작과 끝을 확실하게 가늠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건 아닐까요? 이에 관한 논문과 자료를 찾아본다면 꽤나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인의 시간 감각이 지난 시기에 비교해서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죠.


주제를 하나 정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 글도 앞으로 써보려 생각 중입니다. 그러나 '하루에 짧은 글 한 편'에서는 그러지 않으려 합니다. 의도와 다르기도 하고, 이런 의문 하나하나를 쌓아가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오늘은 화이트데이이고, 반감 혹은 기대감 같이 보편적인 반응과 더불어 제각각이 남다른 소회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말들이야 온전히 그들의 진심은 아니겠지만, 우리 자신이 적지 않게 기념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구나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날짜와, 시기의 개념이 이제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모쪼록 화이트데이에, 사랑하는 연인과 혹은 함께 하고픈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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