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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성서 해석, <안티 크리스트>

역사 신학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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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를 따기 전까지는 최초의 인류에게 선악의 분별이 없었다. 신의 금지로부터 ‘하지 말아야 하는’ 도덕 개념이 제시된 것이다. 자신들이 그것을 딸 수 있는 가능성은 부도덕이 된다. 그러나 아직 선악과를 따지 않은 상태에선 그것이 죄인지도 판단할 수 없다. 신의 금령은 아담과 이브에게 그것을 범할 수도 있는 역량을 지녔음도 함께 고지한 순간이었다.


『성서』는 이런 모순된 논리를 안고 있다. 니체는 이런 논리적 모순이 오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니체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에 입각해 기독교를 비판한다. 열매를 매개한 신의 도덕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 열매를 따는 행위는 선도 악도 아니었다. 왜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에 대한 이해의 의지가 없다. 도덕적 판단력을 갖추기 이전부터, 미리 규정된 도덕에 의해 그냥 그것은 이미 선이고 이미 악이다. 열매를 딴 이후에는 그 도덕에 순응할 뿐이다. 열매를 따기 전이나 딴 후에나 인간의 의지는 무력하다. 이것이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로 이어지는 전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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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이나 정신분석 분야에서 신화나 설화를 해석하는 작업은, 인류의 정신 구조를 들여다보는 한 방법론이다. 구전의 과정에서 스토리는 내용이 더해지기도 덜어내지기도 한다. 그 총체성으로 보면 인간의 심리 전반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보편성들이 진화를 거듭해 온 흔적이다.


단군 신화의 역사적 해석은 ‘토지’와 관련이 있다. 이는 곰의 토템을 지닌 농경부족이 호랑이 토템을 지닌 수렵민족과의 경쟁에서 이긴 사건이다. 꼭 양 진영 간의 전쟁이었다보단 두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이해할 일. 농경이 시작되고, 일정 토지에 정착하면서, 점차 부족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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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학은 『성서』의 신화를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적혀 있는 ‘팩트’이기에 절대 비판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건, 인류의 정신사를 담고 있는 인문학적 가치로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만으로, 죄다 뻥이네 어쩌네를 하는 경우도 인문적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문화인류학 관점에서 본다면 단군 신화 역시 우리의 정신사를 담고 있는 역사다.


니체는 『구약성서』에 담긴 풍요로운 상징성들은 칭송한다. 그것이 허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화가 지니는 상징성, 그 전제를 감안해서 바라봐야 하는 진실들이 있는 거지, 그 자체가 팩트로서의 진실이라는 게 아니다.


『신약성서』는 순전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날조된 이데올로기로 규정한다. 심지어 그것을 읽을 땐 장갑을 끼도록 권고한다. 너무도 불결하다는 이유로…. 그 죄를 바울에게서부터 묻고 있다.

종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지금의 상식에서 돌아보는 니체의 철학은, 신에 관한 의견에 있어서만큼은 급진적이지 않다. 『안티크리스트』라는 저서에서도 오늘날의 감각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라기보단, 해도 해도 너무한 기독교의 위선과 무례, 독선과 욕망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혁명가로서, 실천하는 양심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오직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인이 존재했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이 십자가에서 죽어 버렸다. 그 순간부터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유일한 그리스교인이 체험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신의 프로젝트가 한낱 인간에 의해서 밝혀진다면 우리는 그만큼 불완전한 신을 믿고 살아가는 것뿐이 되지 않는다. 과연 신이 그리도 허술한 존재이겠는가? 인간으로서 알 수 있는 가능성의 세상도 우리는 다 알지 못하고 산다. 그러면서 신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신이 보시기에도 이 얼마나 우스운 작태이겠는가 말이다. 그 어리석음을 딱하게 굽어보고 계실 것이다.


삶과 사람과 사랑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두운 눈으로 천국을 보려 하는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좁은 마음에 신을 담았다고 자부하는가?


남의 신앙을 밟아 가면서까지 자신들의 신앙만을 고집하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기도를 해야 갈 천국이라면, 그곳은 과연 신이 만든 곳이겠는가? 인간이 만든 곳이겠는가? 그들은 신을 믿고 있는 것인가? 자신들의 신앙을 믿고 있는 것인가? 자신을 믿는 자에게만 천국을 허락하는, 그런 옹졸한 신을 믿어야 갈 수 있는 천국이라면 차라리 지옥불에 떨어지겠다던 법정 스님 곁에서, 함께 울고 계신 그리스도가 아닐까?


독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많은 신자들에게 니체는 ‘불온’한 철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조리가 없었다면 니체를 위시한 많은 철학자들도 굳이 ‘불온’의 메스를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일부의 부조리와 몰상식으로 전체를 매도할 수 없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선량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썩은 사과’는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전까지는 사과 전체가 감당해야 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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