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한 마지막 3일
그녀를 아는 누구나 예상했던 순간이다. 그 시간이 조금 빠르게 혹은 느리게 와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침상에서 겨우 일흔을 넘겼다. 내 눈이 기억하는 그녀는 항상 마른 체형이었지만 침상에서 스스로 일어날 수 없게 된 이후론 더욱 앙상해졌다.
최근 한두 달은 마치 5분 대기조와 같은 모습이었다. 남쪽에서 전화가 온 날은 밤을 새 운전해 달려가기 일쑤였다. 안개가 메운 고속도로를 달리며 그녀가 보는 세상은 이런 모습일까 생각했다. 유독 안개가 심해 운전하기 힘들었던 날, 이제 막 병실에 도착한 나의 손을 잡으며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나에게 말을 했다.
"느그 어매 말 잘 들어라잉"
"할부지에게 자주 연락허고"
일 년에 한두 번 남쪽으로 오는 손주들이 떠날 때마다 하는 유일한 잔소리이자 부탁. 늘 그렇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내게 남긴 마지막 두 마디였다. 마지막 부탁을 남기고 그녀는 처음 우리에게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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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그녀의 이름이 낯설다. 상조회사에서 빌려준 상복으로 갈아입고 장례식 로비에 들어섰을 때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에게도 마지막 3일을 보내게 될 광주가 낯설지 않았을까. 목포에서 태어나 작은 시골 마을로 시집을 갔고, 평생을 그 도시에서 보냈다. 서울이 시끄러웠던 그녀에게 지금의 광주는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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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울기도 했고, 멍하기도 했다. 그러다 아빠 친구들이 오면 작은 미소와 함께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2일째가 되자 장례식장에는 술과 화투가 많아졌다. 웃음도 큰소리도 잦아졌다. 슬픔에 벅차오르진 않았지만 그 시공간이 이상했다. 이상해서 적기 시작했고, 이상해서 찍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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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신 사람으로 북적일 때도, 막내딸의 교회 지인들이 찾아와 기도를 할 때도 말없이 앉아있던 할아버지.
"임자 인자 편히 쉬소"
이 말과 함께 그는 엄마 잃은 딸을 위로했다. 그리고 화장터 앞, 유독 꽃이 많은 화단에 앉은 내게 말했다.
"아야 이 꽃이 무언 꽃인지 안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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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남쪽으로 가면 언제든 그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 부탁을 다 들어주고도 해냈다고 말할 사람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