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말과 사물>
이 책은 보르헤스의 텍스트에서 나왔다며, 미셸 푸코가 자신의 대표 저작인 <말과 사물>의 서문에 보르헤스를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유명할 정도이니... 보르헤스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난 거지. 푸코가 들어 썼다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들뢰즈도 엄청 인용해. 그 이외의 많은 포스트모던의 철학자들이 사랑했던 문인.
이를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그렇잖아. 어떤 식으로 이해했고, 얼마만큼의 풍요로운 해석을 내놓느냐에 따라 내 소양이 증명되는 것. 보르헤스의 작품들이 그 비슷한 입지, 어디까지 이해하느냐가 문제인 거지. 아마도 지적 욕망을 지닌 이들에게 작품 자체는 어떤 당위성을 지니는 경우가 아닐까?
워낙 철학에 능한 문인이었다 보니, 보르헤스에 관한 해설은 문학만으로는 빈약하다. 그 중에서도 단 한 명의 철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쇼펜하우어다. 그의 형이상학적인 환상 문학의 기저에는 불교의 관념론도 깔려 있으며, 불교에 관한 저서를 출간한 적도 있다. ‘저자의 죽음’을 말한 롤랑 바르트의 선구가 되는, 모든 해석을 독자들에게 내맡기는 열린 체계의 단편들은, 독자 입장에서는 인도-유럽 어족의 사상들을 죄다 들여다봐야 가까스로 이해가 될 지경.
그의 인생으로 겪은 인문의 총아를 바벨의 언어로 지어올린 판타지, 그것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도서관이기도 했다.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던 보르헤스에게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재가 놀이터였다. ‘놀이터’에 빗댄 표현이 결코 비유만은 아닐 정도로, 여간한 동네 공공도서관만한 규모를 소유하고 있었던 아르헨티나의 상류층이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상류층들에게 수 천 권 정도의 도서를 소장한 개인 도서관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단다.
성인이 되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도서관 사서가 된다. 늘상 책과 함께하는 이들이었지만, 관료주의에 찌들어 있는 도서관 직원들은 보르헤스와 맞지 않는 성향이었다. 진즉에 관계의 문제를 체념한 보르헤스는, 책이라도 실컷 읽자는 심사로 그 불편한 동거를 지속한다. 보르헤스의 인생에서 책은 이래저래 도피처인 동시에 낙원이었다. <바벨의 도서관>을 지어올린 환상의 요소들은 실상 일상에 기반하는 셈.
보르헤스는 자신의 문학이 꿰고 있는 키워드를 ‘시간’으로 언급했다. 보르헤스는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어록으로 부연한다.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들도 역시 하나의 강이다. 시간을 사는 우리들도 흐르는 존재라는 것.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돌이킬 수 없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시간은 나를 삼키는 호랑이이지만, 내가 바로 호랑이이다. 시간은 나를 소진시키는 불이지만, 내가 즉 불이다. 세상은 불행히도 환상적이지 않고, 나는 불행히도 보르헤스이다.”
왜 그가 이토록 시간에 집착을 하게 되었을까? 이는 도서관과 비슷한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싶다. 보르헤스는 마흔이 넘어서야 우리가 알고 있는 보르헤스의 지위로 올라서기 시작한다. 그전까지는 세계는커녕 아르헨티나 내에서도 미미한 인지도였다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보르헤스에게 기대했었단다. 작가로서의 삶에는 항상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문인의 꿈을 안고 상류층으로서의 문화를 향유하며 자라났지만, 정작 문인이 되어서는 도서관 사서로서의 삶을 병행해야 했던 녹록치만도 않았던 세월. 게다가 정치적 탄압에 잇대어진 모욕과 아버지 쪽에서 유전된 실명의 병까지 덧대어진 불운. 그 어둠의 조건들에 둘러싸여 있던 시간들로부터, 자신을 스치는 순간순간들을 섬세히 대할 수 있는 감각이 세련된 건 아니었을까?
이는 철학과 문학의 수사가 아니더라도, 깊고 짙은 절망의 시간을 겪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가 그저 삶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실존의 문제이기도 할 터. 절망만큼이나 철학적, 문학적 각성과 이해가 수월한 시간도 없으니까. 보르헤스도 말했듯, 정신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인지도... 이는 한문학 쪽에서는 유명한 문학 이론이기도 하다. 불행한 시절을 살고 있다면, 다행히 글을 쓸 수 있는 여건과 열망 속에 놓여 있다면, 불행한 김에 스스로를 세련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