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이데거와 카뮈는 자신을 실존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잖아. 그럼에도 그들이 실존의 계보로 분류되는 건, ‘불안’을 매개하는 컨텐츠였던 이유에서일 게다.
하이데거는 불안과 공포를, 대상의 명확성으로 구분한다. 공포는 명확한 대상이 존재하는 경우다. 불안은 명확한 대상이 없는, 그야말로 막연함 속에서의 시달림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불안을 ‘가능성’으로 해석한다. 불안하다는 건, 그간 고수하고 있던 체계로는 버텨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지. 그래서 어찌해야 좋을지에 대한 고민, 즉 삶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난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
불안은, 미래의 시간대로부터 무엇이 다가올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이 불안을 극으로 밀어붙인 게 죽음. 그래서 하이데거 철학에서 죽음이 중요한 것.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삶이 유의미해질 수 있는 것. 무한히 연기될 수 있는 삶이라면, 시간에 가치를 매기지는 않을 터. 어느 유명한 시구절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날인 것처럼...’
이런 연유로 니체가 기독교를 ‘죽음의 설교’에 비댄 것. 저 너머에 펼쳐진다는 시간대에 대한 가정으로, 이 삶을 고스란히 저당잡히는 당대 기독교 사회를 비판했던 것. 물론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원했던 삶의 모습도 아닐 테고, 건강한 신앙으로 한 세상을 살다가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토마스 만의 <마(魔)의 산>은, 물론 이 또한 저자의 요약본으로 대강을 살핀 경우이지만, 죽음 앞에서 깨닫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은 사촌의 병문안을 위해 요양원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병이 발견되어 치료를 위해, 그곳에서 7년의 세월동안 보내게 된다. 유럽 각지의 부유층들이 모여든 요양원에서 매일같이 마주하는 광경이라곤, 죽음 가까이에서 꾸역꾸역 생의 시간을 연장하고 있는 듯한 무기력함. 이전까지는 전혀 죽음에 대해 고민해 볼 일이 없었던 주인공이 직접 죽음을 대면하면서 겪게 되는 인식의 변화는, 삶을 향한 것이었다.
7년의 시간을 보내고 죽음의 산에서 내려온 생의 노력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으로 이어진다는 아이러니는, 실존철학 시대의 유럽 사회가 보여준 모순의 일면이기도 하다.
육체와 정신에 관한 논박을 펼치는 인물,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대립은 사상사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 같기도 하다. 나프타는 죽음이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란 플라톤주의를 견지한다. 정신은 곧 육체라는 세템브리니는 언뜻 니체주의자. 나프타의 자살은, 이젠 종교가 신앙의 범주일 뿐, 사회의 메커니즘은 인간 중심으로 옮겨오게 되는 시대성을 상징하는 듯.
삶 너머에 천국과 이데아가 펼쳐진다는, 그런 신앙심으로 죽음을 긍정할 게 아니라는 거지.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은 가장 몰교섭적인 사건. 저 너머의 시간에 뭐가 있는지 누구도 말해줄 수가 없잖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어 있고,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뭘 겪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니까. 저 너머의 시간에 뭐가 있든, 죽음은 최강의 불안으로 자리해, 이 삶을 관장하는 것. 그러니 일단 사력을 다해 살 것. 그 이후의 시간은 신에게 맡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