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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Apr 09. 2019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4.8

26. 산책


요 며칠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면, 무한정 방구석에 틀어박혀 죽치고 있는 성격이라서 실감할 기회는 따로 없었습니다. 문을 잠깐 열고, 잠깐 환기를 하는 정도가 다였죠. 오늘은 병원에 가야만 해서 모처럼 밖으로 나갔습니다. 평소라면 예약 시간까지 빈둥거리다 늦을까 봐서 갈 때는 버스를 이용하고, 돌아올 때만 걸었는데 이번엔 처음부터 걸어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느긋하게 햇살을 쪼일 겸 해서요. 자취방에서 병원까지 약 30분 정도 걸어야 하니까, 왕복에 1시간 걸리는 셈이니 산책이라 말하기엔 조금 긴가요? 제가 밖에 나가는 건 좋아하지 않아도 걷는 건 좋아해서 예전에는 2시간 거리도 별생각 없이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그때는 대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10년 정도 지났지만, 지금이랑 별반 다른 건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보다는 집에 있는 쪽을 좋아했고, 뭘 하든지 가급적 혼자서 하는 게 익숙했죠. 지금과 한 가지 다른 점은 모든 걸 바꿔줄 거라며 큰 기대를 품었던 대학생활이 알고 봤더니 별 거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는 일종의 자포자기로 그랬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서울에 올라와 대학교를 다니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었습니다. 나 자신이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 주변이 아무리 변한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으니까요. 산책을 하는 이유도 서울 거리를 무작정 배회하고 있으면 뭐라도 일어날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도를 아냐는 질문과 관상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던 게 전부였죠.


그래도 산책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낯설기만 했던 서울이란 도시에 애정을 가지게 해 줬으니까요. 동대문 근방에서 종각, 그리고 광화문까지 대로를 따라 걷기도 하고, 청계천을 따라서 걸어보기도 했지요. 대로변을 따라 걸으면 낮이든 밤이든 시간에 상관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큰길 위에 있으면 덜 불안했죠. 골목길은 낮이 아니면 일부러 가진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니 낯선 것에 대한 불안감 탓에 골목 쪽으론 다녀본 적이 거의 없네요. 화창한 날씨에,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청계천을 따라 시청 광장까지 걸었던 날은 괜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오래 걸어서 그런지 허리가 뻐근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일종의 훈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이만큼이나 걸었다, 그런 거죠.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애착을 가지게 된 계기도 산책이었습니다. 골목 구석구석을 눈에 익히면서 숨어있는 요소를 발견하는 일이 참 재미있었거든요. 햇수로 5년을 살았으니 어지간하면 전부 돌아다녀본 것 같은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롭습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취방 근처의 교회 앞에 벚나무를 심어놨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저녁에도 친구와 함께 모처럼 식사를 하러 나갔더니, 새롭게 들어온 식당을 발견하곤 놀랐죠.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게 변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 직접 느끼는 순간엔 대단한 사실이라도 발견한 것 같아서 놀랍습니다. 익숙하고 잘 안다고 믿었던 것도 변하기 마련이니, 항상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지요.


오늘 산책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날씨가 좋은 거야 두말할 거 없고, 미세먼지 수치도 좋았으니까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예전엔 미세먼지를 신경 쓰지 않고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말이죠. 하여간 너무 덥지도 않았고, 바람도 불어서 괜히 조금이라도 더 걷고 싶은 날씨였습니다. 앞으로도 날씨가 이렇게만 화창하면, 가까운 시일 내로 청량리역 앞에 안내된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아직 돌아다녀보지 못한 곳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네요. 뭐, 그래도 내일은 집에 있기야 하겠지만. 언젠가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는 걸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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