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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May 18. 2020

2년 동안 김밥을 끊었습니다

김밥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주말 오후, 빈둥거리며 책을 읽다가 뜬금없는 추억이 소환됐다.


엄마 "점심 뭐 먹을래?"

나   "음... 뭔가 건강에 좋을 것 같으면서도, 맛이 없지 않고! 화려해 보이지만 소박해 보이는 그런 느낌?"

엄마 "뭐라는 거야. 그래서 그게 뭔데?"

나    "가령... 김밥? 참치 김밥이나 멸추 김밥!"

엄마 "웬 김밥 타령이야? 한동안 안 먹더니?"


그러게. 나는 왜 뜬금없이 김밥이 먹고 싶어졌을까. 나에게 김밥은 그리 반가운 음식이 아니거늘. 내 기억 속에 김밥은 긍정의 느낌보다는 부정의 느낌이 강하다. 김밥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살짝 풀어보면, 첫 번째는 다이어트를 심하게 할 때였다.


건강한 몸매를 갖고 싶어서, 청바지 안에 티셔츠를 넣고 입고 싶어서, 좋아하는 남자에게 대시를 해보고 싶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나는 갑자기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됐다. 다이어트야 평생의 숙원사업이라 주변의 반응도 '또?' '이번에는 얼마나 가려나'와 같은 반응이었다. 나 역시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양한 방법의 다이어트를 시도했고, 다양하게 폭망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한약 다이어트를 하게 되었다. 한약 다이어트라고 하면 다들 입맛 떨어지게 하는 약 먹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체중이 확 줄었다가 엄청난 요요를 경험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소개받은 곳은 그런 한약이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은 처음부터 '약만 먹어서 살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약은 몸을 순환시키고 건강하게 해주는 것일 뿐 절대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엄격한 식단 관리와 매일 1시간씩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약 값을 결제하기 위해 카드를 내밀며 다짐했다. 비싼 약 먹는 만큼 독하게 한 번 해 보자! 결과적으로 6개월 만에 17kg 감량에 성공했다. 5년이 지난 지금 약 5kg이 다시 찌긴 했지만 엄청난 요요를 경험하진 않았다. 꾸준히 음주 가무를 즐긴 덕분에 뱃살이 차곡차곡 쌓였으니까. (다이어트 스토리는 제대로 한 번 끄적일 예정!)


한약 다이어트를 할 때 나는 매일 식단 노트를 작성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한의원에 가면 숙제검사를 하듯, 선생님은 내 식단 노트를 보고 어떤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음식이 살이 찌고, 나와 잘 맞지 않는지 등 다양한 피드백을 해주셨다. 그중 '김밥'은 의외로 살이 많이 찌는 음식이고, 밖에서도 간단히 먹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자주 애용했던 음식이었는데 웬만하면 먹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만약 김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면 반줄만 먹도록! 어찌 김밥 한 줄을 다 먹지 못하게 하는지 서러웠지만 칼로리가 꽤 높다는 말에 최대한 절제했다. 물론 1/2은 아니고, 2/3를 먹었던 건 비밀!


인생을 살다 보면 금기시되는 것들이 더 그립고, 안달 나고, 갖고 싶어 지는데... 다이어트를 할 때의 나에게 김밥이 그런 존재였다. 마음 한편에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김밥 세 줄을 사다가 한 번에 먹어치우겠어!'라는 아주 유치한 복수심을 갈기도 했다.


그러나 김밥과의 얄궂은 운명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방송작가로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쉽게 먹는 음식은 김밥이다. 끝나지 않는 회의를 할 때, 촬영장을 이동하는 차 안에서, 스튜디오 녹화를 하는 날! 스태프들에게 가장 많이 주어지는 음식이 바로 김밥이다. (물론 4-5년 전부터 근로환경이 나름 좋아져서 도시락을 먹거나 식당에서 직접 밥을 먹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과거에는 김밥이라도 먹으면 감사할 지경이었다.) 바쁜 와중에 뭘 펼쳐놓고 여유롭게 시식할 수도 없고, 열 번 정도 손가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집어먹으면 되는 김밥이야말로 최적의 음식이 아니겠는가. 일을 하면서 참 많이도 먹었을 김밥. 어느 브랜드가 내 입맛에 맞는지까지 생각하게 될 때쯤 나에게 비보가 날아왔다.


나     "나 아무래도 체한 거 같아."

후배  "언니! 뭐 잘못 드셨어요?"

나     "나 오늘 먹은 거 김밥밖에 없는데..."

후배  "아까 차 안에서 급하게 드시더니 체한 거 아니에요?"


꼭두새벽부터 시작된 촬영은 최소 자정이 되어야 끝날 것 같은데, 한 겨울에 추위에 떨다가 차로 이동하는 시간을 이용해 급히 먹은 김밥이 제대로 체한 것. 마지막 촬영 장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식은땀을 흘리다가 화장실에 가서 먹은 걸 다 게워냈지만,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천장은 빙글빙글 돌았다.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집에 먼저 가도 되겠냐는 말을 꺼내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참고 있다가 내가 해야 할 일을 겨우겨우 마친 뒤 택시를 타고 급히 귀가했던 기억. 나는 그날 이후 끔찍한 고통에 신음하며 다시는 김밥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솔직히 평생을 먹어온 음식인데 단 한 번의 실수로 열외를 시킨다는 현실이 가혹했지만 특정 음식을 먹고 체해 본 사람들은 내가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하리라. 그렇게 나는 2년이 넘도록 김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나의 녹화 메뉴는 단팥빵 또는 샌드위치, 이마저도 없으면 그냥 굶어버렸다. 김밥을 먹고 또 체하느니 굶어 죽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최근에 말았던 김밥. 참치를 넣지 못해 아쉬웠다.

약 2년 후, 다시 김밥을 먹게 되었을 때 나는 개안을 한 사람처럼 '아! 이 맛을 내가 어떻게 잊고 살아! 이 맛있는 걸 어떻게 안 먹어!'라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날은 아주 다행히 김밥을 먹고도 체하지 않았고, 덕분에 2년간 거들떠보지도 않던 김밥을 다시 먹을 수 있는 음식 리스트에 추가시켰다. 


아이러니한 사실을 하나 덧붙이자면, 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요리 능력이 제로에 가까운데...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요리가 김밥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이루어진 결실이지만, 이제는 김밥 열 줄을 싸는데 1시간 반도 걸리지 않는 내공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이토록 김밥을 좋아하고 애정하는데 무려 2년이라는 시간동안 김밥을 먹지 못했다니!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생각난 김에 내일은 김밥을 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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