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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도구와 목적성

매 순간을 산다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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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의 묠니르는 망치라고 해야 할까? 해머로 봐야 할까? 여튼 못을 박거나 벽을 허무는 용도가 아닌 상해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방패의 상식적 기능은 방어이지만, ‘퍼스트 어벤져’에겐 공격용으로 날아가는 방패이기도 하다. 도구의 효용이란 것도 전체의 계열 속에서 규정되는 하나의 맥락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존재 이해’에 의한 ‘유의미화’다. 쉽게 말해 도구적 기능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담뱃불을 붙이는 라이터로 따지는 병마개들이 얼마나 많던가.

도구는 그 자체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못은 벽에 박혀 무언가를 걸기 ‘위해’ 존재한다. 병따개, 지게 같은 것들은 아예 이름마저도 쓰임에 종속된 것들이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언급되는 ‘도구’는, 우리가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인식한다는 함의다. ‘집을 본다’는 건, ‘하우스’적 사물에 ‘홈’의 가치체계를 투영하는 것이기도 하듯, 사물은 그것의 목적성을 지시하고 그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목적성이 담겨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언제나 ‘쓸모’의 목적성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우리는 항상 ‘쓸 것’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 자신의 잉여적 속성에 대한 자책으로 방황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쓸모의 범주를 넓히고자 자기를 계발시켜 준다는 책을 집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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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기능’으로써 이해하는 목적론적 인식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사회의 한 기능으로써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세상’으로 설정된 범주가 과연 타당한가를 묻고 있다. 더군다나 그 기준을 누가 제시한 것이냐에 대한 물음이 앞서야 한다. 우리가 늘 입에 달고 사는 ‘세상’이란, 스스로의 지평이 닿는 곳까지의 세계일 뿐, 세상 그 자체인 것도 아니다. 지평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 경계에 부딪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이미 대답을 정하고서 스스로에게 묻는 존재물음이다. 

하이데거는 도구와 용도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우리를 규정짓는 용도라는 것은 없다. 존재의 의미와 목적은 미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 적소의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때그때마다의 적소성은 가변적이다. 실존의 의미는 미리 지정된 목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맞닥뜨린 맥락에 따라 재지정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나’라는 정체성을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내 스스로 ‘기획’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묻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물음에 걸리는 존재자’라고 부연한다. 누군가가 던진 어떤 질문은,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대답이기도 하다는 것. 왜 그것이 궁금할까? 왜 그것에 대한 대답이 듣고 싶을까? 그 질문이 누구나 궁금해 하는 성질인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대답을 누구나 듣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조금이라고 발을 걸고 있는 관계의 범주 속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다. 관계와 매개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통분할 수 있는 단어는, 언제나 자신 앞의 모든 사태와 더불어 흐르고 있는 ‘시간’이다. 분명 보편성을 공유하는 사회화의 시간도 체득되지만, 결국엔 각자의 시간을 사는 삶이다. 누군가가 겪어온 시간으로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무시간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매 순간을 사는 실존적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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