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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Feb 19. 2022

헤밍웨이와 박상민 - <무기여 잘 있거라>

쇼펜하우어의 철학

  헤밍웨이의 대표적인 작품, 내가 읽어본 유일한 그의 작품인 <노인과 바다>의 결말에서는, 바다 어딘가에 남아 있을 행운을 건져 올리러, 석양빛으로 물든 바다로 다시 나아가는 노인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물론 나도 저자 분의 요약본으로 읽었지만, 희망이 그려져 있지 않다.


  주인공은 특별한 신념이 있어서 전쟁에 참전한 게 아니다. 그냥 시대가 그러했을 뿐이고, 지겨운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었고, 그렇다고 종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사명감도 아니다. 그러다 직접 겪게 되는 전쟁의 참상을 통해, 그리고 그 와중에 겪은 짧은 사랑을 통해, 인생의 허망함을 절실히 느껴버리게 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론과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스친다. 그냥 이런 게 삶인 건가? ‘희망’과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삶 자체에 수정이 필요한 건가? 우리는 사후(事後)적으로나마 ‘고난’이 주고 가는 교훈에 대해 곱씹어 보곤 한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이런 날들이 있을 수 있었던 거라는, ‘겪을만한 시간’으로 애써 포장하기도 한다. 정말 그러할까?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가장 절실했던 순간에 행복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 순간에 잃어버린 사람을, 살아남아서 기억하는 사람에게, 훗날의 해석이 정말로 의미 있는 경우일까? 선뜻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들. 덜 불행할 수 있는 결론을 말하려 하는 듯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런 공감력이다. 자신의 불행을 들키지 않고자 자신의 행복론을 피력하는 이들이, 파고들어가 보면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거든. 하여 세상에서 나만큼 힘들었던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것을 이겨낸 이 위대한 행복을 들어보라는 듯, 경솔할 수도 있는 것이고...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 노래의 제목이 왜 그랬던 것인지를,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정말 행복하고 싶었던 한 여자, 그러나 결국 모든 사랑의 비극을 겪은 후의 결론은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것. 행복을 앞세워 다가왔다가도 뒤에 숨겨놓은 막막함과 막연함을 털어내는 듯한 삶. 이보다 최악은 없을 줄 알았는데, 최악이란 갱신되는 속성을 지니기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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