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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Oct 28. 2017

기억을 지우는 방법

9번의 이별에 관하여

1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지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정은 간단하다. 터치 한 번으로 카메라를 구동시키고, 터치 한 번으로 사진을 찍고, 또 터치 두 번으로 사진을 지우면 되니까. 하지만 이 간단한 과정도 가끔은 멀고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사진을 지우려고 할 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기록 사진도 자꾸만 지우기 망설여진다. 두 걸음만 걸으면 훨씬 깨끗한 외장하드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내 외장하드는 2TB 이상이 전부 사진과 동영상이다. 


사실 저장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그 사진이 담고 있는 것들이 종종 불편하게 할 뿐이다. 20살 못난 시절의 얼굴도 사랑해줄 수 있고, 술 먹고 뻗은 날 친구가 찍어준 웃긴 사진도 이젠 덮어둘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짐이 되는 그런 사진이 있다. 바로 지나간 사람들에 대한 사진이다. 


뭐 그리 많은 셀카를 함께 찍었고, 왜 이렇게 살뜰히 백업해뒀는지. 누군가 나의 외장하드를 뒤지기라도 한다면 과거에 대한 촘촘한 기록에 놀랄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지우는 것은 일도 아닌데, 쉽사리 지워내질 못했다. 내 일상의 조각들이고, 내 과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바꾼 것은 9번째 이별을 겪었을 때다. 매일 같이 꿈을 꿨고, 매일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고 다 잊었다고 생각한 어느 날, 외장하드에서 필요한 사진을 찾다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쉽사리 상자를 닫지 못하는 나를 보며 마음먹었다. '이 기억을 격하게 잊어주겠다'라고. 


그 날로 지우개를 사 왔다. 차마 분쇄기에 넣을 수 없던 사진 몇 장을 꺼내 지우기 시작했다. 

2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 당수 클레멘트 고트발트는 프라하 구 시가 광장에 운집해 있는 수십만의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 광장 앞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궁전 발코니에 섰다. (중략)
고트발트의 주변에는 그의 동지들이 늘어서 있었고, 바로 곁에는 클레멘티스가 바싹 붙어 서 있었다. (중략)
당의 선전부는 발코니 위에서 털모자를 쓰고 동지들에게 둘러싸인 채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고트발트의 사진을 수십만 장이나 찍어냈다. (중략)
4년 후, 클레멘티스는 반역자로 고발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의 선전부는 즉시 그를 '역사'로부터 지워버렸기 때문에 모든 사진에서도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이후에는 체코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발코니 위의 사진에는 고트발트만이 홀로 서 있게 되었다. 클레멘티스가 서 있던 고트발트 옆 자리에는 궁전의 공허한 벽이 있을 뿐이었다. 사진에 남아 있는 클레멘티스의 자취는 그가 고트발트의 머리에 씌워 줬던 털모자뿐이었다. 

3

아홉 번의 연애는 아홉 번의 이별이 되었고, 9장의 이미지는 9개의 기억 무덤이 되었다. 




브런치를 통해서는 처음 공개하는 개인 작업물입니다.

개인적으로 3년 전부터 시작해 작년에 작업을 마치고, 이 작업과 앞으로 공개할 또 하나의 작업으로 독일에서의 학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종종 작업물이나 프로젝트를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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