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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존재와 무 - 퐁티, 지각의 현상학

헤밍웨이의 어록으로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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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변증법에 관한 두 가지 해석 방법이 있다.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익히 들어봤을, 정(正)은 반(反)의 작용을 거쳐 합(合)의 자리로 수렴된다는, ‘지양’의 전개가 그 중 하나다. 또 다른 하나의 해석은 반으로부터 정이 발견되는, 한문학에서 노자를 해석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있다’는 ‘없다’의 개념을 전제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있고 없음은 서로에게 상감(象嵌)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 세상에 오직 나 홀로 존재한다면 굳이 ‘나’라는 개념이 필요 없다. ‘너’가 있기에 ‘너’와 구분되는 ‘나’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가 있기에 나 이외의 ‘너’와 ‘그들’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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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보다 우수한 것이 고귀한 것이 아니다. 진정 고귀한 것은 과거의 자신보다 우수한 것이다.”


헤밍웨이의 어록을 예로 들어보겠다. 과거의 시점에서 본다면, 과거 자신의 지평까지가 자신의 전부였을 뿐, 지금과 같은 자신의 상태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결코 가능성이 없었던 반성은 어떻게 내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그 반성적 동기는 외부에서 도래하는 자극에 의해서이면서, 또한 그 동력은 내게서도 無로 내재해 있다. 無는 그런 잠재성이다. 헤겔의 어록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나를 반성시키는 외부적 사안은 이미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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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인식이란 어떤 결핍의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 ‘텅 빈 의식’을 메우고자, 비어 있는 속성에 준하는 ‘생각’이란 걸 하게 된다. 인식의 전제조건은 결핍이다. 그 결핍에 준하여 존재가 결정(結晶)된다. 하여 ‘존재는 無’다.


무한히 열린 공간에서는 도리어 방향성을 잃기 마련이다. 막막한 사막과 망망한 대해는 무한히 열려 있지만, 방향의 선택이 무의미한 것은 닫혀 있는 공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황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사르트르가 정의하는 자유 역시 결핍을 전제로 하는 가능성이다. 결핍이 인도하는 방향성 안에서의 선택이 자유일 수 있다. 사르트르가 정의한 사랑에 빗대자면, 그 혹은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결핍의 문제에, 다른 수많은 선남선녀가 대안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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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같은 철학자는 결핍의 방식 그 자체로 가능성을 미리 한정하는 성격이라고 반박한다. 자신의 지향성과 결이 다른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자유라기 보단 고정관념이다.


결여가 아닌 충만으로 해석한 철학자가 퐁티다. 이를테면 배가 고픈 상태를 음식의 결여로 해석할 것이냐, 식욕의 충만으로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다. 퐁티는 결핍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無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의 키워드는 인식 주체로서의 ‘살’이다. ‘모든 사고에 앞서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존하는 잠재적 지평으로서의 몸’이 지각의 근거다. 세계의 실제적인 장(場)에 참여하는 건 신체이기에, 실질적인 지평은 정신보다 신체에 더 많이 축적된다. 조금 의역하자면 인문적 지성보다는 인문적 체험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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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철학에 대한 퐁티의 지적은, 세계 밖에서 세계를 관찰하는 입장이었다는 것. 그러나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이미 내가 그 세계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기에 인식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나’라는 하나의 간격을 통해서 세계와 연결된다. 그 자체로 완성품인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인식 주체가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서 참여하고 있는 퍼즐 전체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세계의 생리를 매개한 채로 세계에 참여하며, 그 지평으로 다시 자신을 포괄하고 있는 세계를 인식한다.


주체는 이미 세계의 한 표집으로서 세계에 참여하고, 그 참여의 지평으로 다시 세계를 인식하는 순환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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